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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74)화 (74/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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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굴리던 제냐가 마왕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이제 질문해도 된다는 소리신가요?”

“그래.”

“제가 이걸 어떻게 믿죠? 이거 누가 봐도 다 꾸며 낸 것 같은데.”

제냐가 부러 더 심드렁하게 말하자 마왕이 코웃음을 쳤다.

“그걸 그대로 믿으면 그게 멍청한 거겠지.”

울컥한 제냐가 책을 흔들며 뾰족하게 물었다.

“거짓 덩어리인 책을 찾으려던 이유는요?”

“거기에 내 이름이랑 성녀가 나오니까. 예언도 나오고.”

“그러니까 앞으로 하려는 이야기에 성녀와 예언이 관련되어 있다는 거군요?”

제냐가 눈을 가늘게 뜨자 마왕이 씩 웃었다.

“그래.”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게 좋은 모양이었다.

“폐하께서 용사의 정체를 묵과하고 제가 그 용사를 받아 준 것까지 모른 척한 이유도 관련되어 있고요?”

“맞아.”

“갑자기 이 일행으로 인간계에 온 것도요?”

“그렇지.”

그렇다면 제냐가 할 답은 하나였다.

“그럼 이야기해 주세요. 성녀와 예언에 대해서.”

물론 앞으로 마왕의 입에서 튀어나올 이야기들이 전부 진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제가 판단할 테니까요.”

어디 한번 이야기해 보라고 거만을 떨었지만 마왕은 그게 기꺼운 것 같았다.

“우선 네가 제일 궁금해하던 것, 그러니까 용사를 묵과하고 용사를 도와준 너를 가만히 놔둔 이유부터 할까?”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린 마왕이 오만한 얼굴로 말했다.

“네 방에 용사를 가져다 두라고 시킨 건 나다.”

마왕이 하는 말에 크게 반응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정말 너무하지 않은가?

“…미치신 건가요?”

“딱히?”

그러니까 테라스에 루미에르를 가져다 둔 게 그라고 말하는 건가?

“자세히 설명해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제냐와 달리 마왕은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엘리고스에게 명령해 마계에 도착한 그를 찾아냈다.”

“찾아낸 것까지는 그렇다고 쳐요. 그런데 왜 제 방에 데려다 놓으셨는데요?”

“한때 내가 그랬듯 그 몸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그러니까 마왕은 용사의 체질만이 아니라 제냐의 특이한 힘이 용사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까지 전부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왜 용사를 살려 두려고 하신 건데요?”

“그보다는 너를 믿지 않은 거냐고 물을 줄 알았는데.”

그 말에 제냐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충직한 시녀라면 조금 전 마왕의 말에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었다.

마왕의 계획을 위해서는 제냐가 당연하게 마왕을 저버리고 용사를 살리려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야 하니까.

하지만 제냐가 마왕의 계획대로 움직인 이상 마왕이 그녀를 믿지 않았다고 억울해할 일은 없었다.

“저도 폐하를 안 믿으니까 상관없어요.”

그런 말을 하면서도 제냐는 당당했다. 어차피 상대를 믿지 않는 건 똑같았다.

“이제 얼른 답이나 해 주시죠.”

쓸데없이 말을 돌리지 말고 질문에 답을 해 줬으면 싶었다.

“어째서 용사를 살려 두려고 하신 거죠?”

붉은 눈동자가 제냐를 똑바로 담았다. 길어지는 침묵이 거슬릴 때쯤, 마왕이 입을 열었다.

“예언이 거짓이라서.”

그리고 그 말에 담긴 뜻에 제냐가 크게 숨을 내뱉었다.

생각보다… 그래, 생각보다 그리 놀랍지 않았다. 신전에 이제 떨어질 정도 없어서 그런가?

어쩌면 마왕이 열심히 노력해 가져온 책이 이런 내용이라는 걸 확인한 순간부터 대충 짐작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붙잡고 있던 예언이 거짓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제냐는 무너지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예언이 거짓이라는 전제에 당연히 따라오는 사실을 떠올렸다.

