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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82) (82/145)

“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텐데.”

비열한 웃음을 흘린 마법사가 먼젓번에 부서트렸던 손을 흔들었다.

무심하던 루미에르의 눈이 번뜩였다. 흉흉한 푸른 눈을 정면으로 마주한 마법사가 흡,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 멈춰 섰다.

건들거리던 것이 무색하게 그는 몸을 잘게 떨며 감히 루미에르의 눈을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 살기를 받아 냈다.

‘처리할까?’

하지만 저 남자는 명분뿐인 직책이라지만 용사의 동료였다. 그가 잘못됐다는 소식은 세상에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만약 입단속에 실패해 루미에르가 남자를 죽였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제냐가 알게 할 수는 없어.’

하지만 경고할 필요는 있었다. 루미에르가 위협적으로 남자를 압박하던 힘을 치워 냈다.

“흐어억!”

크게 숨을 몰아쉬는 마법사를 앞에 두고, 루미에르는 겁에 질려 그를 바라보는 동료들을 돌아봤다.

“보다시피, 단둘이 이야기를 좀 해 봐야겠군요.”

“그, 그렇군.”

“그래, 우리는 이만 가 볼게요.”

이제껏 얼른 꺼지라고 온갖 티를 내도 자리에 버티고 있던 인간들이 하얗게 질려 도망가듯 방을 떠났다.

문이 닫히고 루미에르가 다시 마법사를 쳐다보자 그가 흠칫 놀라며 뒤로 한 발 물러났다. 꼴을 보아하니 조금만 더 겁을 주면 입을 다물 것 같았다.

하지만 루미에르가 입을 열기 전, 마법사가 먼저 소리를 질렀다.

“내, 내가 널 봤던 걸 이제껏 숨겨 줬는데 너무한 거 아니야?!”

커다란 목소리가 매우 거슬렸다. 루미에르가 작게 혀를 차며 되물었다.

“그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을 위해서가 아닙니까?”

“뭐라고?”

“타이밍을 재고 있었겠죠. 중요한 정보일수록 아껴 두고 있어야 이득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동료들에게 개인적인 관심은 없었지만 통제를 위해 그들의 특성은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마법사가 한껏 찔린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네, 네가 뭘 알아?”

알게 뭐람.

‘제냐, 보고 싶어요.’

정말이지, 이 시끄러운 것들을 얼른 치워 내고 제냐만 생각하고 싶었다.

죽이진 않아도 뼈 한 군데 정도는 부러뜨려도 좋지 않을까?

‘이미 한 번 해 봤으니까.’

고민하는데 부들부들 떨던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너, 너!”

커다란 목소리에 손을 꿈틀거리는데, 마법사가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그날 마을 사람들이 음식에 뭘 타는 걸 봤었어!”

그러나 남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그 접시는 네 몫이었어. 용사라고 네게 제일 좋은 접시를 내주겠다고 하는 걸 들었었으니까.”

루미에르가 눈썹을 치켜세우는데 남자가 말을 이었다.

“그게 독인 줄 알았지!”

그러니까 지금 마을 사람들이 루미에르의 접시에 뭘 타는 걸 알면서 그냥 놔뒀다는 소리를 하는 거였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걸 밝히는 이유가 무엇인가? 말을 꺼내 봐야 손해를 보면 봤지 이득을 볼 일이 없는데.

“그런데 너만 무사했어. 물론 그 암살자도 무사했지만, 걔는 음식을 안 먹어서 그런 거고. 아무튼 음식을 먹은 사람 중 멀쩡한 건 너뿐이었다고!”

그러니까 이 말은…….

“내 음식에 누군가 해독제를 탔다는 겁니까?”

“그래!”

루미에르가 괜찮았던 건, 그가 독에 내성이 있거나 특출한 자체 회복력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음식에만 따로 손을 써 뒀기 때문이라는 소리였다.

‘내 음식에 무언갈 타는 걸 모른 척했으니 어머니께 이 이야기를 하지는 못했겠지.’

그런데 그게 뭐? 마을 사람 전부가 한마음 한뜻이 아닌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마을 사람 중 한두 사람이 변심했다고 해도 마찬가지고.

예상치 못한 이야기라 상대를 해 줬지만 막상 이야기를 다 듣고 보니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그러자 루미에르가 생각을 행동에 옮기기 전 마법사가 다시 허무맹랑한 소리를 했다.

“그거, 그거 네 짓이지?”

“…뭐라고?”

황당함에 저도 모르게 반말이 튀어 나갔다.

그러니까 이 남자는 지금 루미에르의 실종이 모두 자작극이었냐고 묻고 있는 거였다.

사람이 참 한결같았다. 만약 루미에르의 접시에 무언가를 타는 걸 봤다고 한마디만 했으면 일행 중 아무도 독을 먹지 않았을 테다.

‘자기 때문에 이번 일이 일어났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가 보지.’

루미에르가 한숨을 쉬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저자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중요치 않았다. 루미에르는 얼른 이 귀찮은 대화를 마무리하고 싶었다.

“알겠습니다.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뭐?”

“마을 사람들의 행동을 모른 척한 것도, 그로 인해 당신이 마나 폭주를 일으킨 것도. 거기에 휘말려 내가 실종됐던 것까지 다 불운이 겹친 탓입니다. 됐습니까?”

마법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한참 말을 잇지 못하고 크게 씨근덕거리던 마법사가 악을 썼다.

“내가 틀렸다는 거야? 웃기지 마.”

