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조용히 하려고 해도 발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터벅, 터벅 퍼지는 발소리는 벽을 타고 사방으로 뻗어 가 귀가 웅웅거렸다.
거기에 더해 계단은 또 얼마나 뱅글뱅글 돌려놨는지,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토할 것 같아.’
제자리에서 비틀거리던 제냐는 다시 한번 둘의 도움을 받아 자세를 바로 했다.
제냐는 감사 인사도 하지 않고 몸에 힘을 줬다. 처음에나 놀랐지, 같은 일이 몇 차례 반복되자 이제 세 명 모두 대수롭지 않게 상황을 넘기고 있었다.
루미에르는 이제 대놓고 등허리를 붙잡아 그녀를 지탱했고, 마왕도 처음보다 더 강하게 제냐의 손을 붙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더 걸어갔을까? 마왕이 자리에 멈춰 섰다.
마왕에게 부딪칠 뻔했던 그녀는 허리를 단단히 잡는 손길에 무사히 자리에 멈췄다. 은근슬쩍 더 가까이 붙어 오려는 루미에르를 쭉 밀어낸 제냐가 몸을 바로 세우고 발꿈치를 들었다.
‘맘 같아서는 쓸데없이 큰 마왕의 어깨를 눌러 버리고 싶지만.’
마왕의 어깨 너머로 길게 늘어진 회랑이 보였다. 은은하게 켜 놓은 촛불 덕에 구조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회랑의 양쪽으로 그림 같은 것들이 쭉 걸려 있었는데, 회랑의 가장 끝자락에는 유리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어깨 너머 지하의 모습을 살핀 제냐가 물었다.
“제대로 온 게 맞는 것 같으세요?”
마왕이 흠칫 놀라며 귀를 막았다. 자세가 자세인 탓에 귀가 간지러웠던 모양이었다. 제냐는 그녀를 돌아보는 마왕에 어깨를 으쓱였다.
할 말 많은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던 마왕이 짙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그래.”
“정확히 뭘 찾으러 오신 건데요?”
여기서 물건이라고 해 봐야 있는 건 그림이랑 저기 유리관 안에 있는 정체 모를 것뿐이었다.
‘어디 비밀 장소 같은 게 더 있을 수도.’
제냐가 눈을 가늘게 뜨는데 마왕이 손을 뻗어 유리관을 가리켰다.
“저거.”
“저 안에 뭐가 있는데요?”
마왕은 아무 말 없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직 손을 놓은 게 아니라 제냐와 루미에르가 줄줄이 마왕을 따라 이동했다.
그렇게 마지막 계단을 내려간 제냐가 이제 슬슬 마왕의 손을 놓고 루미에르의 손도 치워야 하는 건 아닐까 고민을 하는데 마왕이 귀찮음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역시나, 함정이 있군.”
제냐가 번쩍 고개를 들어 다시 주변을 살폈다.
“함정이요?”
하지만 말을 듣고 나서도 특별한 것이 보이지는 않았다. 제냐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옆에서 루미에르가 말했다.
“그리 대단한 건 아니에요.”
‘대단한 것’의 기준이 의심됐지만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할 정도면 그리 어렵진 않을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마왕이 제냐를 돌아봤다.
“마법을 쓸 줄 모르지?”
그걸 질문이라고? 너무 당연한 질문이어서 어이가 없었다. 제냐가 냉큼 고개를 끄덕이자 마왕이 눈을 내리감았다. 그 얼굴이 지독히도 피곤해 보였다.
루미에르는 그리 대단한 게 아니라는데 왜 혼자 저렇게 심각할까?
마왕이 다시 눈을 뜨더니 이번에는 루미에르에게 물었다.
“너도?”
“…….”
제냐는 침묵하는 루미에르를 돌아봤다. 가만히 마왕을 쳐다보던 루미에르가 제냐의 시선을 느끼고는 답했다.
“배운 적 없다.”
“그러면 나만 조심하면 되는 건가.”
이해 못 할 소리를 더 이상 참지 못한 제냐가 물었다.
“자세히 설명해 주실래요?”
마왕이 기나긴 회랑의 복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들키지 않으려면 함정을 넘어가는 동안 마법을 쓰면 안 되니까.”
