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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62)화 (6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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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예상하던 질문 중 하나였다. 제냐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웃은 것 같지도 않게 입꼬리를 올렸다.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하시더군요.”

미리 준비한 답과는 달랐지만 조금 전 백작이 하는 걸 보고 즉흥적으로 답을 바꿨다. 보아하니 황궁에서는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보다는 최대한 말을 아끼는 게 더 잘 먹힐 것 같았다.

황녀에게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말할 수 있는 이는 얼마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 명령의 주체는 황제였다.

“아.”

그리고 상황에 맞춰 바꾼 방법은 아주 잘 먹혔다. 기사들의 얼굴에 호기심은 있을지언정 의심은 떠오르지 않았다. 기사들이 루미에르와 마왕을 쳐다봤다.

“저분들은…….”

“나도 잘 몰라요. 그냥 따를 뿐이죠.”

처음의 답과 다르지 않은 이번 답도 훌륭한 방패가 되어 주었다. 제냐는 그들이 다시 입을 열기 전 발을 내디뎠다.

“그럼.”

다행히 기사들은 일행을 붙잡지 않았다. 제냐는 긴 복도 끝을 전부 다 지나고 나서야 마왕을 쳐다봤다. 마왕이 다시 앞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조금 더 서두르지. 그러면 부딪치지 않을 것 같군.”

서두른 보람이 있는지 그들은 그 뒤로 다른 이들과 부딪치지 않고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지하로 향하는 계단 앞. 비좁고 가파른 계단을 보며 제냐가 숨을 골랐다. 구두가 편해서 발이 아프진 않았지만 급하게 움직인 탓에 숨이 찼다.

“후우, 여기로 가나요?”

“그래.”

마왕이 제냐를 스치듯 쳐다보더니 먼저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숨을 고르는 걸 기다려 줄 거라는 기대가 없었기에 아무렇지 않게 그 뒤를 따를 생각이었다.

한 계단 아래로 발을 내미는데, 앞에서 붙잡으라는 것처럼 손이 내밀어졌다. 동시에 슬그머니 옆구리를 파고드는 손까지.

제냐는 어리둥절해졌다.

‘응?’

루미에르야 그렇다 치지만 마왕이 도와주겠다고 손을 내밀다니?

“안 잡나?”

하지만 제냐는 숨겨진 의도를 찾으려 애쓰거나 시간을 끌지 않고 그녀에게 뻗어진 손을 붙들었다.

루미에르의 손과 달리 굳은살 하나 없는 부드러운 손이 제냐의 손을 아무렇지 않게 붙잡았다.

차갑지 않은, 따뜻한 손을 의식적으로 무시하며 제냐는 계단을 살폈다.

아무리 편하다고 해도 구두는 어색했다. 계단을 내려가다가 굴러떨어지기라도 하면 손해를 보는 건 그녀였다.

‘그냥 다치는 정도로 안 끝나겠지.’

유치하기 짝이 없는 마왕의 성격에 지금 손을 거절하면 굴러떨어지는 그녀를 붙들어 주지도 않을 것이다.

‘따라서 손을 잡는 건 합리적이야.’

그렇게 제냐는 매우 어색하게도 마왕의 손을 붙잡고 뒤로는 용사의 받침을 받은 채 긴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제레미야는 핑 도는 머리에 잠시 자리에 멈춰서 심호흡을 했다. 몸 상태가 안 좋은 건지 조금만 움직여도 눈앞이 시커멓게 변하는 일이 계속됐다.

“괜찮으세요, 전하?”

“그래.”

하필 아파도 오늘 같은 날이라니, 제레미야는 거울 속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을 바라봤다.

‘아니, 어쩌면 오늘 같은 날 아픈 게 다행일지도.’

새로운 약혼자를 만들겠다며 장단을 맞출 것을 요구하던 아버지는 참 행동이 빨랐다.

본래도 여론 선동을 잘하던 아버지였으니 당연한 거였지만, 수도에 순식간에 용사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퍼져 나갔다.

소문이 돌자마자 엄청난 양의 편지가 제레미야에게 쏟아졌다. 황제의 명에 따라 한동안 두문불출했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소문이 퍼지고 첫 공식 행사였다.

‘고작 며칠 굶은 걸로는 상심한 티가 나지 않았을 테니, 아픈 건 잘된 일이지.’

아버지에게 따로 언질을 받은 건지, 아무리 아파도 어떡해서든 그걸 숨기던 사용인들이 오늘만큼은 가녀리고 병약한 느낌이 물씬 풍기게 화장을 마무리했다.

비웃음이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제레미야는 건조하게 눈만 깜빡였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아버지에게 고해바치는 것들이었다.

제레미야는 표정 하나 없이 사용인들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그런 스스로의 모습이 꼭 어린 귀족 영애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과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았다.

“흐.”

툭 튀어나온 생각 덕에 입가로 웃음이 삐져나왔다. 사용인들의 시선이 날카롭게 얼굴에 닿는 걸 느끼며 제레미야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어지럽구나, 약을 가져와.”

웃음을 신음 정도로 무마하자 창백하고 힘없는 얼굴을 한참 바라보던 사용인이 약을 가져왔다. 약을 물도 없이 삼키며 제레미야가 하얀 레이스 장갑을 꼈다.

“황후 폐하께서 준비는 끝나셨다니?”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시다고 합니다.”

