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면 제냐의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예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레라지에는 저 쓸데없이 훌륭한 얼굴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각을 잡고 사람을 잔뜩 긴장하게 하더니, 그 묘한 압박감의 원인이 이딴 거였다니.
하긴 처음 질문부터 이상하다 했다.
“어떻게 만난 건데?”
긴장으로 굳어 있던 제냐의 얼굴에 금이 갔다가 다시 딱딱하게 굳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냐는 레라지에가 그녀를 비꼬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이어 이어진 감탄사들에 제냐는 정신이 없었다.
“용사와 사귄다니.”
레라지에는 제냐에게 답을 듣고 싶다기보다는 그 넘쳐 나는 감상을 누군가 들어 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신분의 벽! 아니지, 제냐는 공주님이니까 그건 아닌가?”
입을 턱 막고 눈을 크게 뜬 레라지에가 으흐흐, 음흉하게 웃었다. 그의 눈앞에서 펼쳐진 키스가 그렇게 좋았던 걸까? 흐릿한 눈으로 레라지에를 쳐다보는데 그가 불쑥 말했다.
“그래도 벽이 없는 건 아니잖아. 용사와 마왕성의 시녀라니.”
다시 한번 몸을 긴장시키는데, 또 현실감이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렇지만 원래 벽이 있어야 사랑은 불타는 법이라고?”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더니, 마족도 마찬가지네.’
제냐와 루미에르의 위치는 그저 로맨스를 더 흥미롭게 만드는 장애물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것인지, 그는 연신 얼굴을 붉히기 바빴다.
“너무 좋당.”
어쩜 귀족이 이렇게 가벼울까. 제냐는 그렇게 마왕이 나타날 때까지 로맨스와 키스에 대한 이야기를 끝없이 되풀이해 들어야 했다.
“그래서 키스는 어땠어? 아, 이런 질문은 실례인가?”
실례인 걸 알면 안 물었으면 좋겠다. 눈치도 좋은 게 왜 이런담.
“역시 잘생겼어. 폐하와 버금가는 얼굴이었다니까?”
왜 그 말이 안 나오나 했다.
“먼젓번에 봤을 때랑 다르게 웃고 있어서 더 좋았어.”
조금 더 길게 보면 좋았을 거라고 수줍게 웃는 얼굴을 외면하는데 그가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그런 얼굴이랑 같이 살 거야? 너무 부럽다. 나도 종종 보여 줘.”
그렇게 아름다운 얼굴과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잠이 들 때까지 함께하는 건 어떤 느낌인가 묻는데, 할 말이 없었다.
“키스할 때 속눈썹이 떨리는 거 봤어? 흐. 고개를 틀 때 턱선이 도드라지던데 그것도 너무 좋더라. 아주 각이 예술이었다니까?”
정말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레라지에는… 변태 같았다.
정말로. 굉장히. 많이.
“먼저 입을 맞춘 것치고는 조금 조심스러웠지? 그런 것도 귀여워, 역시 처음인 제냐를 배려해 준 걸까?”
이게 바로 걸스 토크 같은 건가? 그런데 그걸 왜 레라지에와 하지?
“핫, 근데 첫 키스는 맞아? 아니, 이런 건 중요한 게 아니지. 누구든 상대와 하는 처음인 키스가 진정한 의미의 첫 키스가 아니겠어?”
제냐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레라지에의 말들을 한 귀로 흘러내려고 노력했다.
“근데 그것도 좋더라. 약혼자가 따로 있는데 약혼녀의 사촌이랑 키스라니! 소설 같아!”
아무리 생각해도 제냐는 아까부터 입 한 번 열지 않았으니까 역시 이건 걸스 토크는 아니었다.
“으학, 내가 그걸 직접 눈으로 보다니, 행복해!”
정말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왜 정신적인 피해는 바로 눈에 보이게 드러나지 않는 걸까. 귀나 눈에서 피가 줄줄 새면 제발 입을 닥치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레라지에가 보지 않는 사이 코라도 후려쳐서 피를 내고 싶었다. 사실 저렇게 흥분한 걸 보면 피가 조금 난다고 말을 멈출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치료해 준다고 옆에 딱 붙어 더 주절거리면 모를까.’
그렇게 어떻게 해야 레라지에의 입을 막을 수 있을까 심도 있는 고민을 할 때 드디어 마왕이 마법을 깨고 나타났다.
제냐는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 마왕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레라지에의 도움 없이도 알아서 척척 마법에서 빠져나오는 그의 능력이 오늘따라 매우 대단해 보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대단한 능력으로 언제나 그렇듯 레라지에의 입을 다물게 해 줬으면 했다.
차갑고 짜증 난다는 얼굴로, 또는 관심 없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태도로 레라지에를 물리쳐 달라고. 하지만 그 기대는 금방 깨져 나갔다.
레라지에는 마왕에게 보고를 하는 사이사이 제냐와 루미에르의 이야기를 양념처럼 치고 있었다.
“폐하의 마력을 느끼고 말씀하신 대로 제냐를 데리러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바로 그걸 본 거죠.”
저 입을 막아 줬음 싶은 마왕은 얌전히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평소였으면 사생활에는 관심이 없다고 딱 잘라 선을 그었을 텐데 왜 이번에만?
그렇게 제냐에게는 악몽 같은 시간이 지나가고, 드디어 레라지에가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된 이야기입니다!”
