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긴 왜야.’
최근 그와 급격하게 가까워지긴 했지만 본래 그녀는 레라지에와는 감정적 교류가 별로 없었다. 마왕의 시녀와 마왕의 수족이라는 간단하고 명료한 관계였던 것이다.
마왕과 제냐처럼 딱 떨어지지 않는, 여러 감정이 뒤섞인 복잡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굳이 제냐가 감정을 낭비할 필요가 없는 상대였으며 상대 역시 제냐의 분노를 군말 없이 받아 줄 이는 아니었다.
아무리 레라지에가 다정하고 친근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해도, 그건 명확한 사실이었다. 분명 레라지에 또한 이를 알고 있을 터.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점을 굳이 건드리는 이유는 뭘까?
“그대와 폐하의 사이는 참 특이하지. 꽤 복잡하게 얽혀 있고.”
묘한 시선이었다. 제냐는 레라지에의 눈빛 아래 아주 옅게 자리한 적대감을 읽어 냈다.
‘아.’
아닌 척해도 마왕은 레라지에를 꽤 신임했고 그 역시 그만큼 마왕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그로서는 제 주군이 저자세로 나오는 게 달가울 리가 없는 것이다.
제냐가 약게 그녀에게 져 줄 사람을 찾아내 화를 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을 테고.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녀와 마왕 사이의 일은 레라지에가 끼어들 일이 아니었다. 제냐가 대꾸하지 않고 그를 빤히 쳐다봤다. 레라지에도 딱히 답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던 듯, 그대로 몸을 돌려 사라졌다.
그가 떠난 자리를 잠시 응시하던 제냐도 이내 터덜터덜 걸음을 옮겨 방으로 들어갔다. 감정적 소모가 너무 심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만 쉬는 게 좋지 않겠냐는 마왕의 권유에도 부득불 레라지에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고집을 피운 탓도 있었다.
제냐는 레라지에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네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따로 이야기할 생각이 없으니 가서 잠이나 자라며 그녀를 내쫓던 마왕을 떠올렸다.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지만, 그리 촉박한 것도 아니야.’
잠깐 눈을 붙인다고 해서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고,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충고는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제냐는 초조했다. 루미에르가 갇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계속 그랬다.
헤어지기 전 대화가 생각나고 입술에 닿던 감촉이 떠올랐다.
홀로 차가운 침대에 누워 있자 그의 부재가 강조됐다. 그래 봐야 고작 몇 달이었는데, 그사이 그녀 외의 다른 이의 존재가 익숙해졌다.
그래서 그 존재가 사라지자 이렇게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가는 것이다.
“선택은 빨리하는 게 좋다고…….”
제냐는 그녀의 마음을 정의 내리기가 힘들었다. 이건 죄책감일까? 외로움일까?
‘아니면 좋아하나?’
누군가 그녀에게 루미에르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제냐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애당초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바로 그를 데리러 가겠다고 마음먹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좋아한다는 감정의 방향이 이성적인 의미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것이다.
그녀가 루미에르에게 가진 애정의 시작은 그가 용사라는 것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정말 그게 전부인가?
일단 제냐는 루미에르의 얼굴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들으면 좋아하겠다.”
자기 얼굴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다며 곱게 웃던 얼굴을 떠올리자 절로 미소가 나왔다.
제냐는 그의 웃음을 좋아했고, 부드럽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도 좋아했다.
맹목적으로 그녀만을 바라보는 모습도 나쁘지 않았으며 생활력 없는 모습과 순종적인 모습은 걱정스러웠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본인의 몸을 아무렇게나 굴리는 건 조금 화가 났고 무섭기도 했다.
그래도 여러 감정 중 제일 큰 건, 그를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그게 루미에르와 같은 방향이라고 장담할 순 없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되는 건가?”
그를 좋아하고 걱정하는 건 건 확실했다. 다시 메마른 눈을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분명했고.
“그러니까 신전에서 빼내고 싶은 거잖아.”
굳이 그녀와 함께하지 않아도 그가 신전에서만은 지내지 않았으면 했다. 루미에르라면 그녀와 함께 지내고 싶어 할 테지만.
“…루미에르와 함께 지내려면 알아보는 사람이 없게 완전히 시골로 가거나 마계로 돌아가야겠지?”
자연스레 마계를 선택지에 집어넣는 스스로가 조금 우스웠다. 마왕을 용서하는 일이 없을 거라고 하면서 결국에 또 도움이 필요할 때는 당연하게 그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했다.
‘레라지에가 짜증 낼 만하네.’
물론 여전히 그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아, 모르겠다.”
루미에르에 대한 마음도 마왕에 대한 마음도.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제냐는 우선 루미에르를 무사히 빼내 오는 것 하나만을 신경 쓰기로 했다.
“나머지는 그 이후에 어떻게든 되겠지.”
눈앞에 일이 닥치면 어떤 식으로든 일은 흘러가기 마련이었다.
* * *
“폐하께서 떠나셨습니다.”
성녀, 클레어는 그녀 대신 황제를 배웅한 신관의 보고를 듣고 손을 저었다. 혼자 있겠다는 신호를 알아들은 신관들이 전부 자리를 비우자,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아들이 변했다.
