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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68)화 (68/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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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태도에 당황한 건 함께 있던 신관들이었다.

“이봐.”

다른 두 명의 신관이 키가 큰 신관을 막으려 했지만 그는 거침이 없었다.

“분명 신전에 가시는 걸 봤고, 돌아오셨다는 전갈을 받지 못했습니다.”

제냐가 생긋 웃으며 답했다.

“정보력이 형편없나 보죠.”

웃고 있지만 비꼬는 게 분명한 답에 신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전하!”

그 커다란 목소리에 제냐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서리가 낀 것 같은 냉랭한 눈이 신관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래요, 나는 제국의 황족이죠. 당신도 알다시피.”

아무리 수상하다고 해도 제레미야의 얼굴을 한 이상 제냐가 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감히 신관이 황족에게 화를 내다니? 아무리 신전의 위세가 높아졌다고 해도 그건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무엇보다 여기는 황궁이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 내 뒤를 캔다는 걸 직접 고한 건가요?”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제냐에 신관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보아하니, 스스로가 신관이라는 것에 꽤 자부심을 가지는 유형의 사람 같았다.

잔뜩 붉어진 얼굴로 씩씩거리던 신관은 다시 한번 그를 말리던 다른 신관들을 밀어내며 협박을 던졌다.

“이리 비협조적인 건 전하께도 좋지 않을 텐데요.”

“나를 이리 압박하는 것도 당신 앞날에는 좋지 않을 텐데요.”

만약 제냐가 정말 제레미야가 맞았다면, 이 신관의 앞날에 어둠이 드리운 건 사실이었다.

“…….”

그걸 모르지 않는지 신관이 입을 다물었다. 물론 그건 옆에 있는 신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냐는 여기에 쐐기를 박기로 했다.

“당신은 지금 당신에게 주어진 일에나 신경 써요. 감히 내 앞길을 막지 말고.”

차갑게 일갈한 제냐가 루미에르를 이끌고 자리를 벗어나려는데, 신관이 부득불 제냐를 붙들었다.

“네, 그럼 저는 제 일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 제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함께 계신 분의 얼굴을 봐야겠습니다.”

계산을 잘못했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이었다. 신관은 이대로 황녀에게 찍혀 미래를 잃느니 수상한 자를 끝까지 추궁하기로 한 것이다.

제냐가 정말 황녀라면 나락으로 떨어지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신관은 다시 우뚝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신관의 도박은 틀리지 않았다.

낭패한 기색을 숨긴 제냐가 신관을 돌아보자 그가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제게 주어진 일은 수상한 인물을 찾는 거니까요.”

네 말대로 내 역할을 하는 것이니 나를 막을 명분은 없다는 얼굴을 보며 제냐는 입 안의 살을 깨물었다.

“아무리 전하의 수족이라도 지금과 같은 꼴은 좀 그렇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할까, 고민하면서도 제냐는 신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눈싸움이 계속되고 있는데 얌전히 뒤로 물러나 있던 루미에르가 속삭였다.

“늦었어요.”

루미에르가 옆 골목을 눈짓했다.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기사로 추정되는 무리가 막 골목을 들어서고 있었다. 신관은 조금 전 무례를 빌미로 물릴 수 있었지만 기사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아직 제냐에게 무례를 범하지도 않았으며, 황제가 내린 명령을 황녀가 물릴 수도 없었다. 어떻게 되든 루미에르의 가면이 벗겨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안 되겠어요, 직접적으로 쫓기더라도 도망가는 게…….”

제냐가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속닥이는데, 루미에르가 제냐의 손을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그녀를 자신의 뒤로 물리며 앞으로 나서는 것이다.

‘설마.’

제냐는 위로 올라가는 루미에르의 손을 바라보며 그녀가 떠올린 가정을 부정했다. 급하게 루미에르의 옷깃을 잡아당기는데 그가 옅은 미소를 흘리며 손을 떼어 냈다.

그러고는 기어이 가면을 벗었다.

“제레미야에게 폐를 끼쳤네요.”

시커먼 먹물 같던 검은색이 물이 빠지듯 사라지고 찬란한 금발이 드러났다. 동시에 가면 아래 숨겨져 있던 얼굴이 드러나자,

“나예요.”

신전 인사들의 얼굴에 충격이 들어섰다. 황궁에 보내질 정도의 급이라면 루미에르의 얼굴을 알아보는 게 당연했다.

“…루, 루미에르 님?”

키가 큰 신관이 턱을 덜덜 떨었다.

“왜, 내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겠습니까?”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었지만 날이 선 듯한 루미에르의 반문에 굳어 있던 다른 신관들이 앞다투어 입을 열었다.

“살아 계셨군요!”

“맙소사, 어찌 이런 일이!”

신관들이 다급하게 다가오려고 했지만 루미에르가 손을 들어 그들의 접근을 막았다.

“인사보다는 사죄하는 게 좋겠네요. 굉장히 무례하고, 주제넘었으니까.”

루미에르가 다시 제냐를 돌아보며 손을 뻗었다. 얼결에 그 손을 맞잡자 루미에르가 미안함을 가득 담은 얼굴로 말했다.

“도움을 청한 건 제 쪽인데, 죄송합니다.”

루미에르가 손등에 입을 맞춰, 예를 갖추자,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신관들이 안절부절못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황녀 전하!”

