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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83) (83/145)

진은 비틀거리며 복도를 가로질렀다. 다른 동료들보다 늦게 루미에르의 방을 나선 탓에 신관들에게 더 오래 붙잡혀 있었지만, 그들에게 유의미한 정보를 주진 못했다.

그리고 물론 그건 자의로 한 선택이 아니었다.

아득-

“개자식…….”

진은 아직도 얼얼하고 조금만 움직여도 찌릿찌릿한 왼쪽 손목을 붙들었다.

‘또 부서지고 싶지 않으면 눈치껏 행동하는 게 좋을 거예요.’

다시 한번 잇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멍청하긴!’

너무 흥분해서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까지 전부 하고 말았다. 분명 처음에 우위에 있는 건 그였는데, 덕분에 약점이 잡혀서 ‘그 여자’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지 않았던가?

‘역시 그 여자가 역린이야.’

하지만…….

찌릿한 손목이, 흉흉하게 빛나던 짐승 같던 그 푸른 눈이 자꾸만 떠올라 숨이 막혔다.

진은 크게 숨을 가다듬으며, 이번에 새롭게 배정된 그의 방문을 열었다.

그간 방 하나에 그들을 전부 몰아넣은 것과 달리, 신전은 다시 그들에게 독방을 선물했다.

다른 멍청한 것들은 이게 그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한 사탕발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진은 눈치가 아주 좋은 편이었다. 신전에서 지금 그들의 위치는 최하층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에게 독방을 준 건.

‘…서로 경쟁하라고 그러는 거겠지.’

누가 더 좋은 정보를 물어 올지 경계하고 견제하라는 의미가 분명했다.

신전 것들이 하는 생각이야 뻔했다. 그래서 그렇게 맘껏 화를 내고 신경질을 냈던 거였다. 다른 이들이 자신을 견제하지 못하도록. 그가 절대 정보를 얻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도록 말이다.

하지만 그 유리했던 고지를 스스로가 다 망쳐 버렸다.

‘어떻게든 다시 되돌려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루미에르의 약점을 찾아내야 했다.

‘우선은 씻자.’

오랜만에 편하게 목욕을 하는 것이다. 이후 신관을 불러서 손목을 치료받고 루미에르의 약점을…….

“이런, 아직도 눈치 못 챘나?”

방에 들어서자마자 욕실로 향하던 진은 바로 귀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을 움찔 떨었다.

누가 있어……?

겁에 질려 몸이 바짝 굳는데, 훅 고급스러운 향기가 코끝에 닿았다.

“내가 어디 가서 존재감 없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 봤는데 말이야.”

딱딱 이를 떠는 진의 어깨 위로 사락, 곱슬거리는 은발이 흩어졌다.

* * *

진은 오만하게 그를 내리깔아 보는 회색빛 눈에 슬쩍 들었던 고개를 다시 푹 숙였다.

“내 말 알아들었나?”

사내는 진을 한참 밑에 있는 아랫사람을 가르치듯 굴고 있었다.

그러니까 다정한 척하면서도 고압적으로 그를 깔아뭉개고 있다는 소리다.

모욕적으로 침대 밑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진과 침대에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그를 내려다보는 화려한 인상의 사내.

이 사내는 그날 루미에르와 함께 있던 일행 중 하나였다.

‘로브를 입고 있어서 바로 알아차리진 못했지만.’

진은 왼쪽 손목과 마찬가지로 벌겋게 부어오르기 시작한 오른쪽 손목을 눈에 담고는 욕을 짓씹었다.

‘개자식들, 나한테 왜 이러는데?’

두 놈 다 진을 협박하면서 한번 부러트렸던 팔을 걸고넘어졌다. 용사의 동료로서 사지를 돌아다니긴 했지만 진은 모든 마법사가 그렇듯 원거리에서 마법을 난사했다.

그러니까 신체적으로 위협을 받을 일이 많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팔이 부러진 적은 처음인 것이다.

그런데 짧은 시간 내에 벌써 같은 사람들에게 두 번씩이나 겁박을 받고 있었다.

문제는 그런 신체적인 위협이 너무나 잘 통하고 있다는 거였다.

‘또 겪고 싶지 않아.’

부러졌을 때의 고통을 너무 잘 알아서, 멍이 든 지금도 이렇게 아픈데.

진은 잘게 떨리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가 아릿하게 올라오는 통증에 다시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때 귓가에 다정한 목소리가 휘감겼다.

“대답 안 하나?”

그러면서 은근슬쩍 뻗어 오는 장갑 낀 손에 진이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내가 입꼬리만 올려 웃으며 명령했다.

“말로 해야지?”

“네, 네! 절대 함구하겠습니다!”

“그래, 계약은 성립됐네.”

진은 그 말과 함께 허공에서 사라지는 계약서를 보며 눈물을 삼켰다. 정말, 정말 다 끝난 것이다.

은발의 남자, 계약서에 적힌 이름에 따르면 레라지에가 홀가분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심미안에 맞지 않는 자와 너무 오래 함께 있었군. 얼른 가 봐야겠어.”

떠나기 전까지 그를 우롱하는 것을 멈추지 않던 사내는 그 말과 함께 쯧, 혀를 차고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그 순간까지 그 누구도 신전 안에 침입자가 나타났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 사실에, 진은 끝까지 붙들고 있던 마지막 희망을 내려놓았다.

‘망할!’

어쩌다가 그의 인생이 이렇게 된 걸까.

진은 잘 펴지지 않는 다리를 주먹으로 세게 내리쳤다가 앓는 소리를 냈다.