“예언이 거짓이면 용사도 거짓인가요?”

“그래, 용사라는 건 만들어진 존재야.”

“…….”

또 한 번 확인 사살을 당했는데도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너무 절망적이어서 충격을 받았다든가 현실을 부정한다든가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덤덤했다.

부모님이 믿던 신전이 알고 보니 못된 놈들이라 믿음이 식어서? 아니, 제냐가 이렇게까지 아무렇지 않은 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단 하나의 생각만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루미에르가 굳이 신전에 있어야 할 필요 없잖아.’

희생하고 사람들에게 욕을 먹으면서까지 루미에르가 그들을 지켜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가 원하는 대로 자신의 곁에 있어도…….

제냐는 눈을 들어 마왕을 쳐다봤다. 마왕은 어딘가 조금 놀란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의아하다는 듯 물어보자 그가 무언가를 확인하듯 제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 답했다.

“예상보다…….”

마왕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다시 한번 제냐의 기색을 살피는 것이다. 제냐가 생략된 말을 내뱉었다.

“아무렇지 않다고요?”

“그래.”

“그러게요.”

제냐 역시 이런 스스로가 신기했다. 하지만 구질구질하게 마왕에게 그녀의 심정이나 루미에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폐하의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신이 안 가서 그런 걸지도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오래 안 사이라는 건 여러모로 짜증 나는 일이었다.

“참 절 잘 아세요.”

제냐가 삐뚜름하게 대꾸했지만 그건 전혀 타격을 주지 못했다.

“너도 그만큼 날 잘 아니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 테지.”

그래, 하지만 그래도 이야기는 들어 보고 싶었다.

“글쎄요. 마저 들어 보고 생각해 보죠.”

여전히 삐딱한 대꾸에도, 고집이 분명한 말에도 마왕은 결국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이야기를 이어 갔다.

* * *

마차 문을 열고 루미에르에게 인사를 하던 신관들이 마차 바닥에 뻗어 있는 이를 발견하고는 아연실색해 입만 뻐끔거렸다.

“아, 그…….”

루미에르는 그런 신관들을 무시하고 마차에서 내렸다. 신전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엄청난 시선이 루미에르에게 집중됐다.

“서, 설마?”

“살아 계셨어?”

남자의 아름다운 외모를 확인한 이들이 그가 누군지 알아차리고는 놀라 수군거렸다. 아직 모든 신관에게 소식이 전해진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일부러 그랬겠지.’

평등을 추구한다는 것치고 고위 신관들은 하급 신관과 수습 신관들보다 높은 곳에 있는 자신들의 위치를 즐기는 편이었다.

비릿한 웃음을 숨기는데 저 멀리서 고위 신관 무리가 웬일로 체통을 잃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루미에르 님!”

그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무사하신 줄 알았습니다!”

다른 감정 없이 오롯한 기쁨만이 느껴지는 걸 보아하니 루미에르가 사라진 뒤, 걱정을 많이 한 모양이었다.

“정말 다행입니다.”

“그간 얼마나 힘이 드셨습니까?”

루미에르에 대한 걱정이라기보다는 신전의 안위와 그로 인해 벌어질 손해에 대한 걱정이었겠지만.

아니나 다를까 줄줄 걱정 어린 말을 내뱉던 신관들이 비열하게 눈을 빛냈다.

“황궁에 계셨다고요!”

“혹 황궁에서 무슨 일을…….”

혹시나 황궁에 대한 약점을 얻을 수 있을까 눈을 빛내는 하이에나들을 향해 루미에르는 그들을 만나고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 설마요.”

익숙한 미소를 보여 주자 그들이 대놓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항상 입을 다물고 눈치 없는 척 시키는 대로만 행동하니 고위 신관들은 그의 앞에서는 표정 관리에 소홀하곤 했다.