이게 무슨 짓이냐고, 제냐가 손에 힘을 줬지만 루미에르는 맞춰 달라는 듯 눈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무슨…….”

“황궁 분들도 오시는군요. 이래저래 폐만 끼치네요.”

어느새 황궁 기사들까지 그들 곁으로 다가온 것을 알아차린 제냐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러는 사이 루미에르는 너무나도 쉽게 상황을 정리했다.

“몸을 회복하던 중에 헛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더군요. 그래서 제레미야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가까이 다가온 기사들에게 상황을 설명한 루미에르가 제레미야가 놀란 것 같으니 잠시 대화를 좀 했으면 좋겠다며 사람들을 물렸다. 대화할 여건이 되자마자 제냐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미쳤어요?”

“제냐, 이게 최선이에요.”

“하지만……!”

“점점 더 사람들이 몰리고 있어요.”

루미에르가 손을 들어 제냐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지지 않게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다행히 레라지에가 거의 다 왔습니다. 저기 왼쪽으로 쭉 가면 될 거예요.”

제냐가 발을 굴렀다.

“지금 그게 중요해요?”

“당신이 잡혀가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당신이 잡혀가잖아요!”

제냐가 주변의 눈치를 보며 외치자 루미에르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말없이 웃었다.

예쁘게 웃고 있지만 그 웃음이 가짜라는 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제냐가 루미에르의 손목을 붙들었다.

“신전이 싫잖아요.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고요.”

신전에 가는 게 좋지 않겠냐고 제안했던 것이 우스웠다. 제냐는 이런 식으로 루미에르가 돌아가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뭔가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요, 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정체를 밝힌 건 되돌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 신전으로 가는 건 어떻게든 막을 수 있지 않을까?

“나랑 따로 갈 곳이 있다고 한다든가, 아니면 침입자를 같이 찾자고…….”

정신없이 말을 뱉는데, 루미에르가 조금 더 가까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제냐.”

그러고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이쪽에서 눈을 떼지 않는 신전 사람들을 눈짓했다.

“불가능해요, 나를 또 놓칠까 봐 안달이 난 게 보이잖아요.”

걱정할 필요 없다고, 애교스럽게 웃은 루미에르가 더듬더듬 제냐의 손목을 매만졌다.

“지금 당장은 새로운 용사를 만드는 것보다 내가 있는 게 더 유리할 테니까. 괜찮을 거예요.”

제냐가 간질거리는 그 손을 잡아채며 콱 움켜쥐고 눈을 치켜세웠다.

“몸만 괜찮으면 다예요?”

“제냐도 내가 돌아가길 바랐잖아요.”

그 말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치사했다.

죄책감을 자극하면서 어떻게든 그녀를 돌려보내려는 루미에르의 속셈을 훤히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속셈을 알면서도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루미에르가 붙잡힌 손을 꼼지락거리며 쓴웃음을 흘렸다.

“그러니까 그냥 우리, 이렇게 해요. 당신은 붙잡히면 안 되잖아요.”

루미에르가 제냐의 손을 양손으로 감싸 얼굴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 기도하듯 그 손에 대고 말했다.

“황제가 당신을 어떻게 이용했는지 들었잖아요. 신전도 그와 다르지 않아요. 난 신전이 앞으로 당신을 어떻게 이용할지도 알 수 있어요.”

루미에르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당신이 나랑 같은 꼴이 되는 건 싫어요.”

그가 애원하는 것처럼 부탁했다.

“그러니, 이대로 날 두고 돌아가요.”

하, 입가로 바람이 샜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자기보다도 제냐를 더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의 등을 떠밀 수가 없었다.

루미에르에게 맥없이 끌려가던 손에 힘을 준 제냐가 그의 손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 힘에 끌려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루미에르의 얼굴을 매섭게 쳐다봤다.

“싫어요.”

루미에르가 눈을 크게 떴다. 제냐는 맑은 호수를 담은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두고 가는 건 싫다고요.”

동그래진 눈 안에 기쁨이 들어찼다. 곱게 휘어지는 눈매도, 반짝거리는 눈도, 둥글게 말려 올라가는 눈 밑 살도 예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안심을 한 것 같았다. 언제나 그랬듯 그가 져 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제냐의 착각이었다.

“미안해요.”

뭐가?

웃음에 빠져 있던 제냐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상황은 벌어진 뒤였다.

입술에 말랑한 촉감이 닿았다.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나려는데 귀밑과 목이 붙들렸다.

루미에르의 얼굴이 기울어지자 입술이 더 깊게 맞물렸다.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빨아 당기는 움직임에 혼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지금 이게 뭐지?’

촉촉한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몇 번이나 머금다가 빨아 당기길 반복했다. 그리고 겹쳐지던 입술에 기어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느낌의 물컹한 것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제냐는 어떤 반응도 하지 못했다.

처음 겪어 보는 일에 완전히 굳어서? 아니면 아직 입 안으로는 혀가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아니, 바로 눈앞에서 파르르 떨리고 있는 간절함과 떨림이 가득한 눈꺼풀 때문이었다.

제냐는 그렇게 도망가지도, 그렇다고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한 채, 눈만 깜빡이다가 그가 슬쩍 뒤로 물러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촉.

습한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지고 거친 엄지가 뭉근하게 아랫입술을 문질렀다.

“정말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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