조금은 아닐 것이다. 어머니는 약속 시간을 제대로 지키는 경우가 없었다. 설령 그게 공식 행사일지라도.

“아버지는?”

“황후 폐하에게 맞추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제레미야에게는 언제나 최고를 요구하던 아버지는 어머니에게는 관대한 편이었다.

물론 그건 사랑이라는 간질거리는 감정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가 있어야 그 자신의 위치가 탄탄해지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황제가 된 모든 정당성은 어머니로부터 나왔으니까.

제레미야가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꾹 누르며 방을 나섰다.

“어머니 궁으로 가자.”

방 안에 있으면 침대에 누워 있고 싶어질 테고, 그러면 완벽히 꾸며 놓은 차림이 흐트러질 것이다.

하지만 방을 나선 건 딱히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이른 아침의 공기는 차가웠고, 안 그래도 으슬으슬하던 몸이 뼈까지 어는 느낌이었다.

거기에 더해 불청객까지.

‘이놈은 또 뭐야?’

제레미야는 습관 같은 미소를 띠고 예의 없이 그녀의 앞을 막아선 귀족을 바라봤다.

“황녀 전하, 이른 아침부터 아름다운 얼굴을 뵐 수 있다니 참 즐거운 일입니다.”

백작 가문의 자제든가, 후작 가문의 자제든가.

낭패였다. 상태가 안 좋긴 한 모양인지, 남자를 보는 순간 바로 떠올라야 할 가문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속내와 달리 제레미야는 자연스레 말을 건넸다.

“황궁에는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이십니까?”

“제가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들었지 뭡니까?”

사내가 눈썹을 한껏 늘어트린 채, 전혀 슬프지 않은 얼굴로 시끄럽게 말을 했다.

“약혼자분께 일어난 안타까운 일 말입니다.”

무례하게 그녀의 앞을 가로막을 때부터 대충 사내가 하려던 말을 짐작하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걸 입으로 들으니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 용사가 죽었으니 줄이라도 대보고 싶고, 조금 더 욕심내 새로운 약혼자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거다.

‘어이가 없네.’

오래 상대하고 있을 필요가 없는 이였다. 제레미야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한참을 쳐다보자 억지웃음을 짓는 것처럼 우스꽝스럽던 사내의 표정도 점차 딱딱하게 굳어 갔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그녀의 반응에 당황한 모양새였다.

“황녀 전하?”

“제가 상심이 큽니다.”

제레미야의 대꾸에 사내가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그러니…….”

제레미야가 말을 잘라 냈다.

“그래서 추한 꼴을 보이기 전, 이만 헤어질까 하는데요.”

“그렇지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제레미야는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마침 몸도 아프고, 뒤에 장단을 맞춰 줄 사용인들도 한가득하다. 그러니까 아픈 척을 하면 사용인들이 나서서 사내를 치워 낼 것이다.

최대한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부드럽게 상황을 넘길 방법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왜 그녀만 상대의 기분을 신경 써 줘야 한단 말인가? 저 모자란 놈이 사내놈이라서? 웃기지도 않았다.

“그만.”

혹여나 제레미야가 떠나갈까 계속 이야기를 잇던 사내가 귀를 의심하는 얼굴을 했다. 제레미야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걸 알려 주듯 다시 말했다.

“그만하세요.”

“…황녀 전하?”

“불편합니다.”

직설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건 귀족답지 않은 화법이었다. 하지만 제레미야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소식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저 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제레미야는 그 뒤에 이어질 말도 미리 차단하기로 했다.

“남들과 이 감정을 나눌 생각도 없어요.”

힘들 당신을 위로해 준다거나, 친구가 되어 준다는 말 따위는 꺼내지도 말라는 경고였다.

“더군다나 오늘같이 신전에 가야 하는 날은 더더욱요. 그러니 이만하세요.”

적당히 하고 꺼지라는 말까지 뱉어 내고 나자 속이 후련했다. 제레미야는 사내의 답을 듣지도 않고 그를 스쳐 지나갔다.

“어머니께서 저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실례하죠.”

어버버거리며 제레미야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사내는 그들의 사이가 꽤 멀어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것처럼 악을 질렀다.

등 뒤로 사용인들의 시선이 따끔따끔하게 박혔다.

‘이르라지.’

행동에 후회가 전혀 안 됐고 속이 시원했다.

용사를 처리할 거라는 아버지의 말을 들은 이후, 사실 제레미야는 계속 지금처럼 불안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약혼이라는 관계에 묶여 있을 뿐 아무런 친분도 없는 사내였는데, 제대로 만나 인사를 한 건 손에 꼽았는데 그것도 아는 사람이라고 그런 건지.

‘그냥 그 귀찮은 약혼을 또 해야 하는 게 짜증 나는 걸지도.’

제레미야가 황후궁 앞을 지키던 기사들을 지나칠 때쯤, 그녀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황후궁의 사용인들이 서둘러 달려왔다.

“황녀 전하.”

제레미야는 그들이 변명을 하기 전 말을 끊었다.

“아직 준비되지 않으셨겠지.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마.”

“감사합니다.”

제레미야는 그녀가 데려온 사용인들을 전부 응접실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감시하는 이 없는 공간에서 제멋대로 얼굴을 구겼다.

정말 기분이 너무 나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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