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그렇게 아량이 넓으셨어요?”
“성질대로 다 죽이지 않고 지금껏 신전 것들을 살려 둔 것만 봐도 그렇지 않나?”
상황에 맞지 않는 비유였다. 아니, 상황에 아주 들어맞는 건가?
제냐가 미간을 좁혔다.
“더 큰 복수를 위해서잖아요. 이게 더 무서운 거거든요?”
“흠.”
마왕의 긍정에 제냐가 한숨처럼 말했다.
“여전히 용서는 없어요.”
마왕은 제냐의 말에 별다른 감흥이 없어 보였다. 당연히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것 같기도 했고, 네 감정이 어쨌든 그건 중요치 않다는 것 같기도 했다.
지금 한참 삐딱선을 타고 있는 제냐의 관점을 지워 내면 아마 답은 첫 번째일 것이다. 제냐가 짜증스레 고개를 돌리는데 마왕이 물었다.
“내가 한 말은 다 진실로 받아들일 건가?”
제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판단을 믿어 보죠.”
제냐가 꼿꼿하게 세우고 있던 몸을 소파에 기대며 물었다.
“그래서, 이제 뭘 하실 생각이신데요?”
마왕은 질문으로 답했다.
“너는 뭘 할 거지?”
그 말에 담긴 뜻을 읽은 제냐가 고개를 기울였다.
“…제가 뭘 할 거라면 도와주실 건가요?”
“그래.”
제냐가 숨도 쉬지 않고 따지듯 물었다.
“제가 폐하의 사람이라서요?”
“그래.”
마왕이 이렇게 저자세라니, 감히 미안하다는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그녀의 일에 크게 신경 쓰고 있는 게 훤히 보였다.
‘그때 공주라는 거에 놀랐던 건, 설마 이것 때문이었을까?’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어쩌면, 그랬을지도 몰랐다. 만약 그가 제냐의 배경을 전부 알았다면 그녀를 좀 더 멀리했을 수도 있었다.
‘악의를 품고 있는 게 확실한 이를 옆에 두는 건 찝찝하잖아.’
신전에 머물게 된 지 얼마 안 된 고아를 거둔 것과, 마족에 의해 가족과 나라를 전부 잃은 고아를 거둔 것은 엄연히 달랐다.
모든 건 제냐의 짐작일 뿐이고 진짜 그의 마음을 알 일은 없어 보이지만.
“제가 뻔뻔하게 굴어도 상관없으세요?”
너를 용서할 일이 없다고 말해 놓고 당신의 도움을 거절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이용해도 괜찮겠냐는 물음에도 마왕은 흔들림이 없었다.
“언제는 안 그랬다고.”
제냐가 날카롭게 답했다.
“뻔뻔하신 건 보통 폐하시죠.”
그녀가 누군지 알았으면서 결국에는 그의 사람으로 삼겠다는 건 뻔뻔함을 넘어 몰염치한 행위였다. 그 지적에 마왕은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그 태연자약한 모습에 흥분을 가라앉힌 제냐가 관자놀이를 손으로 문지르며 본론으로 돌아갔다.
일단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건.
“루미에르를 데려올 거예요.”
“그래?”
의외라는 반응이 좀 거슬렸다.
“당연하죠.”
그러자 마왕이 확인하는 것처럼 물었다.
“감당할 수 있겠나? 그쪽은 확실히 마음을 보여 준 것 같은데.”
입술을 바라보는 것 같은 시선에 제냐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 사람 마음과 이번 일은 별개예요. 거기는 사람이 있을 만한 곳이 아니잖아요?”
알지 않냐는 제냐의 눈빛에 마왕이 한숨을 쉬었다.
“뭐, 도와 달라고 하니 도와주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빨리 마음을 정하는 게 좋을걸?”
어떻게든 제냐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게 마왕다웠다.
“신전을 싫어하시는 폐하의 입장에서도 루미에르를 데려오는 게 좋지 않나요?”
신전을 무너트릴 생각이라면 어떤 식이든 신전에 소속된 용사의 존재는 방해였다. 마왕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그렇게 자기 의지로 자리를 벗어나는 게 내가 바랐던 거고.”
무기로 키운 놈이 배신이라니, 아주 재미있을 거라고 말하는 마왕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사람보고 무기라니.
제냐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되물었다.
“바랐다고요?”
“네가 용사에게 너무 의지해서, 그걸 죽이려던 걸 살리는 방향으로 틀었지.”
“자발적 이탈로요?”
“그래, 그래서 네 방 테라스에 놔둔 거고.”
그것참, 대단한 계획이었다. 한껏 빈정거리고 싶은 걸 참아 내며 제냐가 따지듯 물었다.
“그런데요?”
“말했잖아. 그놈 마음에 안 든다고.”
고집을 피우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그때 그 대화의 연장선인 걸까?
“용사여서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었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그래.”
정말 어이가 없었다.
“방금 또 말씀하신 대로 방에 데려다 둔 건 폐하신데요.”
제냐의 지적에도 마왕은 당당했다.
“성격이 그따위일 줄은 몰랐어.”
쯧, 혀를 찬 마왕이 제냐를 쳐다보며 말을 덧붙였다.
“네 성력에 집착할 줄은 알았지만 널 좋아한다고 덤빌 줄도 몰랐고.”
하, 이번에야말로 커다랗게 코웃음을 친 제냐가 물었다.
“정말요?”
“…….”
루미에르가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모르지 않으면서, 제냐가 가진 힘을 알면서, 제냐가 용사에게 가진 호감을 알았으면서.
지금 상황은 확실히 예정된 미래는 아니지만 충분히 예견 가능한 미래였다. 마왕이 꾹 입을 다물었다.
