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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60)화 (6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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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모자를 벗으면서도 어쩌면 아무런 반응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다행스럽게도 제냐의 얼굴을 눈에 담는 순간, 백작의 밀랍 같던 얼굴이 깨져 나갔다.

“…아스트리아 공주님?”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차려 주다니. 예상보다 효과가 좋았다. 옅은 미소를 흘린 제냐가 생긋 웃었다.

“다시 인사할까요, 공작?”

* * *

제냐의 정체를 밝힌 후, 상황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로브를 벗기 전과 후, 그래논 백작의 태도가 너무나 달라서 오히려 제냐가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딱히 제대로 된 설명을 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백작은 일행들과 함께 황궁에 들어가게 해 달라는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의심스러운데.’

제냐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백작을 바라봤다. 바로 오늘, 황족들이 자리를 비운 틈이 좋겠다고 수상쩍기 짝이 없는 말을 하는데도 백작은 그렇게 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제냐의 일행이 어째서 황궁에 들어가는지, 왜 하필 황족들이 자리를 비운 틈이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남았던 건지 등, 꼭 물어봐야 할 것 중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제냐는 차를 홀짝거리고 있는 그래논 백작을 빤히 바라봤다.

“아무것도 안 물으세요?”

떠보듯 건네진 물음에 백작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뭘 말입니까?”

“이유를 묻는다던가, 무슨 생각인지 같은 거 말이에요.”

그러자 백작이 인자한 웃음을 흘렸다.

“거짓말을 하시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묻지 않겠습니다.”

“…수상한 걸 아는데 들여보내 주시겠다고요?”

기이한 것을 보듯 백작을 쳐다봤지만 그는 여전히 평온했다.

“네.”

“왜요?”

직설적인 어법이 신기했던 걸까? 백작이 놀란 듯 눈을 깜빡이다가 작게 웃었다.

“오랜만에 뵌 것이 반가웠다고 해 두죠.”

그러나 여전히 백작의 답은 이해할 수 없었다. 오래전 인연 때문에 자기 안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일을 그냥 넘어가 주겠다니.

“제국에 완전히 기반을 잡았다고 들었는데요.”

“그리됐습니다.”

“그런데 옛 인연에 이리 연연하신다고요?”

제국에 뿌리를 내려, 다른 왕국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붙었음에도 황제의 신임을 받는 인물이라는 걸 알았다.

도움을 받는 쪽에서 되레 의심하는 게 우스웠지만 그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 한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

백작이 다리를 꼬며 말했다.

“제2의 고향이 제1의 고향을 이길 순 없는 법이죠. 무엇보다…….”

자세가 바뀌는 순간 분위기가 일변했다. 잠시 허공을 바라보던 백작이 이제까지와 전혀 다른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제국에 충성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꾸며 낸 것일까, 아니면 진심인 걸까. 제냐가 백작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제국의 백작이 할 말은 아니네요.”

백작이 그건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돌연 제냐의 일행을 돌아보며 말하는 것이다.

“신전 분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죠.”

루미에르의 존재를 자연스레 넘겨 버린 제냐는 그가 바로 신전을 떠올린 이유를 생각해 봤다.

제냐가 마지막으로 있던 곳이 신전이어서? 황실 쪽에서 용사가 죽었다는 소문을 냈기 때문에? 아니면 그녀가 모르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나?

바쁘게 머리를 굴리는데 백작이 다시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다면 더욱 문제는 없군요.”

제냐가 따지듯 말했다.

“신전이라면 문제가 있다는 소리 같은데요.”

제국의 귀족이 대놓고 신전에 부정적인 말을 하다니. 하지만 백작은 제냐의 지적을 부정하지 않았다.

“옳게 들으셨습니다.”

제냐는 기억을 더듬었다.

“신전에 대한 믿음이 깊으셨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부모님이 그렇듯 그 역시 신전에 우호적인 귀족이었다. 기부금을 좀 내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을 존경했다.

하지만 백작은 그 말에 혀를 찰 뿐이었다.

“역시 아무것도 모르시는군요.”

어조가 묘했다. 설마 지금 탐색당하고 있던 건 그녀였던 걸까?

“공주님의 외삼촌 되시는 분은 황제가 되기 전부터 성녀와 손을 잡았습니다.”

갑자기 시작되는 이야기에 제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백작을 쳐다봤다.

“성녀는 교황을 찍어 누르고 싶어 했고, 그분은 황제가 되길 바랐죠.”

백작이 그냥 들으라는 듯 손을 들어 입을 열려는 제냐를 막고 말을 이었다.

“아비에 왕국의 몰락 이후, 실제로 두 사람은 뜻하는 바를 이뤘습니다.”

엇비슷한 이야기를 루미에르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아비에 왕국이 마족에게 당한 것을 이용해 황제가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다고.

“이게 단순히 우연일까요?”

의미심장한 목소리와 표정, 그리고 확연하게 드러나는 적의.

“황제는 왕국이 몰락하자마자 왕국의 인사들에게 빠르게 손을 뻗었습니다.”

날 선 웃음을 흘린 백작이 당시의 상황을 하나하나 나열했다.

“아비에 왕국은 무역 대국이었죠. 왕국 밖에 재산이 있는 귀족들은 차고 넘쳤습니다. 물론 그건 왕족들도 마찬가지였죠. 그리고 그 부의 70% 이상이 황제에게 귀속됐습니다.”