아린 양팔과 저리는 양다리. 그리고 막혀 버린 입까지.

“그 여자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심장을 조여 오는 무형의 힘에 진은 절망에 빠졌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 * *

제냐가 마왕과 투닥거리는 동안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돌아온 레라지에가 생긋 웃으며 응접실로 돌아왔다.

“맡기신 일은 모두 처리했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아스도 아주 잘 있다고 하더군요.”

그건 다행이네. 제냐가 고맙다는 의미로 눈인사를 하자 사르르 눈웃음을 친 레라지에가 마왕을 쳐다봤다.

“또 제게 맡겨 주실 일은 없습니까?”

그러자 마왕이 보란 듯 제냐를 돌아봤다. 레라지에가 이토록 일을 원한다고 말하고 싶은 게 훤했다.

‘유치하긴.’

그 시선을 대놓고 무시하자 마왕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됐다. 내일은 움직일 일이 많으니까 좀 쉬는 것도 좋겠지.”

“그럴까요?”

레라지에가 그 이상 매달리지 않고 마왕의 오른편, 그러니까 제냐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제냐는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고도 아무렇지 않게 생긋 웃는 레라지에를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전날, 그리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도 레라지에는 평소처럼 제냐를 대했다.

‘지금도 딱히 적의는 없어 보이고.’

그래서 제냐도 언제나처럼 레라지에를 대하는 중이었다. 마왕이 제냐의 편을 드는 이상, 레라지에가 그녀를 위협할 일은 없을 테니까.

“레라지에 님, 이번 차는 특별한 거예요.”

레라지에 앞에 찻잔을 세팅하며 말을 걸자 그가 의문을 표했다.

“특별?”

“무려, 폐하께서 직접 내리신 차거든요.”

“…뭐?”

숨도 쉬지 않은 채, 굳어 있던 레라지에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잡았다.

“폐, 폐하께서 직접 하사하신 차라니!”

레라지에가 황홀한 얼굴로 차를 음미했다.

“아아! 이 깊은 맛이라니!”

그러고는 언제나 그렇듯 엄청난 찬양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제냐는 벌써 질린 낯을 하는 마왕을 쳐다보며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마왕이 분한 듯 눈에 힘을 주다가 영혼 없는 얼굴로 레라지에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여 줬다.

평소라면 진작에 말을 잘라 냈을 텐데, 일을 많이 시켰다는 자각이 있는 건지. 아니면 무사히 신전에 다녀온 것이 기꺼웠던 건지 마왕은 순순히 레라지에의 찬양을 전부 들어 줬다.

그 찬양이 정도를 모르고 30분 넘게 이어지려고 하자 결국에는 말을 잘라 냈지만.

“거기까지. 이제 구해 온 물건을 좀 보지.”

“아, 그렇죠.”

레라지에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튕겼다.

“이겁니다. 사이즈는 당연히 맞겠죠.”

그리 말한 레라지에가 제냐를 쳐다본 건, 이게 그녀가 입을 옷이기 때문이었다.

루미에르가 들었다면 또 신경질을 잔뜩 낼 말이었다. 어색하게 웃은 제냐가 그리 낯설지 않은 복장을 살피며 물었다.

“제가 맡은 일을 원래 하던 사람은 어떻게 됐나요?”

사실 물으면서도 딱히 상대가 걱정되진 않았다. 그녀가 싫어한다면, 그러니까 다른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면 마왕이 굳이 인간을 죽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레라지에는 가볍게 말했다.

“돈을 잔뜩 받고 신나서 떠났지?”

딱히 귀찮은 기색도 없는 레라지에의 얼굴을 보아하니 망설임 따위는 전혀 없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신관 중에 사명감이 있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다들 먹고살기 위해서 하는 거지.

‘그래도 자기가 마족을 도와주고 있는 줄 알았으면 조금 망설였을 텐데.’

아니, 오히려 겁을 먹어서 더 빠르게 도망갔으려나? 쓰게 웃은 제냐가 새하얀 신관복을 바라봤다.

마왕성에 살게 되면서 다시 이 신관복을 입을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기분이 묘했다.

“정말 혼자 가도 되겠나?”

마왕의 물음에 제냐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각자 맡은 일을 하는 거니까요.”

제냐는 신관인 척 신전에 잠입하고, 그사이 마왕과 레라지에는 ‘천계의 보석’을 찾기 위해 움직인다.

서로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일이니, 각자 일은 각자가 맡는 게 좋았다.

‘솔직히 도움은 충분히 받았고.’

레라지에가 오늘 위험을 감수하고 신전에 들러 마법사를 포섭한 것도 전부 제냐를 도와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더군다나 제냐의 일은 마왕과 레라지에가 소란을 피우는 사이 루미에르를 데려오는 거였으니까, 사실 위험한 건 두 마족이었다.

제냐가 아무렇지 않게 마왕을 쳐다보자 그가 어렵사리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

그 찝찝한 표정을 확인한 제냐가 부러 차갑게 말했다.

“위험한 건 귀신같이 눈치채는 편이고 비장의 수도 있으니까, 저보다는 폐하랑 레라지에 님이 걱정이죠.”

언제나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는 마왕성에서 10년을 살았던 몸이었다. 신전? 우습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제냐는 성력을 가지고 있는 몸이었다. 그러니 쉽사리 그녀가 가짜 신관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제냐가 보란 듯 턱을 들자 마왕이 그녀를 따라 오만하게 말했다.

“성력을 쓰기 전에 처리하면 그만이야.”

“네, 그러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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