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제냐는 이만 자리를 정리하기로 했다. 서로를 걱정하는 건 어색했고 민망했다.
‘왜 저렇게 대놓고 걱정한담?’
신관복을 챙긴 제냐가 마왕과 레라지에에게 인사를 건넸다.
“저도 이제 쉬어야겠어요.”
그러자 레라지에가 맑게 웃으며 물었다.
“옷 입는 거 도와줄까? 어떻게 입는지 알아?”
제냐가 떨떠름한 기색을 숨기며 대꾸했다.
“…저는 알죠. 레라지에 님께서는 어떻게 아시는데요?”
마족이 어떻게 신관복 입는 걸 도와줄 건데? 제냐의 물음에 레레지에가 묘한 미소와 함께 콧소리를 냈다.
“으음.”
뭐, 대충 숨겨진 이야기가 뭔지는 알 것 같았다.
‘정말 상대를 가리지 않는구나.’
그녀가 그렇듯 어이없어 보이는 마왕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 제냐가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넸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제냐도 푹 쉬게.”
“네. 그럼.”
제냐는 곧장 응접실을 떠나 방으로 향했다.
달칵.
문을 열면 언제나 그렇듯 루미에르가 다녀왔냐고 인사를 건네줄 것 같은데. 방은 조용했고, 적막했다.
사람의 온기가 없는 차갑고 정적인 방.
“춥다.”
조금 심심한 것도 같고 외로운 것도 같다.
사실 제냐는 이 텅 빈 방이 어색해서 일부러 마왕과 응접실에서 시간을 보낸 거였다.
그리고 마왕도 그걸 알아서, 제냐와 의미 없는 투닥거림으로 시간을 보내 준 거였고.
“원래 그랬던 건지, 아니면 내가 이제 그 배려를 느끼는 건지.”
언제부터 사람의 온기를 이토록 그리워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계획대로 잘될 거야.”
아무런 문제 없이. 완벽하게.
크게 숨을 들이마신 제냐가 손안에 쥐고 있던 신관복을 들어 올렸다.
새하얀 신관복은 참 깨끗해 보였다.
* * *
눈 밑에 걸린 하얀 천이 바람에 펄럭였다. 제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레라지에를 쳐다보자 그가 웃으며 설명했다.
“정이 들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아이들을 돌보던 신관들의 얼굴을 가렸다고 하더군.”
참, 가지가지 한다.
레라지에가 제냐의 모습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래도 덕분에 덜 수상할 거야. 그대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는 것도 자연히 해명될 테고.”
“그렇죠.”
제냐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간을 확인한 레라지에가 물었다.
“자, 그대가 맡은 사람의 배경을 다시 설명해 보게.”
제냐는 차분하게 미리 레라지에에게 받았던 신상 정보를 읊었다.
“이름은 씨씨. 제국 동부 론드리고 지방의 신전에서 예비 용사 후보들을 돌보던 신관 중 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전날 돈을 받고 신이 나서 떠난 그 여자를 말하는 거였다.
“언제 계획이 폐기될지 몰랐기 때문에 성력이 볼품없는 저 같은 하급 신관이 예비 용사들을 돌봤고요.”
제냐는 레라지에의 마법으로 옅은 갈색이 되었을 눈을 깜빡이며 말을 이었다.
“루미에르가 죽은 줄 안 성녀가 이번에 예비 용사 후보들을 불러 모으면서 처음으로 본신전에 발을 들이게 됐어요.”
다행히 씨씨는 본래 단발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기에 머리카락까지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본신전에 온 지 하루 만에 루미에르가 돌아오면서, 지금은 위치가 붕 뜬 상태죠.”
위치가 붕 뜬 건, 그녀가 데려왔던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도 자기가 돌보던 애들인데, 이렇게 전혀 모르는 사람한테 맡기고 떠나 버리다니.’
아이들이 신관에게 정을 붙이지 못하게 했으니, 그 반대도 당연한 거였지만 새삼스레 씁쓸함이 밀려왔다. 제냐가 입을 다물자 레라지에가 말을 덧붙였다.
“거기에 더해 지금 아스가 조금 반항적이라서 더 애매한 상태라더군.”
왜 씨씨라는 여자가 레라지에의 제안을 받아들였는지 알겠다. 하지만 도망갈 수 있었던 여자와 달리 남은 아이들은…….
‘여기까지.’
긴장이 돼서 그런지 생각이 너무 많았다. 지금은 루미에르의 일에만 신경을 쓸 때였다.
‘내가 모든 사람을 구해 줄 수는 없어.’
제냐는 그녀의 사람을 챙기기에도 급급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같은 의미로, 상황에 어울리지 않지만 제냐는 요 며칠 매우 신경 쓰였던 부분을 지적했다.
“그런데 언제까지 아스라고 부르실 거예요?”
루미에르가 용사라는 걸 알면서, 그의 이름을 모르지 않으면서, 레라지에는 굳이 ‘아스’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제냐의 의문에 레라지에가 씩 미소를 지었다.
“직접 소개를 받을 때까지?”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레라지에의 얼굴에 부정적인 기색은 없었다.
‘이건 루미에르가 잘생겨서인가?’
눈을 가늘게 좁히던 제냐가 다시 표정 관리를 하며 입을 열었다.
“요즘 도움을 참 많이 받았어요.”
제냐는 아닌 척해도 요새 레라지에를 엄청 신경 쓰고 있었다.
‘직접적으로 그런 말을 들었으니 당연한 거지.’
