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른 가 버리라고 억지로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던 제냐는 문이 닫히자마자 비틀거렸다.
옆에서 그녀를 유심히 살피고 있던 루미에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연스레 제냐를 붙들었다. 루미에르의 부축을 받아 침대로 향하던 제냐가 스스로의 꼴을 자각하며 자리에 멈춰 섰다.
“왜요?”
“옷, 구겨지면 안 되는데. 화장도 지워야 하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제냐의 눈빛은 간절하게 침대를 그리고 있었다. 루미에르가 그 표정을 보고 장난스레 웃었다.
“그냥 이대로 자고 일어나면 내일 굳이 다시 이 짓을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반나절 이상 레라지에에게 붙잡혀 있다가 결국에는 제일 처음 입어 본 드레스를 선택해 완전히 해탈해 버린 제냐가 그 말에 질색했다.
“그걸 말이라고 해요?”
입고 자는 순간 옷이 구겨지고, 화장을 하고 자면 피부가 상하고, 베개에 화장품이 다 묻을 거다. 문제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냥 자 버리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거지만.
하지만 생각대로 행동할 수는 없었기에 제냐가 비척대며 욕실로 향했다.
루미에르가 그 뒤에서 외쳤다.
“도와줄까요?”
제냐가 코웃음을 쳤다.
“뭐, 씻겨라도 주게요?”
“필요하다면요.”
“웃기지 말아요.”
상대하기 싫다는 듯 그대로 욕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데, 닫히던 문이 콱 붙잡혔다.
“왜요? 진심인데.”
이 사람이 미쳤나?
정색을 하며 루미에르를 쳐다보는데, 그가 쓱 고개를 숙여 제냐와 눈을 마주했다.
“싫어요?”
웃음기 없는 푸른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제냐가 확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식으로 굴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갑자기 왜 이렇게 정신 나간 짓을 한단 말인가?
“네, 안 돼요.”
말과 동시에 제냐가 문을 붙잡은 그의 손을 밀어냈다. 문을 닫는데 닫히는 문 너머 쓸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헤어질 텐데.”
쾅. 그 말과 함께 큰 소리로 닫힌 문을 바라보던 제냐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묘한 느낌에 다시 문을 벌컥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다.
하지만 꼭 밖에서 붙잡고 있는 것처럼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참 낑낑거리던 제냐가 문을 발로 차며 외쳤다.
“문 안 열어요?!”
정말 화낼 거라고, 방금 그거 무슨 소리냐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데, 거짓말처럼 끼익 문이 열렸다.
제냐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활짝 문을 열어젖혔다.
그 순간 강한 바람과 함께 하늘에서 검은 깃털이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하늘하늘 떨어지는 그 깃털을 멍하니 바라보던 제냐가 그녀를 내려다보던 존재를 바라봤다.
붉은 눈.
아무런 감정도 없는, 발아래 기어 다니는 벌레를 쳐다보는 것 같은 무미건조한 눈이 제냐를 담았다.
그 시선에 사로잡혀 천천히 다가오는 커다란 손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기어이 그 손이 그녀의 얼굴을 다 덮어 버린 순간.
“아.”
제냐는 새벽의 푸른빛을 띠는 천장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옆을 쳐다봤다. 그러자 잠기운에 젖은 푸른 눈이 그녀를 마주 봤다.
“제냐, 깼어요?”
그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제냐가 다시 천장을 바라봤다.
어디서부터가 꿈이고 어디서부터가 현실일까.
레라지에와 헤어지고 억지로 씻고 잠든 건 현실이었다. 그러니까 욕실로 들어가는 것까지는 현실. 그 후가 꿈.
‘그러니까 바로 꿈인 걸 알아차리지 못한 거겠지.’
제냐가 마른 눈을 손으로 문질렀다. 오늘 있을 일이 신경 쓰였던 걸까?
이래저래 스트레스받을 일이 많았으니 악몽을 꾸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제냐?”
옆에서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오기에 제냐가 손을 내렸다.
“또 그 짓을 해야 하네요.”
전날 내내 했던 치장을 이야기하자 루미에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요. 그래도 오늘은 한 번만 하면 되니까요.”
전날 질색을 하던 그녀를 알았기에 루미에르는 조금 가라앉은 것 같은 제냐의 모습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제냐는 묘하게 신경을 긁는 꿈을 머릿속에서 지워 냈다. 안 그래도 중요한 일이 가득 있는 오늘. 쓸데없는 곳에 신경을 쓸 정신은 없었다.
‘안전하게, 아무런 문제 없이 끝날 거야.’
스스로에게 다짐한 제냐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 * *
제냐의 주변을 삥 돌던 레라지에가 의자에 걸린 검은 로브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 완벽해! 시간 다 됐으니까 로브를 입고 나오게.”
이렇게 예쁘게 꾸몄는데, 로브를 쓰는 건 죄라며 종알거리는 레라지에의 입을 막듯 제냐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사합니다.”
몇 번 더 감탄하던 레라지에가 쪽, 손 키스를 전하며 방을 떠났다.
“내 기쁨이지.”
닫힌 문을 보며 작게 웃음을 터트리는데 루미에르가 험악한 얼굴로 그녀의 얼굴 주변으로 손을 휘저었다.
손 키스를 날려 버리려는 황당한 모습에 헛웃음을 흘린 제냐는 그를 말리는 대신 거울을 쳐다봤다.
참 낯선 여자가 거기 있었다.
파티에 갈 정도로 화려하진 않으나 누가 봐도 귀족이라는 걸 알 수 있을, 몸에 착 맞춰 차르르 떨어지는 드레스.
