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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70)화 (7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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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마왕과 용사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신관들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인자한 웃음을 흘리며 구원의 손길을 빙자한 탐욕이 덕지덕지 붙은 더러운 손을 뻗는 자들.

지금의 성녀와 지독히도 닮은 얼굴을 한 사내의 기록들을 바라보며 마르바스는 비틀린 웃음을 흘렸다.

“최대한 미화를 해 보려고 한 것 같은데.”

똑같은 상황을 어떻게든 다른 방식으로 설명을 하려고 하곤 있지만 그럼에도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머리가 있다면 단박에 이 기록이 미심쩍다는 걸 눈치챌 정도로.

그러니까 예를 들어 제냐 같은 이 말이다.

“보여 줘도 문제가 없겠군.”

마르바스는 그의 기억과 달리 피눈물을 뚝뚝 흘리며 마족들을 몰살하고 있는 이를 바라봤다.

짧게 다듬어진 머리카락과 앳되어 보이는 얼굴 속 자리한 붉은 눈.

마지막 순간, 죽은 여인을 바라보는 그 얼굴을 본 마르바스가 무감각하게 힘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꽤 견고하게 쌓여 있던 마나가 허겁지겁 도망을 가려다 붉은 힘에 잠식당하고 이내 아주 익숙한 힘, 마력으로 변모해 마르바스의 명령을 기다렸다.

마르바스는 그의 권속 아래로 들어온 마력을 이용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마법을 해제했다.

파아아-!

흩날리는 마력 너머 밝은 분위기의 응접실이 나타나고 익숙한 존재가 그를 반겼다.

어느새 본래의 색을 되찾은 제냐가 소파에 앉아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뭐지?’

눈을 치뜨고, 이제 제대로 설명하라고 그를 닦달할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제냐는 의욕이 없어 보였다. 거기다 거슬리는 것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문제가 생겼나?’

마르바스는 다시 고개를 돌려 제냐를 쳐다보다가 그녀와 달리 싱글벙글한 낯짝의 레라지에를 발견했다.

‘저건 또 왜 그래?’

꼭 제냐의 생기를 다 빨아먹은 것처럼 그의 얼굴에는 윤이 반짝반짝 났다.

“괴롭혔나?”

의심 가득한 붉은 눈동자가 레라지에를 훑다가 제냐를 돌아봤다.

“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레라지에가 손사래를 쳤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단호한 부정이었지만 마르바스는 제냐가 입술을 삐쭉거리는 걸 확인한 뒤였다. 얼굴색이 저따위인 것에 레라지에가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 것이 분명했다.

쯧, 혀를 찬 마르바스가 서로를 마주 보며 앉아 있던 레라지에와 제냐 사이를 가리듯 가운데에 놓인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지켜 주라니까 왜 맘대로 건드려?”

어릴 때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나이가 들수록 팩 토라지는 모습이 늘어났다. 그게 이쪽에 마음을 열었기 때문이라는 걸 알기에 화가 나진 않았지만…….

“건드릴 때가 어디 있다고.”

안 그래도 이래저래 해야 할 이야기가 많아서 기분을 살펴야 했는데, 상태가 이래선 곤란했다.

마왕이 서늘한 눈으로 레라지에를 쳐다봤다. 저 신이 난 얼굴을 보아하니 아주 마음껏 입을 놀린 것이 틀림없었다.

완전히 지친 제냐의 표정을 다시 살핀 마르바스가 레라지에에게 고갯짓을 했다.

“없던 동안의 이야기, 하나도 빠짐없이 해.”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면 그걸 핑계 삼아 한 대 쥐어박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레라지에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예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제냐가 용사와 키스를 했습니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말에 마르바스가 삐걱대며 제냐를 쳐다봤다. 이게 무슨 소리야.

모호한 빛을 내는 붉은 눈이 얼굴에 닿자 제냐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사정없이 일그러진 입매를 보아하니 욕이라도 한 사발 던지고 싶은 모양새였다.

마르바스가 곧장 명령을 내렸다.

“그 전의 일까지 전부 다 설명해.”

“네!”

줄줄 이어지는 레라지에의 설명을 들으며 마르바스가 제냐를 대놓고 응시했다. 은근슬쩍 다시 눈을 뜬 제냐가 힐끔거리며 그의 눈치를 보다가 붉어진 얼굴로 홱 반대로 고개를 돌렸다.

‘거짓말은 아니군.’

키스라니, 도대체 왜 일이 그따위로 흘러간 걸까.

마르바스가 볼 안쪽을 혀로 문지르며 욕을 삼켰다.

* * *

루미에르는 먼저 자리를 떠나 놓고도 금방이라도 다시 돌아가고 싶어 다리에 힘을 줬다.

‘무사히 돌아갔을까?’

루미에르는 마차의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궁을 떠난 지 한참이라 그녀가 보이지 않을 걸 알면서도 미련이 남아 계속 밖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옆에 남아 있고 싶었다. 하지만 제냐가 원하는 대로 무고한 사람을 해치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갈 만한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대놓고 인간을 죽이면 미워할 테니까.’

용사에 대한 제냐의 환상을 깨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그가 용사여서 얻은 신뢰와 믿음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떠나면 나를 잊지 못하겠지.’

그녀를 위해 자기를 희생한 루미에르를 계속 생각하고, 그의 고백을 곱씹으며 떠올릴 것이다.

‘마지막은 정말 충동이었지만.’