“어려운가요?”
“어렵지는 않아. 다만, 나도 모르게 마법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하긴 숨 쉬듯이 자유자재로 마법을 쓰는 마왕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제냐가 손을 번쩍 들며 물었다.
“마법 쓰실 것 같으면 때려 드릴까요?”
마왕이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봤지만 제냐는 생긋 웃으며 말을 덧붙일 뿐이었다.
“제힘으로 부족할 것 같으면 아스에게 부탁할게요.”
그러자 마왕이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사심이 굉장히 많이 들어간 것 같군.”
제냐가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통찰력이 대단하세요.”
마왕이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영양가 없는, 농담 같은 진심을 말하던 제냐가 붙잡힌 손을 덜렁덜렁 흔들었다.
“그래서 이 손은 언제까지 잡고 있나요?”
“아까 말한 것처럼 마법을 쓸 것 같으면 말려.”
“…때리라고요?”
제냐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마왕을 쳐다보자 그가 피식 웃었다.
“가능하면.”
그 가소롭다는 웃음에 제냐가 얼른 루미에르를 휙 돌아봤다. 대신 때려 달라는 눈빛에 그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 모습을 죄다 지켜보고 있던 마왕이 헛웃음을 흘렸다.
“너무 대놓고 하는 작당 모의 아닌가?”
제냐가 뻔뻔하게 굴었다.
“그러게 누가 레라지에 님을 따로 떨어트려 놓으래요?”
마왕이 말이 아깝다는 듯 입을 다물고는 다시 회랑의 끝을 바라봤다.
마왕과 용사가 함께하고 있는데 분위기는 평화로웠다. 아마 마왕이나 루미에르가 상대를 공격할 생각이 없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마왕의 손에 이끌려 앞으로 발을 내디디며 제냐는 이 분위기가 끝까지 유지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언제나 바람은 바람일 뿐이었다.
제냐는 한 발 옮기기가 무섭게 발동되는 함정에 한숨이 나왔다. 솔직히 마왕이나 루미에르 정도의 실력이면 이런 함정 정도는 눈감고도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그 두 명이 나를 붙잡고 움직인다는 거지.’
푹 꺼지는 발밑에 심장이 발끝까지 처박히는 느낌을 경험한 제냐는 그 놀람을 미처 갈무리하기도 전, 허리를 감싼 루미에르에 의해 뒤로 훌쩍 물러났다.
아니, 물러나려 했다. 마왕이 옆으로 물러나면서 제냐를 붙든 손을 꽉 잡아끌지 않았다면.
덕분에 어디로도 가지 못한 세 명은 지금 실시간으로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중이었다.
제냐는 어정쩡하게 허공에 몸이 뜬 1초간 생각했다.
‘둘 중 하나가 내 몸에서 손을 떼면 되지 않나?’
왜 둘 다 계속 붙잡고 있어서 일을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지?
마왕과 루미에르는 장단이 더럽게 안 맞았다.
‘어떤 의미로는 장단이 잘 맞는다고 해야 하나?’
허공에 붕 뜬 마왕과 루미에르의 눈이 부딪치고 그들은 눈으로 많은 대화를 나눴다.
짧은 틈 사이 제냐를 한 번 내려다보고 자기들끼리 결론을 지었는지 마왕이 물러나려던 옆으로 몸을 옮겼다.
구멍으로 반쯤 떨어진 것이 우습게 번갈아 가며 벽을 박차 착착착, 하고 위로 올라오는 진기명기를 보며 제냐는 열 번째로 한숨을 쉬었다.
“대단하시네요.”
한 번도 처음부터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도 대단했고, 그렇게 충돌이 일어나고 나면 그 짧은 사이에 눈빛으로 의사소통하는 것도 대단했다.
그 사이에서 짐짝처럼 이동되고 있는 제냐는 우스웠고.
마왕과 루미에르는 조금 전 시선을 교환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서로를 외면하며 다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앞으로 이동하는 건 아니고, 뭔가를 느끼고 갈 방향을 정하는 것 같은데 몇 차례 함정으로 피곤해진 제냐는 이제 질문을 할 힘도 없었다.
