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냐는 귀 옆에서 거세게 들려오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
“마법은 쓰지 마세요!”
들릴지 모르겠지만 일단 경고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옷이 거칠게 흔들리고 몸이 부딪치는 소리가 얼마나 반복됐을까?
이제 다 끝났나 싶어 슬그머니 눈을 뜬 제냐는 굉장히 어색한 상황을 목도했다.
‘때려 준다더니?’
바닥에 엉망으로 뒤엉킨 두 인형을 보며 제냐는 눈만 깜빡였다. 조금 전 여러 함정을 거치면서도 흐트러짐 없었던 그들의 머리카락과 옷이 잔뜩 헤집어져 있는 건 어떻게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자세가 좀.’
서로의 다리는 잔뜩 얽혀 있었고, 각자 팔목 한쪽을 꽉 붙들고 멀리 밀어낸 탓에 상체가 완전히 맞붙어 있었다. 거기에 더해 거칠게 내쉬고 있는 숨소리까지.
“으음.”
여기에 없는 누군가 보면 굉장히 좋아할 광경이었다. 귓가에 짝짝, 커다란 박수와 환호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제냐는 지극히 평범한 취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발동된 함정은 꽤 도움이 됐다.
언제 발동한 건지 알 수 없는 함정이 아니었다면, 그들의 주변에 반쯤 박살 난 채 뒹구는 흉기들이 없었다면 분위기는 정말 최악이었을 테다.
제냐는 멍하니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는 두 명에게 말했다.
“그, 일어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힐끗, 두 명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는 것 같더니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 엉망으로 엉킨 다리와 꽉 붙어 있던 상체, 그리고 서로의 몸에 휘감겨 있던 옷들이 무색하게 굉장히 빠른 움직임이었다.
훌쩍 자리에서 일어난 그들은 이제까지 볼 수 없던 속도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그러고는 냉큼 제냐의 옆으로 와 조금 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각자 손과 허리를 붙잡는 것이다.
제냐는 그녀의 양옆으로 다가와 고집스럽게 앞만 바라보고 있는 두 남자를 올려다봤다.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그 점을 지적하진 않았다.
이건 그녀의 정신 건강에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래, 그냥 넘어가자.’
조금만 더 이동하면 저 책을 손에 넣을 수 있을 테고, 마왕도 정신을 차린 것 같으니까.
“자, 그럼 마저 갈까요?”
두 남자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의 불상사가 더 일어날 뻔했지만 세 명은 무사히 유리관 앞에 도착했다.
제냐는 마왕을 쳐다봤다. 또 아까처럼 뭐에 홀린 듯 움직이면 진짜로 뒤통수라도 때릴 셈이었다. 다행히 마왕의 눈빛은 여전히 맑았다.
“이건 어떻게 꺼내는데요?”
타일 한 칸마다 자리한 함정들처럼 여기 유리관에도 뭔가 설치되어 있을 것 같았다.
“꺼낼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이제는 피할 수 없겠군.”
“네?”
제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마왕을 쳐다보는데 그가 루미에르를 바라봤다. 그리고 예고도 없이 유리관에 손을 올렸다.
파아앗-
그 뒤의 일은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났다. 뒤에서 튀어나온 손이 제냐를 잡아당겼다.
제냐는 그녀를 온몸으로 감싸는 루미에르의 품에 몸을 숨기고는 하얀빛이 넓게 퍼져 나가는 걸 멍하니 바라봤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않았다.
콰앙! 거센 돌풍이 불어닥치고 엄청난 충격이 제냐를 강타했다.
* * *
“제냐, 제냐.”
제냐는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흐린 시야 너머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는 루미에르가 보였다.
“루…, 아스?”
“루미에르로 괜찮습니다.”
제냐가 급하게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세우며 주변을 돌아봤다.
“어떻게 된 거죠?”
주변은 의식을 잃기 전과 다른 것이 없었다. 딱 하나, 마왕이 사라진 것만 제외한다면.