함께 가자고 말해 줘서, 그토록 원하던 이야기를 하니까. 적어도 그를 싫어하진 않으니까 이런 짓 정도는 받아 주지 않을까 하는 계산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너무 잘한 일이었다.

루미에르는 손을 들어 올려 아직도 그녀의 향기와 감촉이 남은 것 같은 입술을 더듬었다.

“아아.”

놀라서 벌어지던 입술과 작은 숨소리, 그와 같은 향기가 나는, 언젠가부터 늘 시선이 가던 그 입술.

그걸 한번 머금자, 생전 있는지도 몰랐던 갈증이 그를 덮쳤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목이 말랐던 건지, 그녀를 온통 집어삼키고 싶었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그 몸을 꽉 옥죄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 냈다.

더 깊숙이 그녀를 느끼고 싶었지만 시선이 너무 많았다. 입술이 떨어진 순간 마주한 붉어진 얼굴이, 촉촉해져 살짝 부은 입술이 너무 예뻐서.

‘남들에게 그런 것까지 보여 줄 순 없어.’

참는 건, 인내하는 건 루미에르가 제일 잘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참자고. 루미에르는 잔뜩 달아오른 몸을 달래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다시 그녀를 탐할 것 같은 본능을 억누르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한 발 멀어지는 그 순간부터 루미에르는 지독하게 그녀가 그리웠고 궁을 떠나고 있는 지금은 조금 더 욕심을 채워 볼 걸 하는 후회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렇게 그녀의 흔적을 덧그리듯 입술을 더듬는데 앞에 있던 사내가 크흠, 헛기침을 했다.

“루미에르 님.”

루미에르는 입술을 만지던 손가락을 내리고 앞에 앉아 있는 사내를 쳐다봤다. 제냐를 몰아붙이던 그자였다.

곤란해하던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고, 이자 때문에 그녀와 헤어지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절로 적대감이 차올랐다.

‘…내게서 제냐를 빼앗아 갔어.’

마족들에게, 마왕에게 느꼈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렬한 감정이었다. 훅 치솟는 그 울컥거림은 처음 겪는 것이라서 루미에르는 힘을 갈무리하지 못했다.

아마 할 수 있어도 굳이 하지 않았겠지만.

“…커, 커헉.”

루미에르는 차가운 눈으로 눈앞의 신관의 허리가 꺾이고 커다란 마차 바닥을 구르는 걸 지켜봤다.

입에서 침이 질질 새고 눈이 돌아가 흰자가 드러났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지 가슴을 퍽퍽 두드리며 바닥을 기는 걸 모두 눈에 새겼다.

“루, 큭, 미에, 허업…….”

‘이대로 죽게 놔둘까?’

이자와 마부, 그리고 그들을 뒤따르고 있는 두 명의 신관까지 모두 처리하면 어떨까?

그리고 다시 제냐를 찾으러 가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 이미 어머니에게 루미에르의 소식이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니 이대로 사라진다 해도 일은 해결되지 않았다.

‘나와 함께 있던 제레미야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아실 테니까.’

제냐에게 관심이 쏠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마왕이 일행들을 데리고 마계로 떠날 때까지는 순종적인 모습을 보여야 했다.

정말 싫지만, 마왕은 제냐를 많이 아끼니까 그녀를 잘 챙길 테고, 마계로 돌아가면 제냐의 안전은 확보될 것이다.

‘그러면 나는 모든 문제를 처리하고 마계로 돌아가야지.’

어이가 없다 못해 우스운 말이었지만, 특이한 힘을 가진 제냐는 인간계보다 마계에서 마왕과 집사의 보호 아래 더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루미에르는 그가 그토록 증오하고 싫어하던 마족들과 어울려 사는 것도 아무렇지 않았다.

‘제냐만 있으면 돼.’

제냐는 오늘의 일로, 다시 마계로 찾아간 그를 밀어내지 못할 것이다.

떠나기 전 그를 붙잡던 제냐가 떠오르자 몸에 열이 오르고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조금 힘든 척을 하고 상처받은 척을 하면 기꺼이 그를 품 안에 안아 줄 것이다. 그럼 이번에야말로 그녀를 손에 넣을 수 있을 테고.

‘지금은 인내할 때야.’

머리카락을 매만져 주던 다정하고 따뜻한 손길을 상상하며 루미에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연약하고, 힘이 없어 신전에 휘둘리는 용사가 되어야 했다. 그래서 제냐가 그를 불쌍해하게, 그래서 결국 그를 받아들일 수 있게.

운이 좋으면 오늘처럼 입도 맞출 수 있을 거다. 루미에르가 손으로 입술을 매만지다 얼굴을 붉혔다.

‘제냐.’

점점 더 제냐가 보고 싶었다. 동시에 발아래 바르작거리고 있는 벌레 같은 놈에게 더욱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 어억.”

콱 막힌 숨통에, 목을 박박 긁으며 붉은 선을 만들던 신관이 매달리듯 루미에르를 쳐다봤다.

하지만 전혀 동정심이 들지 않았다. 루미에르는 그의 바지를 부여잡는 손을 쳐 내며 무기질한 눈으로 신관을 내려다봤다.

이 정도 화풀이는 괜찮았다. 신관 하나를 어떻게 했다고 해서 그 소식이 밖으로 퍼지진 않을 테니까.

루미에르는 신관의 지저분한 손이 그에게 닿지 않게 더욱 힘을 풀어냈다. 그리고 몸을 부르르 떨며 컥컥거리는 신관을 외면하며 마차가 신전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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