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의 이야기는 뭐, 뻔했다. 마르바스는 마왕이 됐고, 마계의 순수한 마력을 받아 더 이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몸이 됐다.
마왕이 되고 나서는 종종 인간계로 나가 클레어가 태어나지 않았나 확인 절차를 가졌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인간계의 사정도 알게 됐다. 여전히 신전은 마족들을 이용해 그들의 사리사욕을 채웠다. 마족들이 실제로 인간계를 침범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까 그다지 억울할 일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지루함에 미친 마족들 개인의 깽판에 불과하지만.”
그렇게 오로지 클레어만을 그리며 고요하던 마르바스에게 파문을 던진 건,
“중년 늙은이가 됐군.”
레온이었다.
1년에 한 번은 인간계로 내려와 클레어를 찾아 헤매던 마르바스가 차기 교황이 된 그를 발견한 것이다.
사실 마르바스는 이제껏 스스로가 레온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을 죽인 건 레온이니 화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마르바스는 그 모든 걸 죄에 대한 업보로 여겼다. 마르바스와 클레어는 벌을 받아 마땅한 짓을 많이도 저질렀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잘 살길 바란 건 아닌데.”
잘 사는 것을 넘어 클레어를 이용해 그 힘을 키우고 있는 건… 참을 수 없었다.
클레어를 성녀라 부르고 마르바스, 그를 용사라고 부르는 레온의 모습이 황당했다.
마르바스와 클레어가 했던 모든 일은 아주 잘 포장되어 있었다. 같잖은 죄책감 때문에, 위선적으로 쉬는 날이면 봉사를 다니곤 하던 걸 그녀의 행적 사이에 끼워 넣자 제법 그럴싸한 거짓이 탄생했다.
성녀 클레어와 용사 마르바스.
“정신이 나갔군.”
그들의 이야기가 널리 퍼지면서 신전은 더욱 숭상받는 것 같긴 했다. 하지만 굳이 그들을 위인으로 만들지 않아도 레온은 충분히 다른 방식으로 신전을 드높일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를 앞세운 이유가 뭐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다음에는 내 걸로 만들면 돼.’
성녀와 함께하는 용사라는 이미지가 있다면, 마르바스와 같은 힘을 가진 이를 용사로 만들어 신전에 복속시킬 수 있는 것이다.
레온이 숨겨진 그의 딸에게 클레어라는 이름을 준 건 그 가정을 확신으로 만들어 줬다.
“미친놈.”
자기가 죽인 동생의 이름을 딸에게 붙여 줘? 클레어를 그렇게 이용하게 둔다고?
“적당히 어울려 주는 것도 좋겠지.”
마지막 순간, 그간의 노력을 무너트린다면 더 절망하고 무너지지 않을까?
마르바스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이제야 꽁꽁 감춰 두고 있던 분노가 폭발한 건지. 아니면 마족이 되고 호전적인 마력에 익숙해지면서 미쳐 버린 건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어느 때보다 힘이 넘쳐.”
마르바스는 곧장 마계로 돌아와 그가 마왕이 되고 나서부터 시끄럽던 마족들을 처리했다.
“가, 감히 우리를 죽이려는 건가!”
“말 안 듣는 것들을 살려 둘 필요가 있나?”
신생 귀족들을 주류로 만들고 근본도 모르는 마족을 마왕으로 삼을 수 없다는 늙은이들을 무릎 꿇리고 주동자의 목을 날렸다.
그리고 인간계로 향하는 마법진과 마법을 금지하고 인간계와 관련된 모든 권한을 마왕에게 복속시켰다. 늙은이들을 처리하니 일은 일사천리였다.
보여 주기식으로 마족이라는 티를 듬뿍 내며 인간계를 적당히 돌아다녔다. 그러자 신전은 늘 그랬듯 마족의 움직임을 살피며 자신들의 죄를 마족에게 뒤집어씌웠다.
“들었어? 이번에 남쪽 지방에 피바람이…….”
“전부 마족들 짓이래.”
“극악무도한 것들!”
마족들의 악명은 점점 커지고 있었지만 마르바스는 모든 것을 그냥 지켜봤다. 그러는 사이 죄 없는 인간들은 많이도 죽어 나갔다.
우습게도 마족보다 신전이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을 죽였지만.
“이쪽도 죄가 없는 건 아니지.”
마족들은 종종 마르바스의 통제를 벗어나 인간들을 죽여 댔다. 아무리 힘으로 찍어 누른다고 해도 기본적인 성격들이 제멋대로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 모든 게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미 무의미하게 생명을 죽여 본 적이 있어서 그런 건가? 마르바스는 그저 신전을 무너트릴 생각밖에 없었다.
“네가 나를 혼내 주면 좋을 텐데.”
누군가 강제로 시키는 것도 아닌데, 복수를 위해 사람이 죽는 걸 방관한다고.
클레어가 그를 경멸하게 된다고 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도 벌은 받아야지.”
그렇게 신전을 감시하고 그들이 하는 짓을 조사하다 보니, 마르바스는 자연스레 신전이 근본적으로 날뛸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게 됐다.
그리고 그 이유인 ‘물건’을 찾기 위해 인간계로 향했다.
물건이 있다던 곳은 신전이었고 마르바스의 고향을 떠올리게 했다. 덕분에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고 신전에 대한 악의가 불타올랐다.
“신전을 공격하라고 하신 겁니까?”
군단장의 물음에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껏 신전을 건드리지 않은 걸로 신전 놈들이 얼마나 기고만장해 있는지 알았다. 그런데도 그걸 놔둔 건 훗날을 위해서였는데 주체가 안 됐다.
“신전 것들은 전부 살아 있을 가치가 없어.”