그들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벌써 인내가 닳아 없어지는 것 같았다.

“아직 황궁 분들은 이곳에 남아 있습니다.”

“황궁보다는 신전이 안전하단 판단 때문이겠지요.”

그는 ‘안전한’을 강하게 발음하는 신관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물었다.

“어머니는?”

한동안 신전에 머무르면서 동태를 살피려면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지 알아야 했다. 겸사겸사 아직 신전에 있다는 황녀를 만날 수 있으면 좋을 테다.

‘황녀를 설득하면 도움이 될까?’

최대한 제냐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미리 작업을 해 둘 필요가 있었다.

제냐.

아른거리는 보랏빛 눈을 떠올리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녀님께서는 안쪽에 계십니다.”

시선이 마주치자 말을 꺼낸 이가 깊게 고개를 숙였다.

루미에르를 감싸고 더 이야기를 이어 갈 것 같았던 고위 신관들이 그들의 뒤에서 나타난 어머니의 수족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물러났다.

고위 신관들이 입을 다물자 이제껏 눈치를 보고 있던 하급 신관들이 슬금슬금 신전 전체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간질거리는 표정을 보아하니 루미에르의 귀환을 널리 퍼트릴 게 뻔했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신관들을 무심히 넘긴 루미에르가 수족을 따라 이동했다. 신전 안으로 이동할수록, 사람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잠시 뒤,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루미에르가 입을 열었다.

“마차에 쓰러진 신관이 하나 있습니다.”

불쑥 튀어나온 말에 놀랄 법도 한데 수족은 차분하게 대꾸했다.

“그렇습니까?”

“적당히 처리해 주시죠.”

루미에르는 그를 돌아보는 신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자 신관이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루미에르는 다시 걸음을 옮기는 신관을 따라가지 않고 명령했다.

“지금.”

신관은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언제나 어머니의 옆에서 순종적으로 구는 모습만 보여 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더군다나 그는 루미에르가 신전 고위층에게 조종당하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용사라는 명칭이 주는 권위와 달리 그가 아무런 힘이 없다는 걸, 정확히는 루미에르가 본인이 가진 힘을 휘두를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걸 아는 사람.

그런데 지금 루미에르가 아주 미약하게나마 그 힘을 휘두른 것이다.

루미에르에게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있다는 걸 알려 주기 충분했다.

상황을 가늠해 보겠다는 듯 잠깐 그의 눈을 쳐다보던 신관이 이내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의 수족으로 오래 있던 사람이라 그런지 눈치가 빨랐다.

“저쪽으로 쭉 가시면 됩니다.”

만약 자리를 비켜 주지 않았다면 기절시키려고 했으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루미에르는 수족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어머니가 있을 방으로 향했다.

루미에르와 독대를 할 때면 수족을 제외한 다른 호위나 신관들을 옆에 두지 않는 어머니답게 방 앞에도 그 주변에도 사람은 없었다.

잠시 조용한 복도를 살피던 루미에르는 아무 말 없이 방문을 열었다.

“어머니.”

“루미에르.”

벌컥, 방문을 고하지 않고 열린 문에도 성녀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루미에르를 반겼다.

루미에르는 방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서며 성녀를 따라 방긋 웃었다.

“다녀왔습니다.”

“그래요, 잘 돌아왔어요.”

닮은 듯 닮지 않은 미소를 띤 모자(母子)가 서로를 마주 봤다.

인자하게 루미에르를 쳐다보던 성녀는 그가 자리를 잡자마자 입을 열었다.

“내게 할 이야기가 아주 많을 텐데요.”

평소보다 가면이 옅었다. 여전히 웃음을 지우지 않은 그녀였지만 그럼에도 그 속에는 루미에르를 향한 압박이 가득했다.

네가 아는 모든 걸, 거짓 없이 이야기하라는 그 명령을 예전이라면 순순히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에게는 지킬 것도, 돌아갈 곳도 있었다.

루미에르가 고운 눈매를 접어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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