정말 너무 재미있지 않냐고 눈을 반짝이는 레라지에를 뒤로한 채 마왕이 고개를 돌려 제냐를 쳐다봤다.
제냐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이제껏 제냐가 아는 마왕이라면 당연히 놀리는 말이 튀어나올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래도, 제발 오늘은.
‘하지 마.’
제냐는 마지막 희망을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제 저희가 대화를 할 차례죠?”
“그래.”
마왕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때만 해도 제냐는 희망에 차 있었다. 마왕의 얼굴은 매우 심각해 보였고,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 한 점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어진 마왕의 말에 제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키스라니, 진짜 사귀기로 한 건가?”
나이가 들면 저렇게 남의 연애에 관심이 많은 걸까? 백 살이 넘은 할아버지는 다 저러는 거냐고.
본인의 말에 따르면 고작해야 갓난아이들에 불과한 것들이 연애를 좀 한다고 이렇게까지 신경을 쓸 이유가 있나?
사실 연애라고 말하기도 우스웠다. 둘은 기껏해야 입을 좀 맞췄을 뿐이었다.
물론 같은 방에서 지냈고, 그간 연인인 척 굴긴 했지만 그 이유를 마왕도 알고 있는 게 분명한데, 이런 걸 묻고 싶나?
“정말 사귀리라곤……. 진지한 관계라면 곤란한데.”
마왕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턱을 문지르며 흠, 소리를 냈다. 제냐를 놀리려는 게 아니라 정말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차라리 장난을 치는 게 더 나았다. 왜 저렇게 진지하게 나오는 거지?
‘도대체 왜…….’
제냐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키스 말고, 책이요!”
악-! 목소리를 높인 제냐가 마왕의 손에 들린 책을 손가락질했다.
“폐하가 당한 마법은 뭐였는지, 왜 그 책을 가지려고 한 건지, 거기에 적힌 건 뭔지, 그런 걸 이야기해 달라고요!”
“아.”
잊고 있었어? 정말로? 내 키스가 그렇게 중요해? 책은 중요하지 않은 건가?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부글거렸다.
정말 이 마족들의 머리를 전부 해부해 보고 싶었다. 제냐가 씩씩거리며 그를 쳐다보자 마왕이 레라지에와 눈을 맞추더니 책을 건넸다.
“읽어 볼 텐가?”
당연한 질문이었다. 제냐는 냉큼 손을 뻗다가 물었다.
“또 마법이 발동하는 건 아니죠?”
“그래, 내가 부쉈으니까.”
그 말대로 책을 붙잡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제냐는 책의 표지를 살피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루미에르에 관한 건 잠시 뒤로 미뤄 두고─아무리 노력해도 잘 지워지지 않았지만, 아무튼─ 지금은 이 일을 먼저 해결해야 했다.
크게 숨을 가다듬은 제냐가 머릿속 붉은 입술을 흐트러트리며 질문을 던졌다.
“뭐가 적혀 있는데요?”
“읽어 보면 알 텐데.”
그냥 곱게 답을 해 주면 어디가 덧나나? 제냐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한 가지만 알려 주세요. 신전과 결탁했어요?”
“하, 아니.”
비릿한 비웃음이, 신전을 향한 부정적인 감정이 가득 담긴 답이었다.
고개를 들어 마왕을 쳐다보자 아니나 다를까 그의 얼굴에는 적의만 가득했다. 그나마, 그나마 다행이었다.
제냐가 후우, 떨리는 숨을 뱉자 마왕이 날 선 시선으로 책을 바라봤다.
“그 책이 황실에 있었으니 결탁은 신전과 황실이 한 거겠지.”
이 책의 소유권은 본래 신전에 있었다는 소리였다. 신전과 황실이 결탁했다는 거야, 루미에르와 제레미야의 약혼 소식을 들은 순간 기정사실화된 거였으니까 그다지 신경 쓰이진 않았다.
‘당연하다고 해야 하나.’
이제 제냐는 성녀에 대한 기대도, 황제에 대한 기대도 없었다.
바짝 찌푸려져 있던 표정을 푼 제냐가 드디어 책의 첫 문장을 읽었다.
「제국력 326년
신기한 힘을 가진 사내를 발견했다. 성력에 의한 치유가 불가능하며 마법에 의한 치유 역시 불가능한 사내는 흡사 마족을 연상시켰다.
하지만 아무리 조사를 해 봐도 사내는 인간이 맞았다.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을 가진 그 사내의 이름은 마르바스였다.」
뭐?
일기장을 연상하게 하는 시작에 잠시 의아하긴 했다. 그 안에 담긴 신기한 힘을 가진 사내의 특징이 제냐에게는 익숙한 이를 떠올리게 했을 때는 조금 당황했고.
하지만 마지막 문장은 제냐를 패닉에 빠지게 했다.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을 지난 사내.
마르바스.
책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제냐는 고개를 들어 마왕을 쳐다봤다.
마왕이 제냐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을 보탰다.
“보다시피, 한때 나는 인간이었지.”
마왕이 인간이라니, 그 말을 믿을 이가 어디…….
하지만 마왕도, 그 옆에 있는 레라지에도 그녀를 놀리는 기색은 없었다.
중요하지 않은 책은 개뿔!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키스 따위에, 아무리 그래도 따위라고 하는 건 조금 기분 나쁘고, 아무튼 다른 곳에 관심을 가지다니!
제냐가 급하게 책을 넘겼다. 그 뒤로 고요한 방 안에는 급하게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이 한참을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