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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75)화 (7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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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에르 님, 이쪽으로 가시죠.”

루미에르는 공손한 척 강압적으로 그에게 길을 안내하는 성기사 무리를 따라 이동했다.

열댓 명의 성기사들이 루미에르를 에워싸고 있었는데 안내를 위한 인원치고는 너무 많았다. 신전 안 지리를 모르지 않는 루미에르에게 안내를 핑계로 사람을 붙인 것부터가 속셈이 뻔했지만.

“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루미에르는 언제나 그렇듯 그림 같은 미소를 지었다.

예전처럼 휘둘리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고 해서 마냥 어머니를 적대할 수는 없었다. 신전에 머무르기로 한 이상 어느 정도는 맞춰 줘야 했다.

루미에르는 진실을 적당히 섞어 가며 그녀가 궁금해할 것을 알아서 이야기했다.

“마나 폭주에 휘말렸다가 깨어나 보니 처음 보는 곳이었습니다. 일어나 보니 시간이 많이 지나 있더군요.”

조용히 경청하던 여인은 고생했다는 말과 함께 한동안은 푹 쉬라며 축객령을 내렸다. 물론 말이 그렇단 거지 사실상 감금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루미에르가 이제까지처럼 순종적인 아들이었다면 어머니는 망설임 없이 곧바로 용사가 생환했음을 알리고 그를 대중에게 공개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나타난 용사는 변했다.

‘불안하겠지.’

마냥 옆에 두기도, 그렇다고 처리할 수도 없다. 더군다나 황궁 한복판에서 화려하게 등장했으니, 비밀로 할 수도 없는 노릇.

‘그러니 어머니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어린 루미에르에게 했던 대로 사상을 정비하고 세뇌를 이어 가는 것 정도.

그러나 루미에르는 더 이상 관심에 고픈 어린애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관심을 청하는 대상은 어머니와 신전 고위층이 아니었다.

다정하고 무심한 나의 제냐.

그녀의 곁으로 돌아가야 한다.

루미에르는 조금 전부터 느껴지던 인기척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방으로 향하던 그들에게 우연을 가장해 다가오던 이가 시선이 부딪치자 반색을 했다.

“루미에르 님!”

‘루미에르.’

오늘 그와 함께 있었던, 지금도 미치도록 보고 싶은 여인의 목소리가 덧씌워졌다.

“황녀 전하.”

역시 제냐가 틀렸다. 닮다니, 황녀는 제냐와 너무 달랐다.

제냐와 비슷한 점을 찾아 샅샅이 그 얼굴을 살피던 것이 실망스러울 정도로 여자는 너무나도 평범했다.

이목구비는 얼추 비슷했다. 하지만 그 외에 모든 것이 달랐다. 그를 쳐다보는 눈빛도, 그를 부르는 목소리도, 전부 다.

루미에르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않는 무채색의 여인을 빤히 바라봤다.

“사, 살아 있었군요?”

제레미야가 놀란 척 비틀거리며 그에게 다가왔다. 황녀가 직접 움직인 것을 보면, 황제 역시 루미에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들은 모양이었다.

하긴, 신전과 황실이 물밑에서 치고 박는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보니 ‘어디서 일이 났다’ 하면 소문이 발 빠르게 퍼지곤 했다.

‘뭐라도 캐내고 싶은 거겠지.’

약혼자가 살아 있다는 것에 크게 감격했다는 듯 손을 떤 여인이 바로 그의 앞에 멈춰 섰다.

“…꿈은 아니겠죠?”

평소라면 황녀의 속내를 눈치채지 못했을 거다. 아니, 관심을 주지도 않았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도.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루미에르가 장단을 맞추듯 옅은 미소를 띠었다.

“꿈일 리가요.”

예상치 못한 반응인지, 눈매를 움찔 떤 제레미야가 금방 표정을 갈무리했다.

“잠시, 잠시만 저와 이야기를 나눠 주시겠어요?”

그러면서 그의 뒤에 있는 성기사를 부끄럽다는 듯 쳐다봤다. 단둘이 이야기하자는 뜻을 알아차린 성기사들이 곤란한 낯을 했다.

“죄송하지만, 황녀 전하. 루미에르 님께서는 부상에서 회복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하지만 성기사들에겐 안타깝게도 루미에르 역시 황녀에게 볼일이 있었다.

“아니요, 걱정하셨을 텐데 당연히 시간을 내어 드려야죠.”

뒤통수에 성기사들의 시선이 닿았다. 하지만 루미에르는 그 시선을 느끼지 못한 척 제레미야를 데리고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다.

거리가 벌어지자마자 제레미야가 부러 높였던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경계를 드러냈다.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 주실 줄은 몰랐는데요.”

다만 대화가 들리지 않아도 얼굴은 식별 가능한 거리였기에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탐색하는 눈빛은 거슬렸으나 가식적인 목소리가 아닌 낮은 목소리는 제냐의 것과 조금 비슷하게 들렸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말투가 조금 더 온화해졌다.

“하실 말씀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기민하게 그 변화를 눈치챈 제레미야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뭔가 변하신 것 같네요.”

루미에르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가요?”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에 입술을 깨물던 제레미야가 입을 열었다.