백작이 손에 턱을 괬다.

“아비에 왕국의 살아남은 이들은 대부분 제국으로 향했고, 막강한 부를 자랑하던 왕실의 자산도 공주님의 죽음 이후 황제의 개인 자산에 포함됐으니까요.”

물 흘러가듯 막힘없이 쏟아지는 말을 받아들이기 벅찼다.

“황제는 완전히 망가져 버린 동생 가족의 비극을 세상천지에 널리 알렸습니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마족에게 가족을 잃은 수많은 이들의 지지를 샀습니다.”

서늘한 눈이 제냐를 쳐다봤다.

“덕분에 그는 아주 빠르게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그의 지지를 받은 성녀 역시 신전을 완벽하게 장악했습니다. 서로가 윈윈인 셈이었죠.”

그 눈은 너는 이걸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고 있었다. 아득, 이를 악문 제냐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시는 건가요?”

백작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당당한 모습에 반발심이 치솟았다. 갑자기 이딴 이야기를 하면, 아무런 검증 없이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한 걸까?

하지만 백작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황제는 어머님이신 왕비 전하께 자신을 지지해 줄 것을, 여러 차례 부탁했습니다.”

백작의 입을 막고 싶었다.

“하지만 왕비 전하께서는 왕국이 제국의 정치 상황에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동시에 제냐는 그의 이야기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운이 나빠 싸움에서 패배하게 되면, 유일한 후계자인 따님이 피해를 입을까 걱정하셨죠.”

그런 제냐를 알아차린 것처럼 백작이 옅은 미소를 흘렸다.

“전하께서도 그런 왕비 전하의 뜻에 동의하셨고요.”

다리를 꼬고 턱을 괴던 자세를 바로 한 백작이 똑바로 허리를 세우고 말했다.

“정확하게 세 번째 청을 거절하고 한 달이 지난 뒤, 마족이 왕국을 침공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아까와 똑같은 질문을 했다.

“이 모든 것들을 우연이라 보십니까?”

그러니까 지금 이 백작의 말은, 정말 말이 안 되지만, 황제와 신전이 아비에 왕국의 멸망에 관여했다는 거였다.

“…말이 안 돼요. 그게 우연이 아니게 되려면 신전과 제국이 마족의 행동을 예측해야 했다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게 가능하려면 한 가지가 전제되어야 했다. 제냐가 날카롭게 눈을 치뜨며 물었다.

“그 두 세력과 마족이 결탁이라도 했다고 말하고 싶으신 건가요?”

지금 당장 고개를 돌려 마왕과 루미에르를 쳐다보고 싶었다. 하지만 제냐는 마지막 남은 인내를 끌어모아 열리는 백작의 입술만을 바라봤다.

“저도 처음에는 그걸 의심했습니다. 하지만 권력의 중추에 깊숙이 들어와 보니 알겠더군요.”

그리고 그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제냐의 인내가 끊어졌다.

“마족들이 무언가를 찾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찾으러 인간계로 온 자신들의 상황이 떠오르는 건 무리가 아니었다. 제냐가 홱 고개를 돌려 마왕을 쳐다봤다.

“그리고 신전과 제국 황실은 그 물건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는 마왕에게 묻고 싶었다.

지금 저게 다 맞는 소리냐고. 이번에 우리가 이곳에 온 게 지금 저 사람이 한 말과 연관이 되어 있냐고.

마왕의 얼굴을 전부 가린 저 로브를 잡아채고 싶었다.

그녀의 손이 금방이라도 앞으로 뻗어질 듯 꿈틀거리는데, 백작이 제냐의 시선이 닿은 이를 곁눈질했다. 그러고는 이번에는 정확히 마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게 정확히 무슨 물건인지는 저도 모릅니다. 다만, 옆에 계시는 분들은 알 것 같군요.”

지금 뭐라는 거야?

바늘이 머리를 마구 찌르는 것만 같았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백작의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 있는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제냐가 천천히 백작을 돌아봤다. 표정 관리를 전혀 하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백작이 역시 그랬다고 고개를 끄덕이진 않았을 테니까.

“마족이 쓰는 마력과 인간이 쓰는 마나는 미묘하게 다르다는 학회의 연구가 있습니다. 긴가민가했는데 실제로도 그런 것 같군요.”

지금 방을 감싸고 있는 건 마나와는 살짝 다르다고 말한 백작은 폭탄선언을 해 놓고도 태연했다.

“황궁을 감싼 보호 마법 정도는 아무렇지 않을 텐데, 굳이 저를 찾아온 건 조용히 움직이겠다는 뜻이고요.”

황궁을 감싼 보호 마법으로 인해 허락받지 않은 이는 황궁에 들어갈 수 없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정확히는 들어갈 수 없는 게 아니라, 황실 마법사들이 침입자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거지만.’

더군다나 황궁에는 신전에서 보내 준 신관들까지 상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전과 황실을 경계하는 일행은, 아니, 인간들의 피해를 줄이고 싶은 제냐는 그들을 조용히 성안으로 들여보내 줄 인물이 필요했다.

“무언가를 찾으러 오셨거나, 그와 관련된 뭔가를 하러 오신 거겠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찾아올 사람을 잘못 선택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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