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 없는 태도에도 화가 나진 않았다. 그러나 레라지에의 페이스대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건 싫었다.
그래서 제냐는 무심하게 말을 더했다.
“그러니까 지금 제 상황에 말이죠.”
한심하다는 듯 레라지에를 쳐다보던 마왕이 다시 그녀를 쳐다봤다.
“그래, 그럼 어느 부분이 제일 믿기지 않지?”
마왕이 한 말 중 딱히 믿기지 않는 부분은 없었다. 이야기하는 동안 마왕의 말투나 표정에 거짓은 없어 보였으니까.
그는 최대한 담담하게, 감정을 빼고 이야기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말을 전부 믿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마왕이니까.
그래, 10년간 제냐가 보고 듣고 함께해 온 경험과 지식, 그리고 감을 바탕으로 했을 때 그녀는 마왕의 말이 진실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단 하나, 그가 마왕이라는 점 하나 때문에 제냐는 그를 믿지 못했다.
‘…고집이고, 아집이지.’
이성적으로,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제냐는 그의 말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마왕도 피해자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믿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제냐는 그가 완전무결한 악당으로 남길 바랐다.
‘그래야 계속해서 당신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테니까.’
이제껏 흔들리던 마음을 부여잡을 수 있었던 기반에는 마왕이 보여 준 강력함과 그가 행한 악행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다른 사람의 잘못까지 뒤집어쓴 거라면…….
정말 와장창 깨져 나가다 못해 오물에 빠지고 있는 신전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흘려보내며 제냐가 마왕을 쳐다봤다.
그리고 제일 확인하고 싶은 부분을 언급했다.
“아비에 왕국을 침범한 건, 마족이 맞나요?”
스스로도 무슨 답을 원하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그녀를 쳐다보는 마왕이 거짓말을 할 것 같진 않았다.
그리고 돌아온 말은,
“그건 마족이 맞아.”
긍정이었다.
깜빡.
놀랍지도, 슬프지도, 배신감이 들지도 않았다.
깜빡.
이걸 좋아해야 하는지, 싫어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고.
깜빡.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녀의 분노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좋아해야겠지만, 결국 눈앞에 있는 이가 그녀의 원수라는 건 변하지 않는 진실이었다.
깜빡.
아무리 눈을 감았다 떠도 눈이 건조했다.
‘눈물이라도 터질 줄 알았는데.’
제냐가 그렇게 한참을 마왕을 쳐다보고 있는데, 있는지 없는지도 까먹었던 레라지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그건 폐하와 적대 관계에 있던 고위 귀족 측에서 손을 쓴 거라네.”
제냐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그녀의 무기력한 얼굴을 바라본 레라지에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대도 눈치채고 있겠지만 폐하의 세력과 반대되는 세력이 몇 있다네.”
그래, 마왕과 함께 있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되는 사실이었다. 지금은 마왕의 세력이 압도적으로 크지만 불과 십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들이 자잘하게 분란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고.
레라지에의 말에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지식을 떠올리던 제냐가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게 아니라 마왕과 대화를 해야 하는데.’
하지만 제냐가 말을 끊거나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기 전 레라지에가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물건을 하나 찾고 계시는데, 그게 아비에 왕국에 있다는 소문이 돌았어.”
아비에 왕국.
“폐하께서 그 물건에 관심이 있는 걸 아는 귀족들이 폐하보다 먼저 그걸 손에 넣으려고…….”
귓가에 레라지에의 목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려 퍼져 머리가 아파 왔다. 미간을 좁히는데 마왕이 레라지에의 말을 잘라 냈다.
“레라지에.”
마왕이 왜 그러는지 안다는 것처럼 레라지에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싫어할 땐 싫어하더라도 제대로 아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정확한 진실을 알고 싶을 거라는 말에 제냐가 두통을 뒤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이 못마땅한 얼굴로 입을 다물자 레라지에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신전 측에서 흘린 정보였으니 폐하께서는 믿을 리가 없었지. 그런데 문제는 우리 군대 사이에 쥐새끼가 숨어 있었다는 거야. 군단 하나 정도는 움직일 수 있는.”
그때 다시 한번 마왕이 끼어들었다.
“저건 중요하지 않아. 마족들이 움직인 게…….”
하지만 레라지에가 답지 않게 그런 마왕의 말을 무시했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마족들은 전부 처형당했어. 폐하께.”
레라지에는 서늘한 마왕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다가 제냐를 돌아봤다.
“물론 인간들을 죽였다는 죄목은 아니고, 감히 폐하가 아닌 다른 이를 섬겼기 때문이지만.”
그리고 그 문장을 마지막으로 입을 다물었다.
‘솔직하네.’
마지막에 더해진 저 말 때문에 더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레라지에가 더 이상 끼어들지 않겠다는 듯 등받이에 허리를 대며 뒤로 빠졌다. 그러자 긴 한숨을 쉰 마왕이 다시 말을 시작했다.
“쥐새끼가 있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증거를 잡아 처리하기 위해서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이지.”
그리고 이것도.