“설마, 혼자 도망갔어요?”
“제냐.”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는 손길에 손의 주인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루미에르가 눈을 감았다 뜨더니 말했다.
“마법에 휘말린 겁니다. 저번에 우리가 그랬듯이요.”
“어떻게 하죠?”
차라리 그녀를 버려두고 간 게 나았다. 마법에 휘말렸다니?
“지금 당장 마법을 풀 순 없습니다.”
“그럼요?”
“아마, 우리가 도와주지 않아도 풀고 나올 테죠.”
뒤에 생략된 말이 뭔지 알았다. 그는 마왕이니까.
제냐가 책이 있던 유리관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럼…….”
루미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책을 챙기세요. 사람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우리도 빠져나가야 합니다.”
그녀는 깨진 유리관 안에서 책을 챙겨 들었다. 이렇게 고생해서 얻게 된 만큼 보람이 있으면 좋으련만.
제냐는 하얀 가죽으로 만들어진 책의 단면을 쓸어 보다가 챙겨 온 마법 주머니에 책을 집어넣었다.
“됐어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허리 아래로, 손이 들어왔다. 허벅지를 받치고 훌쩍 그녀를 안아 든 루미에르 때문에 제냐의 눈이 동그래졌다.
“루미에르?”
훅, 뜬 몸에 얼떨결에 그의 목을 끌어안자 루미에르가 순식간에 회랑을 내달렸다.
“이게 더 빠릅니다.”
그 긴 회랑을 지나기 위해 셋이서 했던 생고생이 우스울 만큼 그들은 빠르게 계단이 있는 곳까지 도달했다.
계단을 오르는 것도 간단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루미에르가 당연하다는 듯 한 번에 몇 칸씩 계단을 올랐다.
‘이게 가능한 일이야?’
다 큰 성인 여성을 안고 계단을 오르면서 루미에르는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고 얼굴 역시 평온해 보였다.
“안 힘들어요?”
“제냐, 저는 당신을 매일 안고 다녀도 괜찮아요.”
괜찮냐는 물음에 얼토당토않은 답이 돌아왔다. 째려보듯 그를 바라보자 루미에르가 작게 미소를 흘렸다.
제냐는 평소보다 훨씬 더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하는 루미에르의 얼굴에 큼, 헛기침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5분도 걸리지 않아 마지막 계단을 올라왔다. 제냐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처음부터 안겨 내려갈 걸 그랬나 봐요.”
제냐가 푹 한숨을 쉬며 여전히 그녀를 들고 움직이는 루미에르에게 물었다.
“길이 다르지 않아요?”
처음 왔던 길과 전혀 다른 방향에 의아함을 표하자 루미에르가 답했다.
“맞습니다. 처음 왔던 길로 사람들이 오고 있습니다. 사람이 없는 곳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요?”
루미에르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궁을 지키는 인력이 많이 빠져나가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정예 인력은 전부 황족들을 보호하러 나갔으니까요.”
무사히 나갈 수 있다는 걸까, 아닌 걸까.
그를 닦달하고 싶었지만 안 그래도 이래저래 신경 쓸 게 많은 사람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다짐이 무색하게 루미에르가 천천히 자리에 멈춰 섰다.
제냐는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는 진지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눈을 휘었다. 왜 이러는지 알았으니까.
“괜찮아요.”
제냐의 미소를 보고도 한참을 머뭇거리던 루미에르는 천천히 그녀를 땅에 내려놓았다.
제냐는 가볍게 바닥에 내려서 옷차림을 다듬었다. 루미에르가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말했다.
“사람들이 들이닥칠 겁니다.”
더 이상 사람을 마주하는 걸 피할 수 없다면, 해야 하는 건 하나였다.
제냐는 화려한 드레스를 내려다보다가 당당하게 턱을 세웠다. 다시 제레미야가 되어야 했다.
