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냐는 잘했다고 할 거야.’
딱 봐도 저 여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 루미에르를 질책하기는커녕 재밌다고 웃어 줄지도 몰랐다.
뻔뻔한 생각을 잘도 하면서 루미에르는 몸을 돌렸다. 해야 할 말은 다 했으니 더 시간을 끌 생각은 없었다.
제레미야는 루미에르를 붙잡지 않았다. 더 얻을 이야기가 없다는 걸 알았을 테고 그가 한 이야기에 머리가 복잡할 테다.
‘제냐가 생각나서 그런가.’
불필요한 생각을 너무 많이 하고 있었다. 성기사들이 돌아온 루미에르를 재촉했다.
“루미에르 님! 도대체…….”
“그만 가죠.”
루미에르는 그들이 보내는 끈덕진 시선을 무시했다. 하지만 방에 도착할 때까지 그들의 질문은 그치지 않았다.
귀 옆에서 떠나지 않는 목소리가 거슬렸고, 저 입을 다물게 하고 싶었다.
‘부서트리면 좀 닥칠까?’
루미에르의 건조한 시선이 성기사들에게 닿았다. 턱을 바라보는 푸른 눈이 시커멓게 가라앉았다.
“아까 황녀 전하와는 무슨 대화를 하신 겁니까?”
“성녀님께서 황실과의 접촉을 삼가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성급한 짓이었습니다. 분명 성녀님께서도 질책하실 겁니다.”
“루미에르 님, 제발 답 좀 해 주세요!”
답이 없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그에게 달라붙던 성기사가 루미에르의 시선을 눈치챈 것도 그때였다. 다급하게 질문을 던지던 이들이 그가 내뿜는 사나운 기세에 움찔 몸을 떨며 자리에 멈춰 섰다.
하아.
루미에르는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 눈도 깜빡이지 못하는 성기사들을 남겨 둔 채, 문을 닫았다.
바깥에는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드디어 홀로 남게 된 루미에르는 억지로 올리고 있던 입꼬리를 내렸다.
‘피곤하네.’
지독하게 무표정한 얼굴을 한 루미에르는 의자에 앉지도 그렇다고 침대에 눕지도 않고 가만히 방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커다란 계획은 세워 뒀다.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그녀에게 돌아갈 수 있을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이렇게 자잘한 시간에는 도대체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루미에르는 혼자 남자마자 그의 머리를 가득 채우는 제냐 때문에 비틀거리며 침대로 다가갔다. 지독한 그리움에 괴로웠지만 동시에 그녀를 떠올리자 행복했다.
‘보고 싶어.’
루미에르는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푹신하고 좋은 침대가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의 향기가 나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닿지 않았다. 루미에르는 뜨고 있던 눈을 감았다.
사락, 사락. 책을 넘기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자연스레 그에게 말을 걸어오던 목소리도.
“누워만 있는 건 좀 그렇지 않아요? 책이라도 읽을래요?”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으면 늘 그녀가 하던 말이었다.
“원래는 이렇게 시간 보내진 않았을 것 아니에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루미에르는 언제나 바쁘게 이용당했고, 늘 다른 이들의 명령에 움직이곤 했다.
하지만 그랬기에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그 지루한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멍하니, 그녀의 공간에 누워 그녀만을 생각하며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좋았다. 그러니까 지금도 최대한 그때와 똑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루미에르는 기억 속 그녀의 방을 떠올리며 앞으로 홀로 보내게 될 영겁 같은 시간을 연습하기로 했다.
* * *
정보를 캐내기 위해 신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제레미야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들었다.
“루미에르 님이 살아 계신다고?”
“그렇다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야, 신전에 도착하신 그분을 본 이가 몇인데? 그리고 더 충격적인 게 뭔지 알아?”
하지만 그 소식에 놀랄 틈도 없이 경악할 만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황궁에서 약혼녀이신 황녀 전하와 키스하셨대.”
“…뭐? 루미에르 님이?”
“그것도 벌써 소문 다 퍼졌던데? 황궁에서 루미에르 님을 발견하셨던 신관분도 인정하셨대.”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하지만 마냥 이들이 잘못 들은 이야기라고 우기기에는 주변이 굉장히 소란스러웠다.
“그런데 황녀 전하는 언제 돌아가셨대?”
“글쎄. 하지만 기도는 끝난 지 꽤 됐으니까.”
“몸 상태가 안 좋으신 것 같던데, 일찍 돌아가셨나?”
이야기를 듣던 제레미야는 본능적으로 다가오는 발걸음을 피해 몸을 숨겼다. 그렇게 사람들의 눈을 피해 정신없이 걸어가던 제레미야의 귀에 또다시 루미에르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성녀님과 대화가 끝나셨다는데? 방으로 가신다고.”
제레미야는 더 발을 빨리 놀렸다.
뛰듯 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숨이 가빠질 때쯤 드디어 성기사들을 달고 이동 중인 루미에르를 발견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아주 쉽게 그와의 독대를 만들어 냈고, 믿을 수 없는 제안을 받았다.
‘나를 도와주겠다고?’