“그들이 뭐든 할 거라는 건 알았어. 일부러 방치한 거야.”
그간 제냐가 지켜본 마왕이 할 법한 행동이었다.
“직접적으로 명령을 내리진 않았지만, 통제하지 않은 건 사실이라는 거다. 인간 한둘쯤 죽어도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어.”
레라지에도 그렇고 마왕도 그렇고 오늘은 정말 모든 걸 가감 없이 이야기해 줄 생각인 것 같았다.
“찾고 있다는 게 뭐죠?”
차분한 제냐의 얼굴을 살피며 마왕이 답했다.
“‘천계의 보석’, 다른 말로는 ‘천계의 눈’이라고 불리는 물건을 찾고 있다.”
마왕의 얼굴에 냉기가 맴돌았다.
“신전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보물이지.”
예리하게 빛나는 붉은 눈이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그들의 오만함을 부추겼다. 마족들이 신전을 경계하고 꺼린다는 인상을 줬지.”
마족의 습격에서 신전만은 무사할 거라던 사람들과 신전의 믿음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신전’만을 제외한 신전과 관련된 모든 걸 전부 찾아내 없앰으로써 그들의 믿음은 점점 더 견고해져 갔지.”
“그러니까 신전은 어떤 소문을 흘려야 마족들이 움직이는지 알았군요?”
“그래, 대놓고 보여 줬으니까 눈치 못 챘으면 모자란 거였지.”
제냐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런데 신전에서 아비에 왕국에 그런 물건이 있다고 흘렸다고요?”
마왕이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논 백작의 말이 아니라도, 제냐가 금붕어 똥처럼 신전과 항상 엮인 세력을 떠올리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 일에 제국도 연관되어 있나요?”
“그것까진 찾아보지 않았는데.”
확신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묘한 그 표정을 보니 마왕과 제냐의 생각은 일치하는 모양이었다.
‘아마 제국도 그 일과 연관되어 있겠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가족인데, 왜 동생이 왕비로 있는 나라를 그렇게……. 제냐가 그 의문을 그대로 드러냈다.
“왜 그랬을까요?”
마왕이 덤덤하게 답했다.
“내가 그랬듯, 더 중요한 게 있었겠지.”
황제에게 더 중요했던 건, 황위일 것이다.
허탈했다. 그게 뭐라고 그런 짓을 했을까? 엄청나게 친하진 않아도 나쁘지 않은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제냐를 고아원에 보내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최악의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 황제가 그런 게 맞을까요?”
제냐의 얼굴을 살피던 마왕이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아니면 어쩔 거고, 맞으면 어쩔 거냐.”
제냐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하긴 어느 쪽이든 달라질 건 없죠.”
제국과 신전이 벌인 짓은 마왕과 제냐 사이에 있었던 일과는 별개였다.
제냐가 날카롭게 마왕을 쳐다보는데 레라지에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 그럼 제가 제국과 관련된 걸 찾아보고 오겠습니다. 겸사겸사 돌아가는 상황도 좀 파악하고.”
드디어 눈치라는 게 생겼나? 아니, 눈치가 너무 좋아서 이제껏 적절하게 치고 빠진 걸 테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빠져 줘야 한다고 판단한 것일 테고.
흠흠, 작게 헛기침을 한 레라지에가 마법을 쓸 생각도 하지 못한 듯 허겁지겁 방을 뛰어나갔다.
문이 닫히고 둘만 남은 방의 침묵이 깨진 건 제냐의 물음 때문이었다.
“왜 솔직하게 다 말하신 거예요? 그냥 적대 세력이 했다는 말 한마디로만 끝낼 수 있었잖아요.”
“…….”
제냐는 답이 없는 마왕을 닦달하듯 재차 질문을 던졌다.
“선택지를 드려야 할까요?”
그녀가 손을 꼽았다.
“첫째, 단순하게 거짓말을 못해서.”
무슨 답을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답은 듣고 싶었다.
“둘째, 고작 인간 따위가 무섭진 않으니까.”
둘 중 정하라는 듯 마왕을 쳐다보자 그가 담백하게 답했다.
“셋째,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제냐가 입 안의 혀를 깨물었다.
“왜 거짓말이 하고 싶지 않으신데요?”
그러자 마왕이, 함께 집무실에서 일하던 때와 같은 얼굴로, 제냐가 확인차 질문을 던지면 늘 하던 대로 빈정거렸다.
“똑똑한 머리가 잘 안 굴러가는 건가, 아니면 외면하고 싶은 건가?”
정말이지, 왜 자신은 이리도 단단하지 못할까. 왜 이렇게 감정적이고, 정을 주지 않아야 하는 이에게 마음을 주는 걸까.
“네가 내 사람이니까.”
왜 이 말에 차갑던 손끝에 온기가 도는 걸까.
스스로가 미웠고 모자람을 티 내고 싶지 않았다.
“하.”
이미 마음을 열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마음을 읽은 것처럼 그가 말했다.
“내가 네 주인이 아닌 건 안다.”
저런 눈으로 쳐다보고 있으면서, 참 대단한 배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