제냐는 이제 그녀의 귀에도 들리는 사람들의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황녀 전하?”
제냐를 발견한 이들이 화들짝 놀라며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다행히 제냐와 루미에르에게 달려오는 건 기사나, 마법사, 신관이 아닌 사용인 무리였다.
평소 운이 나쁘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면 완전 최악은 아니다,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최대한 빠르게 처리하고 빠지자.’
제냐는 뒤에 있는 루미에르를 가리기 위해 앞으로 한 발 걸어 나왔다. 그리고 가까워지는 사용인들을 보며 눈매를 날카롭게 치떴다.
“무슨 소란이지?”
차가운 목소리에 소란스럽던 사용인들의 분위기도 빠르게 식어 내렸다.
* * *
황제와 황후, 그리고 황녀까지 모든 황족이 신전으로 향하고 그 뒤처리까지 마친 사용인들 사이에서 기쁨의 탄성이 튀어나왔다.
“최소 반나절은 걸리시겠지?”
“그렇지, 길면 한나절은 다 거기서 보내고 오실지도 모르지.”
“어휴, 우리도 이렇게 힘든데, 직접적으로 모시는 애들은 얼마나 힘들까?”
외궁 사용인으로써 평소 황족과 직접적으로 마주할 일이 없는 그들은 이번에 있던 신전 방문 일정으로 급하게 투입된 인력이었다.
어깨를 퉁퉁 두드리며 피로함을 토로하는 사용인의 말에 다른 이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니까 월급을 훨씬 많이 받지. 운 좋으면 준귀족 작위도 받는 거고.”
그들 같은 외궁 소속 사용인들과 달리 황족들을 직접 모시는 내궁 소속 사용인들은 앞날이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신 운이 나쁘면 완전히 바닥까지 떨어지잖아.”
뭐든지 짧고 굵은 것보다는 얇고 길게 가는 게 좋다고, 지금같이 혼란스러운 때에 운이 나빠 황궁에서 쫓겨나기라도 하면 그거야말로 손해가 막심하다는 누군가의 말에 사용인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지, 우리는 우리끼리 조용히 살면 되는 거야.”
“내궁 쪽 일은 우리가 신경 쓸 일도 아니고.”
사용인들이 저마다 외궁의 장점을 늘어놓는데,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화들짝 놀란 사용인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피자, 갑자기 한 무리의 기사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널리 퍼져 있던 사용인들이 기사의 눈치를 살피며 외궁 사용인의 총책임자 엠마의 뒤로 숨어들었다.
그러자 이제껏 뒤로 물러나 사용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 주고 있던 엠마가 앞으로 나섰다.
“무슨 일이신가요?”
“혹시 모르니까 얼른 숙소로 돌아가.”
“네?”
기사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침입자가 나타났다. 여기 있는 건 위험해.”
“침입자요?”
“그래, 아직 수가 얼마나 되는지, 그게 진짜인지도 확실하진 않지만 혹시 모르니까 숙소로 가 있어.”
이야기를 전하자마자 기사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기사가 사라지자 겁에 질린 사용인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엠마가 얼른 그들을 다독였다.
“조용. 여긴 황궁이야. 아무 일 없을 거다.”
엠마가 사용인들의 눈을 하나하나 마주 보며 말했다.
“다들 나를 따라 최대한 조용히 움직이자.”
“네, 네!”
엠마는 사용인들을 이끌고 길을 나섰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쉽게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지 뒤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속도를 늦추거나 달래 줄 여유는 없었다.
그 뒤로도 일행은 흉흉한 얼굴의 기사와 병사, 마법사들을 몇 번이나 지나쳤다.
그렇게 심장을 졸이며 얼마나 이동했을까? 간신히 내궁을 벗어나려던 엠마가 한 존재를 발견했다.
“황녀 전하?”
제레미야가 귀족 영애이던 시절, 두 손으로 직접 그녀를 키웠던 엠마가 다급하게 그녀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