“모습을 드러내신 곳이 황궁이라고 들었어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황궁엔 왜 오셨던 건가요?”

그녀는 평소처럼 돌려 말하지 않고 꽤 직설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눈치가 빠르네.’

조금 물러진 그의 태도를 단박에 눈치챈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제냐를 떠올리게 한다고 해도 진짜도 아닌 이에게 그 이상의 호의는 없었다.

“잠시 볼일이 있어서요.”

대답해 줄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제레미야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그 볼일이라는 게 황궁에 나타난 침입자와 관련되어 있나요?”

“그런 셈이죠.”

그것까지 부정하진 않았다. 그 문제로 제레미야의 협조가 필요한 것이었으니까.

“…그 지하에요?”

“네, 확인할 게 있어서요.”

망설이는 것 같던 제레미야가 조금 강한 어조로 말했다.

“저와 함께 있으셨다는데요.”

그걸 이미 전해 들었다면 이야기는 더욱 빨라졌다.

“네, 저는 황녀 전하와 함께 있었습니다.”

루미에르가 이렇게 쉽게 인정할지 몰랐는지 제레미야는 표정을 하나도 숨기지 못했다. 동그랗게 커진 눈이 잘게 떨리는 것도 같았다.

그 표정을 보면서도 루미에르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알려졌으면 하고요.”

혼란스러워하는 제레미야를 보며 루미에르가 물었다.

“그리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 질문에 요동치던 눈빛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계산적인, 그녀의 이득을 가늠해 보는 시선이었다.

제레미야가 떠보듯 물었다.

“그런다고 입이 다 막아지진 않을 텐데요. 알 사람은 다 아는데.”

“입을 막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네?”

“제가 원하는 건 다른 겁니다.”

루미에르가 생긋 웃으며 속삭였다.

“그저 거짓이 퍼지도록 두시면 됩니다.”

아랫사람들의 오해를 부정하지 않으면 그걸로 족하다는 루미에르에의 말에 제레미야가 혼란스러워했다.

“그게 무슨…….”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다들 우리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을 테니까요.”

살아 돌아온 용사와 그 약혼녀의 사랑 이야기에 사람들은 큰 흥미를 가질 것이다. 그러니 황녀는 크게 힘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어째서 그런 소문을 내려 하시죠?”

“최대한 그분에 대한 소문이 덜 나면 좋겠어요.”

어머니는 지금 루미에르가 보이는 이상 행동들이 황실과 연관 있는 게 아닌가 의심 중이었다. 황제 역시 루미에르의 생환이 신전이 무슨 술수를 부린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을 테고.

그러니 두 권력자가 자기들끼리 견제하기 바쁜 사이, 사람들이 루미에르와 황녀에 대해 소문을 내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제냐는 무사히 안전한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또 제냐를 생각하면서 표정이 풀렸던 걸까? 제레미야가 묘한 얼굴로 루미에르를 쳐다봤다.

“소중하신 분인가 보죠.”

루미에르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황녀에게 그녀가 조금쯤 우위에 있다는 느낌을 주는 건 이번 거래에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루미에르는 감히 제냐에 대한 그의 감정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그 선선한 긍정이 제레미야에게는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은 듯했다.

“제게 이야기해 주셔도 되는 부분인가요? 혹시 신전에서…….”

그녀는 이 모든 게 신전의 어떤 계획이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제레미야가 떨어져 있는 성기사들을 힐끗 쳐다봤다.

‘귀찮게.’

루미에르가 그녀에게 한 발 다가가며 그 시선을 끊어 냈다.

“신전이 아닌 제 개인적인 일입니다.”

“…….”

“굳이 다른 분께 이야기하진 않으시겠죠. 한 가지쯤 혼자만의 패도 필요하실 텐데.”

황제에게 무작정 휘둘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정말 최후의 상황에는 너도 비장의 수 하나쯤은 가지고 있으면 좋지 않겠냐는 말이었다. 뜻하는 바를 알아들은 제레미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말은…….”

루미에르는 의심의 기색을 지우지 못하면서도 그의 제안을 단박에 거절하지 못하는 제레미야를 보며 사르르 눈꼬리를 접었다.

“힘이 닿는 곳에서 한 번은 도와드리죠.”

황제에게 순종하는 황녀였지만, 그녀 역시 루미에르가 그렇듯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한 번쯤은 그 통제에서 벗어난 미래를 꿈꿔 봤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그 손 아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 정도는 가지고 있을 테고.

그리고 예상대로 황녀는 미심쩍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는 일에 비해 받는 대가가 크다는 것에 불안해하면서도 그녀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실제로 도와주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힘이 닿는 한’이라고 단서를 달았듯, 만약 떠나기 전까지 도움을 청하니 않으면 그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황녀를 도와주겠다고 제냐에게 갈 기회를 뒤로 미룰 리가 없지 않은가?

‘계기가 없다면 움직이지 않을 타입이지.’

그가 어머니에게 그랬듯이, 황녀 또한 부모의 인정에 목말라하는 이였다. 분명 쉽게 황제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제냐와 같은 존재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이 여자는 늘 숨을 죽이고 기회를 노리다가 그냥 이대로 흘러가겠지.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야.’

공수표나 다름없는 말을 던졌지만 거짓말은 한 건 아니니 루미에르는 당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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