마법으로 허리까지 늘인 회색빛이 살짝 도는 금발, 얼굴에 화사한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화장까지.
검은 단발머리에 무채색의 단정하고 심플한 옷을 입던, 화장기 없는 마왕성의 시녀 제냐를 전혀 연상할 수 없었다.
쓴웃음을 흘린 제냐는 로브를 걸쳤다.
품이 큰 로브 덕에 드레스가 잘 가려졌다. 로브에 달린 모자를 써 하관 외에 보이는 부분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제냐가 루미에르를 불렀다.
“자, 이제 가요. 루미에르.”
여전히 레라지에가 떠난 자리를 노려보던 루미에르가 에스코트하듯 제냐의 손을 잡았다.
“긴장할 필요 없어요. 옆에 계속 같이 있을 테니까.”
방을 나서면서 건네진 말에 제냐가 허탈하게 웃었다.
“알고 있었어요?”
“네.”
숨긴다고 숨겼는데, 잘 안 된 모양이었다.
“제냐는 잘할 거예요. 설령 실수를 한다고 해도 내가 해결해 줄게요.”
평소에는 늘 그녀가 챙겨 줘야 하는 사람이었는데, 이럴 때는 의지가 됐다. 제냐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어떤 실수도요?”
“네.”
루미에르가 계단 아래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마왕을 가리켰다.
“저게 문제를 일으켜도 내가 막을 수 있어요.”
“…고마워요.”
정말 위안이 되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말이었다. 생긋 웃은 제냐는 여전히 마왕을 손가락질하고 있는 루미에르의 손을 붙잡아 내렸다.
그리고 서둘러 마왕의 앞으로 다가가 그가 화를 내기 전 로브를 벗었다.
“어떠세요?”
빤히 루미에르를 쳐다보던 마왕이 고개를 돌려 제냐를 쳐다보더니 망설임 없이 말했다.
“안 어울려.”
저번에도 느꼈는데, 마왕과 루미에르는 참 잘 맞을 것 같았다.
“익숙하지 않으신 거겠죠.”
레라지에가 얼마나 열심히 준비를 해 줬는데, 그런 말이라니.
마왕의 뒤에 서 있는 레라지에가 충격을 잔뜩 받았다는 걸 좀 알아줬으면 싶었다.
하지만 마왕은 다시 한번 혹평을 던졌다.
“안 어울린다니까.”
뭐 어쩌라고.
제냐가 툭 튀어나갈 뻔한 말을 삼키며 생긋 웃었다.
“레라지에 님이 열심히 도와주셨는데요.”
머리 길이까지 마법으로 길게 늘였는데, 노력한다고 칭찬해 주지 못할망정.
제냐는 이와 관련해 더 말하는 대신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슬슬 그래논 백작의 집에 가야 할 시간이었다.
“따라오실 건가요?”
있을 곳이 없는 것도 아니고 여기서 기다리면 되지 않나 싶었다. 하지만 마왕이 얄밉게 답했다.
“네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당연한 걸 왜 묻냐는 얼굴에 제냐가 입꼬리를 올렸다.
“제가 잘하면 안 끼어드실 거죠?”
인간을 건드리지 말라는 말에 마왕이 피식 웃더니 고개를 끄덕여줬다. 선심 쓰듯 돌아온 답이 거슬렸지만, 그래도 확답을 들었으니 됐다.
설령 문제를 일으켜도 루미에르가 막아 준다고 했고.
제냐가 다시 로브의 모자를 쓰며 준비됐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침실에 도착할 거야. 소음 방지 마법을 쓸 거니까 걱정 말고.”
그들의 곁에 다가온 레라지에가 가벼운 설명과 함께 손가락을 튕겼다.
가벼운 손동작 한 번에 주변의 풍경은 완전히 변했다. 제냐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주는 루미에르의 손을 두드리며 앞을 바라봤다.
일찍 온 보람도 없이 방의 주인은 이른 아침에도 벌써 하루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인기척을 느낀 사내가 몸을 돌려 제냐의 일행을 쳐다봤다. 로브와 가면으로 얼굴을 꽁꽁 싸맨 게 나쁜 놈이요 광고하는 꼴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비명을 지르지도 병사를 부르지도 않았다.
‘뭐, 진중한 성격이면 오히려 더 좋겠지.’
제냐가 경계하듯 그들을 쳐다보는 중년의 사내를 향해 한 발 내디뎠다.
“안녕하세요, 상쾌한 아침이죠?”
상황에 맞지 않는 인사지 싶었지만, 제냐는 쾌활함을 유지했다. 그녀의 기억 속 백작의 딸은 활발하고 엉뚱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인사말을 주고받을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백작은 그 발랄한 인사를 받아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뭐, 갑자기 침실에 들이닥친 침입자의 인사를 넉살 좋게 받아 줄 만한 이는 많지 않았다.
제냐는 상대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로브 아래 드러난 입술을 매끄럽게 말아 올렸다.
“나름 예의를 갖춘 거였어요.”
“다짜고짜 난입한 후에 말이지.”
음, 크게 실례를 해 놓고 자잘한 것에 신경 쓰는 꼴이니까 좀 가증스럽긴 할 거다.
“그 점은 사과드려요. 신분을 드러내 놓고 다닐 처지는 아니거든요.”
“알 만하지. 수배라도 당했나? 딱히 예의를 갖출 만한 종자는 아니라는 뜻이군.”
그래논 백작은 목소리 한 번 높이지 않으면서도 효과적으로 사람을 짜증 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실제로는 들리지 않을 마왕의 비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제냐는 이 이상 질질 끌지 않기로 했다.
손을 올린 제냐가 얼굴을 가리던 로브의 모자를 벗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