“하아.”

“그게 아니라면, 그때 어떻게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있었지? 내가 잠시나마 네가 아닐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움찔 몸이 굳었다.

이자는 왜 이렇게 입이 가벼워서, 안 그래도 보고 싶은 제냐가 더 보고 싶게 만드는 걸까?

‘당신과 함께 있는 난, 남들이 봐도 행복해 보였나 봅니다.’

톡톡, 입술을 두드리던 루미에르가 씩씩거리는 마법사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입단속을 정말 제대로 해야 할 것 같았다. 제냐가 그에게 소중하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집어내고 있었다. 이대로 보냈다가는 분명 문제가 될 거다.

‘멍청한 건지, 순진한 건지 모르겠지만 마침 본인이 약점이 될 만한 이야기도 해 줬고.’

루미에르의 무기질한 눈이 마법사의 몸을 예리하게 응시했다.

* * *

그녀의 기분과 달리 하늘은 맑았고 바깥은 평화로워 보였다. 멍하니 창밖을 쳐다보는데, 뒤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신전을 보고 있는 건가?”

신전만 보고 있는 건 아닌데, 이상하게 창문만 바라보고 있으면 마왕이 방으로 들어왔다. 제냐가 뻘쭘한 감정을 숨기며 몸을 돌려 마왕을 쳐다봤다.

그는 질린다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괜스레 울컥한 제냐가 목소리를 높였다.

“보고 있을 때마다 오시는 거거든요?”

마왕이 방 한쪽에 자리한 테이블 앞에 앉으며 대꾸했다.

“그래야지.”

그게 아니라면 그건 정말 문제라는 저 말투가 굉장히 거슬렸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서, 제냐는 한숨과 함께 창문에서 떨어져 나와 마왕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그래서 정말 모레 움직인다고요?”

“그래.”

“잘될까요?”

“되게 해야지.”

담백하게 떨어진 말에 제냐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참 자신감이 넘치시네요.”

마왕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그녀를 쳐다봤다. 또 왜 시비냐는 표정에 제냐가 말을 더했다.

“나쁜 의미는 아니고요.”

이 일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서 짜증이 났다가도, 저렇게 걱정이 없는데 사실 이건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인 게 분명하다고 위안을 얻기도 했다.

그에 대한 생각은 언제나 양가적이었다. 제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물었다.

“레라지에 님은요?”

“나갔어.”

“레라지에 님을 데려오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어요?”

자기는 이렇게 저택 안에서 빈둥거리면서 모든 일을 레라지에에게 맡기고 있다니. 그걸 다 제대로 해내는 레라지에가 너무 신기했다.

“쉴 수 있을 때 쉬는 게 좋지.”

“…틀린 말은 아니지만요. 너무 일을 많이 하시는 건 아닌지, 살짝 미안해지네요.”

그러나 마왕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자기는 좋아하니, 상관없지 않나?”

역시 뻔뻔하다.

제냐가 어이없다는 듯 마왕을 쳐다봤지만 그는 별다른 대꾸 없이 손을 저어 차를 내왔다.

제냐는 자연스레 그녀의 앞에도 놓이는 찻잔을 보며 코를 찡긋거렸다.

귀족인 레라지에는 정신없이 밖으로 굴리면서 시녀인 제냐는 마왕이 타 주는 차를 마시다니, 황송하기 그지없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코끝에 감도는 향기가 나쁘지 않았기에 제냐는 거부하지 않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뭐야?’

마왕이 직접 내리는 차는 제냐가 내린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이렇게 잘 타시는데 앞으로도 스스로 타 드시는 건?”

마왕이 눈만 들어 제냐를 쳐다봤다. 제냐가 슬쩍 그 눈을 피하며 말을 덧붙였다.

“쉴 수 있을 때 쉬는 게 좋다면서요. 더 잘하는 분이 있는데 굳이 제가 차를 탈 필요가 있을까요?”

별생각 없이, 그냥 마왕을 놀리기 위해 던진 말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제냐의 뼈를 때렸다.

“이 일이 끝나고도 내 밑에서 일하려고?”

제냐가 어깨를 떨며 마왕을 쳐다봤다. 마왕이 우아하게 차를 마시며 제냐와 눈을 맞췄다.

“…글쎄요. 저한테 선택권은 주시려고요?”

계속 일을 하는 것도, 일을 관두고 떠나는 것도 다 그녀의 몫으로 줄 수 있겠냐는 물음에 마왕이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원하는 대로 해.”

제냐는 마왕에게서 저렇게 쉽게 답이 돌아올 때마다 울컥했다. 그녀는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 늘 많은 계산을 하고, 여러 생각을 하곤 했는데, 그 모든 게 마왕에게는 너무 쉬워 보였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당신에 대한 내 생각을 받아들였는데.’

제냐가 눈을 날카롭게 치뜨고 마왕을 쳐다보는데 그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나만 한 상사가 없지?”

정말 얄밉기 짝이 없었다. 제냐가 이를 악물었다.

“입 좀 다무세요.”

마왕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다가 평온하게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마음에 안 들어.’

한참 마왕을 노려보던 제냐는 눈이 건조해질 때쯤, 다시 차를 마셨다.

뭐, 그래도 마왕 덕에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던 걱정이 좀 사그라들긴 했다. 마왕도 나름 도움이 되는 것이다.

물론 제냐는 절대 그걸 인정할 생각이 없었지만.

그렇게 초조한 듯 평화롭게, 불완전한 고요가 그들을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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