“여기 앞은 마법으로 만들어진 함정밖에 없군.”
마왕의 말에 쭉 주변을 살핀 루미에르가 대꾸했다.
“벽을 밟고 지나가는 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제냐가 헛소리를 들었다는 얼굴로 루미에르를 쳐다봤지만 마왕은 흠,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아.”
그러고는 제냐를 붙들고 오른쪽 벽으로 몸을 트는 것이다. 정말로 지금 벽을 타겠다는 건가?
어떻게?
의문을 품기가 무섭게 루미에르가 제냐를 붙든 손에 힘을 줬다. 제냐는 또 불쑥 들리는 몸뚱이에 루미에르를 쳐다봤다.
하지만 답을 듣기 전, 마왕에게 잡힌 손에 의해 앞으로 끌려가고, 제냐는 루미에르와 마왕에게 붙들려 벽을 탔다.
그러니까 정말 말 그대로, 둥글게 포물선을 그리고 직각으로 놓인 벽을 타다다닥 달리다 다시 바닥으로 훌쩍 떨어져 내렸다.
‘마법이 아닌데 이런 게 가능하다고?’
상식이 붕괴되는 와중에도 두 명은 천장에서 쏟아지는 날카로운 창들을 손으로 대충 쳐 내어 옆으로 날렸다.
휘익-!
지루한 낯으로 창을 쳐 내던 마왕이 루미에르가 그의 얼굴로 쳐 낸 창을 고개만 돌려 가볍게 피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창을 발로 차 루미에르에게 날렸다.
루미에르가 마왕 못지않게 정적인 동작으로 고개를 뒤로 젖히며 공격을 피해 냈다.
제냐는 이제 저것도 놀랍지 않았다. 서로 협력이라는 걸 하면서도 루미에르와 마왕은 이렇게 종종 상대를 향해 함정들을 날리곤 했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화를 내기도 싫었다.
‘적당히 좀 하지.’
제냐는 그 뒤로도 자기들끼리 시선을 교환하는 두 남자에게 몸을 맡기고는 축 늘어져 다리만 달랑달랑 흔들어 댔다. 때문에 드디어 유리관 안에 있는 물건이 뭔지 식별할 수 있는 거리까지 다다랐을 때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책?”
기쁨이 오래가진 않았지만.
제냐는 눈을 잔뜩 찌푸렸다. 그러니까 지금 저기 유리관 안에 고이 보관되어 있는 건 제목도 제대로 적혀 있지 않은 하나로 묶여 있는 책이었다.
“지금 저거 가지러 오신 거예요?”
얼마나 대단한 건지 궁금했는데 그게 책이라고?
저 책에 엄청난 내용이 적혀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고생해서 얻는 게 고작 책 한 권이라니.
제냐가 눈을 좁히며 마왕을 쳐다봤다.
다음에는 어디로 이동해야 할지 주변을 살피느라 시야가 한껏 좁아졌던 마왕이 책을 발견한 것도 그때였다. 제냐는 홀린 것처럼 유리관 안을 응시하는 마왕을 불렀다.
“폐하?”
마왕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저렇게 넋을 놓고 보는 걸 보면 정말 저걸 찾으러 온 게 맞는 것 같은데.
‘도대체 저게 뭔데?’
제냐가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책을 돌아보려는데, 순간 마왕에게 붙잡힌 손이 작게 흔들렸다. 또 이동하자는 건가 싶어 고개를 들었던 제냐가 다급하게 마왕의 팔을 잡아당겼다.
“폐하!”
하지만 제냐의 보잘것없는 힘으로는 마왕을 저지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제냐의 곁에는 루미에르가 있었다. 루미에르는 마왕에게 끌려가듯 앞으로 당겨지는 제냐의 몸을 잡아끌며 마왕의 손을 콱 움켜쥐고 비틀었다.
우드득.
제냐를 붙잡던 마왕의 손이 풀려나가고, 동시에 마왕의 반대 손이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콰악! 퍽!
그 공격을 막아 낸 루미에르가 제냐의 귓가에 속삭였다.
“잘됐네요, 제냐. 한 대 때려 줄게요.”
그것참 기쁜 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