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80)화 (80/145)

밤사이 황궁에 퍼진 소문을 전부 확인한 황제가 물었다.

“사용인들의 입단속을 명령했다지?”

소문이 거짓임을 밝히지도, 그렇다고 소문에 동조하지도 않고 입을 다물고 있으라 명령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듣는 순간 황제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설마 이 애도 용사의 일과 연관이 있는 건가?’

만약 딸이 신전과 한통속이라면…….

생각이 끝도 없이 나아가던 중, 제레미야가 피곤한 얼굴과는 달리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버지께서 어떻게 행동하실지 전해 듣지 못했으니까요. 혼자 판단하는 것보다는 아버지의 명령을 기다리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얼핏 들으면 일리 있는 소리였다. 하지만 저 이야기를 그대로 믿기에는 황제는 의심이 너무 많았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이 소문 말이다.”

제레미야의 답을 기다리며 황제는 그녀를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이용할 거리가 있다면 이용하고, 최대한 손해가 적은 쪽으로 움직여 봐야겠죠.”

정론이었다. 그러나 그런 걸 물어본 게 아니었다.

“생각해 둔 방안은?”

“글쎄요. 용사의 귀환으로 안 그래도 강하던 신전에 관심이 집중됐으니 저희 선택은 둘 중 하나겠죠.”

잘게 떨리던 목소리는 끝에 가서는 단단해졌다. 그리고 흔들림 없는 눈으로 황제를 쳐다보며 말하는 것이다.

“이대로 고개를 수그리거나.”

황제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다행히 제레미야는 거기서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매섭게 눈을 쳐들고 말했다.

“아니면 더 강하게 나가거나.”

그래, 그래야 내 딸이지.

속으로 웃음을 삼키는데, 제레미야가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소문을 전면 부정하는 건 멍청한 일입니다. 소문을 인정해야 저희가 신전에 간섭할 명분이 생기니까요.”

“…그렇지.”

황제가 만족스러움을 티 내지 않고 계속 해 보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하지만 저쪽도 이리 움직인 이상 대비를 해 뒀을 테니……. 저희도 조금 신중히 움직일 필요가 있습니다.”

말을 잇는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 것 같았다.

“또 실수를 하면 돌이킬 수 없을 테니.”

그러니까 지금 그의 판단이 잘못됐었다는 걸 지적하는 건가? 감히?

하지만 화를 내기 전 제레미야가 비틀거렸다. 그제야 황제는 딸의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파랗게 질려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래, 저리 심약한 것을.’

언제나 눈치를 보고 겁에 질려 있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자신에게 돌을 던질 리가 없었다.

황제는 간신히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선 제레미야를 바라보며 말했다.

“…피곤한가 보구나.”

“죄송합니다.”

“쯧, 돌아가 보거라.”

“감사합니다, 폐하.”

제레미야가 비틀거리며 방을 나섰다. 바깥에서 제레미야의 시녀들이 경악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어느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황제에게 그 소란은 들리지 않았다.

* * *

알현실에서 빠져나오자마자 기절했다고 했던가?

방에서 눈을 뜬 제레미야는 사용인들을 전부 내보내고는 전날 엠마의 이야기를 곱씹었다.

‘아스트리아가 살아 있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어떻게 그 애가 살아 있단 말인가?

‘아스트리아가 내 약점이라는 걸 알아낸 누군가가 수를 쓰는 거라고밖에는 볼 수가 없어.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한 이는 엠마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레미야의 편일 사람이자 그녀의 가족.

아스트리아를 직접 본 적이 있는 데다가 제레미야가 한때 그녀를, 그녀의 가족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알았다. 그리고 그녀가 죽은 뒤, 제레미야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도 알았고.

제레미야를 사랑해서 그녀의 상처를 헤집을까 봐, 혹시나 실수로라도 그 이름을 입에 담을까 전전긍긍하던 사람이 바로 엠마였다.

그러니 엠마가 아스트리아와 관련된 일을 가지고 그녀에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다.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서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시간이 길다고 해도.

“그러니까…, 정말로 살아 있다고.”

그냥 살아 돌아온 게 아니라 제레미야인 척, 황궁에 들어와 루미에르와 키스까지 했고.

“굳이 찾을 생각은 없었는데.”

아주 높은 확률로 루미에르에게 소중하다는 이는, 그리고 그를 인간으로 만들어 준 이는 아스트리아일 것이다.

물론 아스트리아 역시 루미에르가 그렇듯 그 ‘소중한 분’을 모시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레미야의 본능이 크게 외치고 있었다. 설령 아스트리아의 위에 다른 누가 있을지언정 루미에르가 진심으로 따르는 이는 아스트리아일 거라고.

‘날 보던 그 눈을 보면 모를 수가 없지.’

누군가를 덧씌운 듯 그녀를 응시하던 파란 눈. 무언가를 찾듯 그녀를 더듬던 시선까지.

왜 그 애가 황궁에 온 건지 모르겠다. 어떻게 루미에르를 만난 건지, 어째서 나인 척을 한 건지, 이제껏 어떻게 살아왔던 건지.