찾던 물건이 여기 있었다는 건 거짓 정보였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의미 없는 화풀이를 하던 마르바스의 눈에 그 아이가 보인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클레어?”
무너지는 신전 앞, 검은 머리카락에 보랏빛 눈을 가진 어린아이가 있었다.
‘어떻게…….’
운 좋게 그의 마법 범위 밖에 서 있던 아이를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겉모습이 너를 너무 닮아 있었다. 어릴 적의 네가 저랬을까 싶을 정도로.
너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순간 알아차렸다.
정말 너라고.
너와 똑같은 힘까지 쓰는, 부정할 여지도 없는 너.
하지만 쓰러지던 아이의 눈에서 본 두려움과 혐오를 본 순간, 감동은 사라졌다.
“멍청한 새끼.”
나를 미워하고 욕해 달라고? 그딴 생각을 하는 게 아니었다. 다른 벌은 다 받아도 그건 안 된다고, 그렇게 빌었어야 했다.
많이 양보해서 미워하고 싫어하는 건 괜찮았다. 하지만 두려워하는 건 정말 싫었다.
“나는 변하지 않을 네 편이고 하나밖에 없었던 네 이해자인데.”
결국 마르바스는 또 한 번 멍청한 짓을 했다. 그 보랏빛 눈이 보일 감정이 두려워서 깨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한 달이 지나서야 아이를 찾아갔으니까.
“안 가십니까?”
한심하다는 엘리고스의 눈빛을 받고 나서야 간신히 찾아간 아이는 너무 슬퍼 보이고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다시 신전으로 돌려보내겠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어디를 보내도 신전은 절대 안 돼.’
그가 모르는 사이 아이가 신전에 있었던 것도 구역질이 나는데.
그때 그의 사정을 잘 아는 엘리고스가 움직였다. 그게 싫지 않았다. 이렇게나마 옆에서 숨을 쉬고 있는 널 보고 있으니까 살 것 같았다.
“이제, 이름으로 불러도 되지 않아?”
이번에는 다치지 않게 자신의 품 안에서 잘 키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의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마르바스와는 반대로 아이는 점점 더 감정적으로 메말라 갔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결심이 흔들렸다.
‘이제라도 인간계로 돌려보내야 하나?’
하지만 마르바스는 적어도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아이를 지켜 주고 싶었다. 그렇게 고민을 거듭하며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드디어 용사가 나타났다.
“정말 용사라고?”
“제가 볼 때는 그렇습니다.”
마르바스는 군대를 이끌고 오랜만에 인간계로 향했다. 그리고 정말 그와 같은 힘을 가진 인간을 발견했다.
용사라 불리는 인간은 의지할 만한 사람도 없이 이용당하기만 하는 고아였다. 그리고 제국과 결탁한 신전은 그 용사를 손안에 쥐고 흔들었다.
“레온의 자식답군.”
레온의 자식인 성녀, ‘클레어’까지 확인한 마르바스는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용사를 죽이고, 신전을 박살 내야 했다. 드디어 얻었다고 생각한 것들을 전부 빼앗을 때가 온 것이다.
하지만 마르바스는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아이가 용사의 소식을 듣자마자 살아난 것이다.
“제냐.”
“네?”
반짝반짝 생기를 뿜어내며 싱그럽게 피어나는 영혼을 직접 이 두 눈으로 봤는데, 어떻게 네 소망과 구원을 내 손으로 망가트릴 수 있겠는가.
마르바스는 또 한 번 의지할 곳을 잃은 아이가 이번에야말로 정말 죽어 버릴까 봐 무서웠다.
‘조금만, 조금만 지켜보자.’
아이가 조금만 더 클 때까지, 진실을 알고도 무너지지 않을 때까지만.
용사가 과거 아이와 비슷한 꼴이 되어 갔지만 그건 마르바스에게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아이는 성인이 됐고, 마르바스는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오랜 시간 참아 왔던 분노를 이대로 묵혀 둘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아이가 무너지게 둘 생각도 없었다.
마르바스는 정해 둔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등장한 탓에 조금 더 다친 용사를 아이의 방 테라스로 보냈다.
정말 이 긴 복수와 끈질긴 인연을 끊어 낼 때가 됐다.
* * *
제냐는 하도 집중해 뻑뻑한 눈을 깜빡거리며 책을 덮었다. 제냐가 피곤한 얼굴로 마왕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걸 보여 주신 이유가 뭐죠?”
“그걸 봐야 이야기를 더 쉽게 이해할 테니까. 질문하기도 쉬울 테고.”
대충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뭔지는 알겠다. 우리 신전에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있고 그 덕에 너희들 역시 구원받을 것이다.
이건 용사가 나온다는 예언의 시작과, 지금과 마찬가지로 용사를 발견한 성녀와 관련된 영웅담이었다.
무난하고 나쁘지 않은 신전 위세용 책이었지만 그 용사가 눈앞의 ‘마르바스’라는 걸 인지하자 공정성과 신빙성이 현격히 떨어졌다.
‘장난하나?’
책 속 용사는 지금 루미에르가 그렇듯 성스럽고 용감하며, 희생적이고 신전에 충실했다.
‘용사였다고.’
너무 현실감 없는 이야기 아닌가?
하지만 거짓말이라고 하기에는 당시의 상황과 그가 마왕이 된 시기가 너무 절묘하게 들어맞았다. 무엇보다 책이 숨겨져 있던 곳이 너무나 수상했다.
‘책을 바꿔치기했나?’
하지만 굳이 뭣 하러? 고작 날 속이려고 인간계로 내려와 이 모든 일을 계획한다고? 이렇게 귀찮고 추잡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