어째서? 그리고 왜 그게 거짓말 같지 않은 거지?
‘그야, 눈빛이 살아났잖아.’
실종된 사이 무슨 일을 겪었기에 그렇게 변한 걸까? 그, 소중하다던 사람 때문인가?
그녀의 얼굴을 하고 있었던 사람인 척해 달라던 루미에르.
높으신 분들이 그게 제레미야가 아니라는 걸 알아도 상관없다고 했다. 그냥 사용인들의 오해만 그대로 놔두면 된다고.
‘얼굴을 가리고 궁으로 돌아가야겠네.’
딱히 어렵지 않은 일 한 번으로 용사의 도움 한 번을 얻어 낼 수 있다는 건 큰 이득이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사람들과 마주치는 걸 피한 건 참 잘한 일이었고.
도대체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변한 건지 모르겠지만. 제레미야는 그저 그녀에게 이득이 가는 일만을 하기로 했다.
다시 황제에게로 돌아간 제레미야는 그의 수족에게 어머니와 함께 먼저 궁으로 돌아가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신녀님과 독대 중이신가?”
“네, 황녀 전하.”
“알겠네.”
평소라면 아버지가 무슨 대화를 하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얼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눈앞의 사람도, 주변 신관들도 루미에르와 관련된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지 그녀를 쳐다보는 시선이 묘했다.
제레미야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다는 핑계를 대며 로브를 뒤집어쓰고 어머니의 마차를 타고 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신전으로 갔던 사용인들의 입단속을 단단히 했다. 신전에 데려간 사용인들은 전부 충성심이 강한 이들이고 눈치가 좋은 이들이니 쉽게 입을 놀리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정말로…….”
“…어쩜!”
그녀를 발견한 사용인들이 수군대는 걸 보아하니 정말 대놓고 입을 맞춘 모양이었다.
‘정말 누구일까?’
상대에 대한 궁금증이 고개를 들었다. 어떤 사람이기에 그 시체 같던 이를 그렇게 변하게 한 걸까?
정체를 캐내서 만약 그자를 붙잡는다면…….
제레미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생기를 불어넣어 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약점으로 붙잡는다면 용사를 적으로 돌리게 될 테다.
사용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제레미야는 방에 도착하자마자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안 그래도 몸 상태가 별로였는데, 급하게 움직이다 보니 체력이 완전히 바닥났다. 제레미야는 가볍게 몸을 씻은 뒤 사용인들을 완전히 물렸다.
‘내일쯤이면 아버지도 나를 부르시겠지.’
지금 당장은 성녀와 이야기하느라 바쁘시겠지만 내일이 되면 루미에르와 관련된 소문으로 분명 그녀를 부를 것이다.
아버지와 마주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팠다. 침대에 누워 몸을 동그랗게 웅크리는데, 적막을 깨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제레미야가 미간을 좁히며 날카롭게 말했다.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했어.”
그러나 상대는 제레미야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설마 벌써 아버지가 돌아오신 건가 상체를 급하게 일으키는데, 방으로 들어선 건 아버지의 사람이 아니었다.
“황녀 전하.”
“…엠마?”
예전보다 조금 나이가 든 온화한 얼굴의 유모가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죄송해요, 전하. 하지만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레미야는 문을 닫고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엠마를 멍하니 바라봤다.
어머니보다 어머니 같은 사람. 하지만 궁에 들어오고 나서는 멀리서밖에 볼 수 없었던 사람.
오랜만에 만나는 엠마에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뭐라 반응할 틈도 없이 엠마가 충격적인 말을 꺼냈다.
“전하, 아스트리아 공주님을 만났습니다.”
* * *
제냐는 긴 이야기 끝에 입을 다문 마왕에게서 고개를 돌려 레라지에를 쳐다봤다. 하나 확인하고 싶은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은 레라지에가 전문가였다.
“그러니까, 성녀라고 불리던 클레어라는 여자와 폐하가 연인 관계였다는 것 같죠?”
마왕은 직접적으로 둘이 무슨 사이인지 말하진 않았다. 하지만 분위기나 어조, 그리고 당시 상황을 종합해 보면 하나의 답이 나왔다.
‘사귀었던 거지 뭐. 아주 깊게.’
남의 연애에 진심인 레라지에에게 확인을 받으면 더 확실할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두 손을 모으고 한껏 집중해 마왕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던 레라지에가 눈을 반짝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레라지에와 제냐가 눈을 부딪치고 고개를 끄덕이자 마왕이 급격하게 피곤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지금 제일 중요한 게 그건가?”
설마, 제냐가 무심한 얼굴로 마왕을 돌아보며 답했다.
“그건 아닌데요.”
“그런데?”
“폐하가 하신 말씀 중 가장 믿을 만하고 동시에 가장 중요하지 않은 게 그 부분인 거죠.”
마왕이 성녀와 연인 사이라는 건 정말 제냐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아닌가?
분위기가 다시 낮게 가라앉으려고 하는데, 옆에서 눈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게는 그게 제일 중요합니다!”
매우 당연하게도 그 말의 주인은 레라지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