인간계로 오고 난 이후 이래저래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었고. 그러니까 확실하게 감사 인사를 해야 했다.
제냐가 똑바로 레라지에를 쳐다보자 그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대를 돕는 건 기쁨이지.”
“꺼려지실 텐데, 여러 번 신전까지 오시고.”
지금도 제냐를 데려다주느라, 이렇게 신전 안까지 들어와 있지 않은가?
“폐하께서 원하셨으니까.”
역시 인사를 하기로 한 건 잘한 짓이었다. 겸사겸사 이쪽 입장도 밝힐 수 있고.
크게 숨을 들이쉰 제냐가 레라지에를 똑바로 마주 보고 말했다.
“여러모로 감사드려요. 그래도 폐하께는 앞으로도 조금 더 막 대할 것 같아요.”
그 말에 레라지에가 입을 살짝 벌렸다. 잠시 뒤, 푸하, 웃음을 흘린 레라지에가 조금 더 편안해진 낯으로 이야기했다.
“…솔직하군.”
제냐가 어깨만 으쓱이자 피식, 웃어 버린 레라지에가 그녀가 그랬듯 솔직하게 말했다.
“나도 그럼 조금만 더 불편해하도록 하지.”
제냐가 꾸벅 인사를 건넸다.
“네, 배려 감사드립니다.”
“그래.”
“무사히 다녀오세요.”
인사가 끝났다. 자리에 서서 얼른 레라지에가 떠나는 걸 기다리는데, 그가 미동도 하지 않고 제냐의 앞에 서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레라지에가 짙은 미소를 뿌렸다. 설마.
“…폐하께도 몸 성히 돌아오시라고 전해 주세요.”
정말 이게 원하는 답인가 싶어 느릿느릿하게 말하자 레라지에가 크게 기뻐했다.
“그러지!”
짝, 손뼉을 치는 그 모습에 제냐가 저도 모르게 말했다.
“정말, 폐하를 매우 사랑하시네요.”
그러자 레라지에가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당연한걸.”
와. 마왕에게 꼭 이 이야기를 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예상되는 마왕의 반응을 떠올리며 슬쩍 눈을 굴리는데, 그사이 레라지에가 손을 살랑 흔들며 사라졌다.
혼자가 된 제냐는 시간도 때울 겸 주변을 살폈다.
그러니까 지금 이곳은 씨씨가 본신전에서 제공받은 방이었다.
“확실히 수도가 돈이 많은가 보네.”
예전에 제냐가 지내던 신전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고작해야 하급 신관이 머무는 방임에도.
“다 사기 치고 다니면서 얻은 돈이겠지만.”
비웃음을 머금고 방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얼마나 시간을 보냈을까,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후우.”
제냐는 방을 나서기 전, 거울을 살폈다. 하얀 신관복을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내려 묶은 채, 눈 밑을 하얀 천으로 가린 신관.
문제없어 보이는 모습을 확인한 제냐가 또 종이 울리기 전 방을 나섰다.
그리고 레라지에가 알려 준 대로, 복도를 지나 아이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안녕, 얘들아.”
문을 열면서 던진 인사에 아이들이 휘둥그레 눈을 뜨고 제냐를 쳐다봤다.
‘뭐지?’
분명 본래 씨씨는 아이들에게 편하게 말을 놓았다고 했는데. 뭔가 잘못된 걸까?
바쁘게 머리를 굴리던 제냐는 그녀의 허리께에 오는 아이들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깨달았다.
그녀를 두려워하면서도 애정을 바라는 저 눈빛. 그리고 제냐도 겪어 봤던, 아이들을 대하던 신관의 태도들.
‘정말이지 신전은 왜 다 이 모양 이 꼴이야?’
편하게 대한다는 게 막 대한다는 뜻이라고는 안 했잖아?
씨씨라는 여자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 * *
버릇처럼 목에 걸린 시계를 매만지며 우울하게 침대에 누워 있던 루미에르는 정적을 이기지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의 체온 덕에 침대는 따뜻했지만 포근하진 않았다.
‘잠이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제냐와 함께 있을 때는 시간이 나면 매일 낮잠을 자서 그녀가 걱정할 정도였는데, 이상하게 여기서는 잠도 안 왔다.
하릴없이 방을 쳐다보는데, 보는 곳곳 다 제냐가 떠올랐다.
이건 제냐가 좋아하는 건데, 저건 제냐가 싫어하는 건데, 제냐의 방에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이거 제냐가 좋아할지 모르겠다.
모든 생각이 제냐에게로 귀결됐고,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제냐.’
음울하게 베개를 꼭 끌어안던 루미에르의 머릿속에 마법사가 생각난 건 바로 그때였다.
“부를까?”
마법사를 불러서 제냐의 이야기를 하고, 그녀에 대한 자랑도 좀 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제냐의 얼굴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자, 제냐의 이야기를 해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을 사람이니까.
루미에르가 살짝 표정을 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종을 울려 신관을 부른 루미에르가 마법사를 부르려는데, 신관이 그보다 먼저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먼저 만나야…….”
“황녀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황녀? 그 여자가 왜?
루미에르가 미간을 좁히는데, 불편한 얼굴을 한 신관이 반색했다.
“혹, 원치 않으신다면 만남을 거절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대로 황녀를 돌려보내도 문제는 없었다. 다만, 이쪽에서 한 번 그녀를 도와주기로 했었고, 부탁한 것도 있으니 한 번쯤 만나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만나 보죠.”
그 말에 신관의 얼굴이 새까맣게 죽었다. 루미에르는 그를 아무렇지 않게 넘기며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