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하군요. 언제까지 있을 예정입니까?”
“뭐? 너는 기껏 찾아와 준 우리한테 그따위 소리밖에 못 해?”
정보 탐색과 잠입, 그리고 그 외의 자잘한 더러운 일을 담당하기 위해 용사의 동료 중 하나로 뽑힌 전직 암살자 니키는 오랜만에 본 루미에르를 보고 적잖이 놀랐다.
‘사람이 이 정도로 바뀔 수 있나?’
니키는 그들을 향해 대놓고 불만을 드러내는 루미에르를 보며 작게 감탄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루미에르의 변화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말이 동료지, 그냥 감시자니까.’
자긍심이나, 의협심, 동료애 같은 간질거리는 감정을 가진 이들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래요, 루미에르 님. 오랜만에 뵙는데 이야기를 좀 하죠.”
“맞아요. 묻고 싶은 게 많거든요.”
물론 전직 암살자인 니키가 이 동료라는 무리에 들어오기로 한 데에는 이 건조한 관계가 크게 영향을 줬다. 귀찮지 않고, 괜히 착한 척할 필요 없는 그런 관계.
‘하지만 역시, 모든 건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지.’
아니, 이건 그냥 일행에 멍청하거나 욕심이 많은 것들이 섞이면 일어나는 문제들일지도.
신관이 그들을 루미에르의 방에 데려다주고 사라진 후, 다섯 명만이 남은 방 안에서 침착함을 유지하는 건 니키뿐이었다.
평소라면 루미에르도 그녀와 같이 담담한 분위기를 연출했겠지만 그는 지금 짜증이라는 감정을 대놓고 표출 중이었으니까.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만 돌아가시죠. 딱히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도 아닌데.”
“우리는 사지를 함께한 동료가 아닙니까?”
“맞아요. 충분히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이죠!”
니키는 동료라고 불리는 멍청이들을 살폈다. 역시 아무리 봐도 한심하고 짜증 나는 것들뿐이다.
루미에르의 실종 이후, 누가 봐도 가식이긴 했지만 친절함을 두르고 있던 성녀는 본색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성녀에 의해 신전 내부에 갇혔다.
그 마을 사람들처럼 감옥에 갇힌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방 하나에 갇혀 신관들에게 감시받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희번덕하게 빛나던 성녀의 광기 어린 눈빛을 본 니키는 그녀가 자신들을 죽일 거라는 걸 단박에 파악했다.
‘전직 암살자 앞에서 살기를 드러냈는데 그걸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비웃음도 잠시, 성녀라면 굳이 그 사실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라는 계산이 섰다.
그 뒤 니키는 어떻게든 빈틈을 찾아 도망을 가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성기사들을 포함해 방을 들락날락하던 신관들은 전부 성녀의 충복들이었고 미래는 절망적이었다.
결국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니키는 오늘까지 계속 동료들과 방 안에 갇혀 있었다.
‘똥멍청이들.’
해결책을 내려 하지 않고 자기들의 감정에 매몰된 그들은 아주 귀찮고 시끄러웠다.
화를 내거나, 울거나, 처지를 비관하며 화내고 울거나. 그들이 하는 건 이 세 가지의 반복이었다.
덕분에 니키는 동료라는 이들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나름 능력은 있는지 알았는데.’
다 허접한 것들뿐이었다.
물론 그중 가장 최악은 바로 저기 있는 마법사였다.
신전의 부름에 불응해 이리저리 도망 다닌 탓에 그녀를 더 피곤하게 만들었던 장본인이자, 결국에는 잡혀 와서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고 악을 써서 사람을 더 스트레스받게 하던 사람.
그런 마법사는 여기서도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너는 항상 그딴 식이야. 역시 그때 그거 너 맞았지?”
도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쟤는 이게 마지막 기회라는 걸 까먹었나?’
여기서 루미에르에게 무언가를 얻어 내지 못하면 그들은 머지않아 성녀의 손에 처리될 것이다.
‘애당초 루미에르가 실종된 것도 따지자면 저놈 때문이잖아?’
물론 그 전에 그들의 음식에 독이 들어 있었던 게 문제이긴 했지만.
뭐가 됐든 저놈이 저렇게 화를 낼 일이 전혀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죽을 뻔한 위기에서 간신히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어 조금 흥분했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잘 판단해야 했다.
이건 기회이고, 자신들은 그 기회를 잡아야 살 수 있다는 걸.
니키는 성녀의 수족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정보를 알아오세요.’
최대한 많은 정보를, 쓸 만한 정보를 알아 오면 살려 주겠다고.
처음 명령을 받았을 때만 해도 니키는 그게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변수가 생겼다.
‘본래도 만만한 인상은 아니었지만.’
동료들은 루미에르를 다루기 쉬운 사람이라고 칭하곤 했지만, 니키는 그런 동료들의 평을 이해할 수 없었다.
‘웃고만 있으면, 군말 없이 부탁하는 바를 들어주면 그게 다루기 쉬운 사람인 건가?’
사람 같지 않은 생기 없는 웃음은 오히려 꺼림칙했고, 남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는 성미는 그저 성녀의 명령에 따른 결과물일 뿐이었다.
루미에르는 오로지 성녀의 명령으로만 움직이던 사람이었다. 습관적으로 웃고는 있지만 빛이 없는 푸른 눈은 성녀의 명령과 동료들의 부탁을 냉정하게 재단했다.