순종적이고, 자기의 의견이 없던, 오로지 ‘용사’로만 존재하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사람이 된 아들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신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클레어는 루미에르를 방으로 돌려보낸 뒤, 전해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황녀의 얼굴을 한 이와 함께 있었다고.’
진짜 황녀는 이곳 신전에 있었는데, 도대체 그자는 누구일까. 여자일까? 남자일까?
그자가 루미에르를 변하게 한 존재인가? 그렇다면 그자는 지금 어디로 간 걸까?
정황상 루미에르는 그자를 지키기 위해 다시 신전에 돌아온 것이 분명해 보였다.
‘도대체 왜 그 책을 노린 거지?’
돌아가신 클레어의 아버지가 만든 책.
처음엔 황제가 꾸민 일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그 가정은 맑게 빛나던 루미에르의 눈빛을 떠올린 순간 사그라들었다.
“황제가 만들 수 없는 변화야.”
그건 몸에 새겨진 확신이었다. 그녀와 똑 닮은 황제가, 똑같이 건조한 눈빛을 가진 황녀가 루미에르에게 그런 빛을 찾아 줬을 리가 없었다.
그걸 깨닫자, 황제 역시 그녀가 그랬듯 이쪽을 의심하고 있는 게 훤히 보였다. 신전에서 무슨 속셈이 있어서 이제껏 루미에르를 숨겨 뒀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클레어는 그런 황제의 의심에 맞춰 다른 속셈이 있는 양, 당당하고 모호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래 봐야 루미에르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 이상 일시적인 방편일…….
“들키기 전에 돌려놓으면 되는 일이야.”
착한 아들이었다. 이번 일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그녀를 실망하게 한 적 없는 아들.
그러니까 이번에도 그녀가 원하는 대로 고개를 숙이고 검을 휘두를 것이다. 잘 달래서, 견고하게 성을 쌓으면 그만이다.
‘우선 그것들을 부를까?’
루미에르가 실종되었던 이유이자, 용사의 동료들이라 불리는 자들.
그녀의 착한 아들은 그들을 꽤 신경 쓰는 눈치이니, 그들이라면 루미에르가 그녀에게 숨기고 있는 것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번에야 쓸모가 있었으면 좋겠네.”
용사를 잃은 책임을 물어 폐기할 계획이었는데, 루미에르가 돌아온 덕에 다시 그 질긴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찌링-
마음을 정한 클레어가 신관을 부르는 종을 울렸다.
* * *
신전 안, 그의 공간이 아닌 곳에서 황제는 급격하게 변하는 상황들을 전해 들으며 감정을 숨기기 위해 노력했다.
황제는 고고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는 성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부글거리는 그의 속과 달리 겉모습만큼은 오롯이 축복만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용사가 돌아오다니, 기쁜 일이군.”
승리를 확신하고 있던 상황에서 돌아온 패배는 쓰라렸다. 늦은 밤 황궁으로 돌아온 황제는 자신이 살피지 못한 경우의 수가 무엇인지 심사숙고했다.
정확한 소식을 알아 오라고 제레미야를 내보낼 때만 해도 일이 이 지경으로 흘러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죽은 줄 알았던 용사가 살아 돌아오는 것까지야 뼈아프지만 그의 실책이라고 받아들일 만했다. 용사의 죽음을 확신하고 벌인 일이 자충수가 되어 버린 셈이니까.
그러나 그 뒤에 전해진 보고는 황제를 당혹스럽게 했다.
‘어째서 용사가 그런 짓을 한 거지?’
제레미야의 얼굴을 한 정체불명의 이와 친밀한 상황을 연출하다니. 황제는 그의 딸이 이용당했다는 생각보다 도대체 그 행동에 어떤 이득이 있는지가 궁금했다.
용사가 황녀와 함께하는 일에 어떤 이득이 딸려 오는 걸까? 그 뒤에 있는 계획은?
‘거기에 신전이 연관된 확률은?’
그로 인해 황실이 얻거나 잃을 건 뭐지?
‘제레미야를 신전의 지배 아래 데려다 놓겠다는 뜻인가?’
용사가 다시 돌아왔으니, 그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던 평민들은 그의 사랑을 축복하려 할 테고 결과적으로 둘의 결혼을 원하게 될 테다.
그리고 지금의 분위기라면 둘의 결혼이 진행된다면 황실은 완전히 신전에 잡아먹히는 것이다.
‘하지만 뭔가 이상해.’
그렇게 소문이 나 버렸으니 되레 용사는 황녀가 아니면 그 누구와도 결혼할 수 없을 것이다.
신전 역시 황실이 아니고서는 다른 이와 관계를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조금……, 신전에는 쓸모없는 행동이 아닌가?’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 의문은 곧장 사라졌다. 황제는 이미 한 번 계산에 실패했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의 판단을 확신할 수 없었다. 분명 그가 모르는 어떤 다른 계획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는 해가 뜨자마자 제레미야를 불러들였다.
“부르셨습니까?”
어제도 상태가 안 좋아 보였는데 오늘은 더했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듯, 제레미야의 얼굴에는 피곤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건 황제가 신경 쓸 사안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