궁금한 게 많았지만 그중 제일 알고 싶은 건 그 애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였다.

황위 싸움에 아스트리아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아버지는 그 애가 확실히 죽은 게 맞는지 꼼꼼히 확인했다.

‘절대 살아 있으면 안 돼.’

음산하게 중얼거리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살아 있었던 거지?’

살아 있었다면 아버지가 하는 짓을 전부 봤을 텐데, 왜 가만히 있었던 걸까. 그땐 어려서 뭘 몰랐으니까?

‘웃기지도 않지. 그렇게 멍청한 애는 아니었어.’

부모님의 죽음 이후, 상태가 좀 나빠졌지만 신전에 보내질 때는 본래 모습을 거의 되찾은 뒤였다.

혹시 뭔가 나쁜 일에 휘말렸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그리고 제일 알고 싶은 건.

“지금 너는 행복하니?”

아무런 문제 없이, 억압받거나 강요받는 것이 아닌, 자기 의지로 살고 있어?

이 꼬리를 무는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을 방법을 알았다.

‘루미에르.’

어떻게든 루미에르와 따로 만나야겠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아버지를 이용해야 했다. 언제나 아버지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건 제레미야였지만 이번은 다를 것이다.

제레미야는 의욕적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기절이긴 했지만 그래도 좀 잤다고 머리가 잘 돌아갔다.

‘죄책감에서 벗어날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일지도.’

그렇게 제레미야는 근 몇 년 사이 가장 말끔한 정신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 * *

-오늘따라 늦잠이네요? 뭐, 평소에도 별로 빨리 일어나는 편은 아니지만.

타박하듯 들려오는 목소리에 입가에서 미소가 샜다. 그러자 그 미소를 발견한 듯 목소리에도 웃음기가 들어찼다.

-어린애도 아니고, 깨우기 전에 좀 일어나죠? 아침 먹어요.

지금 당장이라도 눈을 떠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조금만 더 버티고 있으면 얻게 되는 것이 있었다.

루미에르는 점점 더 가까워지는 기척을 느끼며 기대를 부풀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제냐의 손길은 닿아 오지 않았고 잔잔하게 들리던 웃음소리도 사그라들었다.

‘너무 티 나게 눈을 감고 있었나?’

손길을 받고 싶다고 자는 척하는 게 싫었을지도 모른다. 너무 어린애 같았을지도.

‘그래서 인사도 하지 않고 출근한 건가?’

제냐는 종종 놀랍도록 냉정해지는 구석이 있으니 아예 없을 만한 일도 아니었다.

“너무해…….”

서운함이 밀려왔다. 루미에르는 시무룩해져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몇 시간만 더 기다리면 점심시간이 될 테고 그럼 다시 제냐가 올 거다.

그리고 그때도 여전히 아침을 안 먹고 있었다는 걸 들키면 분명 혼이 날 테지. 얄밉다고 볼을 쭉, 잡아당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침대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고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루미에르는 고집스럽게 이불을 뒤집어쓰고 몇 시간 뒤 돌아올 제냐를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방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루미에르는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놀라게 해 줄까?’

사뿐사뿐하고 나긋나긋한, 글을 쓸 때와 엇비슷한 그녀의 발소리.

그 익숙한 소리를 떠올리며 귀를 쫑긋 세우던 루미에르는 위화감을 느꼈다.

제냐는 혼자가 아니었다.

‘어째서?’

제냐가 그와 함께 있는 방에 다른 사람을 데려올 리가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들어도 이 발소리는 한 명의 것이 아니었다.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닌 다섯 명이나 되는 발소리, 그리고…….

거기에 제냐의 발소리는 없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루미에르는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 기대하던, 익숙한 천장이 아닌 낯선 천장을 발견했다.

“아.”

그제야 루미에르는 지금 그가 제냐의 방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한참은 그녀와 함께하던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도.

루미에르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깨닫지 않는 게 더 좋았을 텐데.’

그냥 그녀를 떠올리며 상상 속에 있는 게 훨씬 나았다. 루미에르는 애써 깨달은 것들을 다시 흩어 내려 노력했다.

얼른 다시 잠이 들고 싶었다. 그래서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으면 했다.

하지만 아무리 잠이 들려고 해도, 시끄러운 발소리 때문에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거슬려.”

문을 열고 한마디 해야 할까?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침대를 벗어나면 완전히 잠에서 깰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제냐가 없는 현실을 더 적나라하게 깨닫게 될 터.

그러니 알아서 꺼져 줬으면 좋겠는데, 루미에르의 바람과 달리 인기척은 점점 더 가까워지더니 기어이 그의 방 앞에 멈춰 섰다.

루미에르가 작게 욕설을 뱉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상상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건가? 어머니의 명령만 아니라면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루미에르 님, 동료분들께서 오셨습니다.”

동료? 그게 뭔가 생각하는데,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녀님께서 회복에 도움이 되시길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명령이라는 소리다. 결국 루미에르는 손님을 돌려보낼 수 없었다.

“거지 같네.”

기어이 감정을 입 밖에 낸 루미에르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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