그래서 니키는 방으로 오면서 머리를 마구 굴렸었다.
‘도대체 성녀는 뭘 원하는 거지?’
성녀의 명령에 맹목적인 루미에르였다. 그러니 당연히 원하는 정보는 모두 빼냈을 텐데, 갑자기 왜 이런 명령을 하는 건가? 이건 희망 고문인가? 죽이기 전 그들을 가지고 노나?
하지만 막상 루미에르를 눈에 담고 보니, 성녀가 왜 이런 명령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루미에르는 더 이상 숨만 쉬던 인간이 아니었다. 그에게서는 숨길 수 없는 생기가 번쩍였다.
“내가 틀릴 리가 없지. 암, 그렇고말고. 그때…….”
“시끄럽습니다. 입 좀 다물어요.”
그러니까 말 잘 듣던, 허수아비는 사라진 것이다.
‘이건…….’
실종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사이 루미에르는 다정하고 친절한, 기댈 수 있는 상대를 찾은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도 자기를 버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주는 사람. 이곳에서 버려져도 자기를 받아 줄 사람이 있다는 확신이 그에게서 보였다.
성녀가 무슨 정보를 원하는지 알겠다. 루미에르에게 저런 변화를 끌어낸 이가 누군지 알아내라는 거다.
‘곤란하네.’
어떻게든 정보를 캐내야, 이쪽도 살 텐데. 지금의 루미에르에게서 그 존재의 정보를 캐내기는 요원해 보였다.
“자자, 그러지 말고 루미에르, 실종되고 난 뒤의 이야기를 좀 해 봐요.”
“맞아요. 우리를 도와주다가 문제가 생겼던 건데, 우리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잖아요?”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그걸 깨닫자 모든 게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그건 참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라면 불가능을 깨닫고도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얼른 다가가 친근한 척 말을 걸고, 살살 정보를 캐내려고 이리저리 말을 더했을 테지.
그런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제 와 느끼는 죄책감 때문인가?’
변해 버린 루미에르의, 사람 같은 저 얼굴을 보는 순간 불현듯 찾아온 미안함.
‘글쎄.’
니키는 그리 감성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 분노 때문인가?’
그들을 죽이겠다고 가둬 놓고 이제 와 정보를 구해 오면 살려 주겠다 오만하게 구는 성녀가 싫은 것이다.
늘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며 착한 척이나 하다가, 조금만 수틀리니 본색을 드러내고 같잖게 그녀를 죽이려고 하는 성녀가 원하는 바를 이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게 맞아.’
언제부터 그녀가 이렇게 윗사람의 말을 잘 들었는가?
애당초 니키가 직업을 바꾼 것도 다 그녀의 반골적인 성향 탓이 아니었던가?
‘이제 또 직업을 바꿀 때가 됐지.’
자잘하게 할 줄 아는 일이 많으니, 다른 일을 구하기 어렵지도 않을 것이다.
이곳까지 오는 길에 본능적으로 탈출로를 살핀 스스로가 기특했다. 이 대화 같지 않은 대화가 끝나고 방으로 돌아가면서 한 번 더 주변을 둘러보면 충분히 그녀 몸 하나 정도야 내뺄 수 있을 테고.
앞으로의 계획을 정하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떻게 황궁에서 나타난 거죠?”
“황녀와는 어떻게 친해진 건데요?”
“네? 루미에르, 제발 말 좀 해 봐요.”
옆에서 동료들이 시끄럽게 질문을 이어 대는 걸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니키는 시간이 가길 기다렸다.
* * *
루미에르는 어떻게든 정보를 캐내기 위해 안달이 난 이들을 무심히 바라봤다. 처음에는 갑자기 들이닥친 이들 때문에 화가 났는데, 시간이 지나자 그 감정들이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지지부진한 대화에 처음부터 딱히 기분을 숨기지 않은 마법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루미에르는 그 얼굴에서 패배감과 열등감, 그리고 수치심을 차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아득, 이를 간 마법사가 성큼성큼 루미에르에게로 다가왔다.
대충 이 마법사가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는 알겠다. 루미에르는 그의 어머니인 성녀를 잘 알았다.
‘뻔하지.’
그의 실종으로 인해 이들은 충분히 고초를 치렀을 것이다.
마법사는 본래도 스스로를 굉장히 사랑하며 본인의 능력에 자신감이 넘치는 편이었다.
자신감이 높고 자존감이 높은 건 좋은 일이었다. 다만, 그게 근거 없는 경우일 때는 스스로만이 아니라 주변까지 피곤했다.
사실 루미에르는 그런 마법사가 조금 신기했던 것 같았다. 어쩜 사람이 저렇게 자신만만한 건지, 항상 자기 자신이 제일 중요하고, 다른 그 무엇보다 스스로를 제일 사랑한다는 게 참 신기했다.
그래서 마법사의 귀찮은 행동들을 그냥 보아 넘겼다. 그는 아슬아슬하게 선을 지켰고, 어머니의 명령은 지켜지곤 했으니까.
뭐, 그 신기하다는 생각 때문에 어머니의 명령을 뒤로하고 그를 살린 것도 맞았다.
당시 스스로의 행동을 이해할 순 없지만 덕분에 제냐를 만났으니 그걸로 됐다.
“너 나랑 따로 이야기 좀 해.”
하지만 아무리 그 모든 걸 염두에 둔다고 해도, 역시 지금은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