그래,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높은 확률로 두 사람이 서로에게 마음을 주고 말 거라는 걸.
제냐는 시선을 피하는 마왕과 억지로 눈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 대신 화제를 돌려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데요?”
“천계의 보석을 훔칠 거야.”
“어디 있는 줄은 아시고요? 이제껏 못 찾으셨잖아요.”
“용사가 죽은 줄 알았을 테니 필요했을 거다. 그러니 지금 그건 본신전에 있겠지.”
그 말은…….
“천계의 보석에 특별한 힘이라도 있나 보죠?”
마왕의 시선이 노을이 지는 하늘로 향했다. 마계의 하늘과는 다른 조금 더 따뜻한 느낌이 나는 하늘을 보며 마왕이 말했다.
“성녀가 성녀 행세를 하기 위해서 필요한 물건이자, 동시에 이제껏 신전이 당당하게 굴 수 있었던 이유지.”
그리 말하는 마왕의 얼굴은 잔뜩 비틀려 있었다.
* * *
레라지에는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 되어서야 저택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제냐와 마왕이 함께 방에 있는 걸 보고 놀란 표정을 했던 그는 기민하게 둘의 분위기를 살피다가 활짝 웃었다.
“너무 빨리 온 건가 걱정했는데, 다행입니다.”
보아하니, 이쪽 분위기가 별로일까 봐 밖에서 시간을 더 보내고 온 듯했다. 마왕에게 생글생글 웃어 보인 레라지에가 제냐를 돌아봤다.
“제국 이야기를 들으려고 지금까지 기다린 거겠지?”
제냐가 고개를 끄덕이자 레라지에가 침음을 뱉었다.
“흠. 정황상으로는 황제가 그대의 왕국에서 일어난 일과 연관된 것은 맞아. 하지만 직접적인 증거를 찾을 수는 없네. 그것도 이렇게 단시간에.”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꼼꼼하고 치밀한 사람이니까.
‘그래도 제대로 된 증거가 하나쯤 있으면 좋을 텐데.’
막막함에 한숨을 내쉬는데 마왕이 가벼운 태도로 끼어들었다.
“함께 작당 모의한 게 분명한 자를 만나러 갈 테니 문제없지 않나?”
성녀에게 물으면 된다는 소리였다. 제냐가 어이없다는 듯 마왕을 바라봤다. 그건 일이 잘 해결됐을 때의 이야기가 아닌가?
“정말로 본신전으로 가시겠다는 소리세요?”
“그래.”
“폐하가 강한 건 알겠는데요. 본신전에 성력 소유자가 얼마나 많은지는 아세요?”
마왕도 레라지에도 약한 마족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성력은 마족들에게 너무나 큰 무기였다.
마왕이 무어라 말을 꺼내려는 듯 입을 여는데, 레라지에가 끼어들었다.
“아, 계획대로 본신전에 가는 겁니까? 거기에 아스도 있을 텐데.”
그 말에 제냐가 홱 고개를 돌려 레라지에를 쳐다봤다.
“…그래요?”
“곧장 신전으로 갔다는군.”
루미에르가 신전에 갔을 거라는 건 이미 짐작하고 있던 부분이긴 했지만 레라지에의 확인을 받으니 새삼스레 걱정됐다.
입 안의 살을 깨무는데, 레라지에가 또 제냐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말을 했다.
“보아하니, 성녀의 명령 때문에 성기사들의 감시 아래 방에 감금된 것 같던데.”
감금이라니?
제냐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짜요?”
“그래.”
제냐가 의심 가득한 눈으로 레라지에를 쳐다봤다. 마족이면서 어떻게 신전 사정에 이렇게도 밝단 말인가?
“누구에게 들으셨는데요?”
“신관에게.”
“…신관에게요?”
지금 신관이 마족에게 정보를 유출했다는 거야? 제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쳐다보는데 레라지에가 돌연 우수에 찬 미소를 지으며 턱을 문질렀다.
“아름다운 외모는 어디서든 통하는 법이지.”
스스로의 외모에 감탄하듯 탄성을 터트린 레라지에가 보란 듯 긴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방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대단하시네요.”
황당하다는 걸 숨기지 못하고 뚝뚝 끊어지는 제냐의 목소리 사이로, 부끄럽지도 않은지 뿌듯해하는 레라지에의 웃음이 울려 퍼졌다.
레라지에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딱딱하게 굳었던 분위기가 풀렸고 제냐는 긴장이 풀린 채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야기가 마무리되자마자 레라지에는 자연스레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줬다. 방 앞에 멈춰서 그를 쳐다보자 레라지에가 다정하게 물었다.
“묻고 싶은 게 있나?”
역시 눈치가 빨랐다. 제냐가 괜히 부정하지 않고 바로 질문을 던졌다.
“그래논 백작은 무사히 돌아갔나요?”
굉장히 늦은 안부 확인이었다. 급한 일이 전부 지나가고 난 후에야 이런 질문을 던지다니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다행히 돌아온 답은 긍정적이었다.
“돌아오기 전 다시 한번 확인해 보니 무사히 저택에 돌아갔더군.”
더 이상 죄책감이 늘어날 일은 없어 보였다.
“…감사해요.”
제냐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방에 들어가려는데 이번에는 레라지에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제냐, 그대는 내게는 화를 내지 않는군.”
“네?”
“폐하께는 여전히 화가 난 것 같은데 내게는 그러지 않아.”
“그야…….”
당신은 이 일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이것을 입 밖으로 내기가 어려웠다.
제냐가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는데 레라지에가 말을 더했다.
“아까도 느꼈겠지만 폐하의 계획을 알고 있었고 그 일을 묵과한 건 나도 마찬가진데.”
그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상할 정도로 그에게는 화가 나질 않았다.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