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57)화 (57/145)

16607584404662.jpg

마차가 숲 한가운데로 들어섰다. 제냐가 다 똑같은 것 같은 숲의 모습을 살피며 물었다.

“그런데 저희는 어디로 가나요?”

한참 루미에르와 눈싸움을 하다가 아예 그에게 관심을 껐던 마왕이 무심하게 말했다.

“수도.”

“…네?”

아니 신전을 피해 도망가는 건데, 바로 본신전이 있는 곳으로 간다고?

하지만 마왕은 태연했다. 제냐는 우선 이야기를 마저 들어 보기로 했다.

“마차는요?”

“같이.”

“너무 눈에 띄지 않나요?”

갑자기 수도 한복판에 마차가 나타나다니, 너무 화려한 등장이었다.

“수도에 구입한 저택이 하나 있다. 바로 그리로 갈 거야.”

마왕이 제국의 수도에 저택이 있다고?

‘나도 집이 없는데, 마왕이?’

제냐가 괴상해지는 얼굴을 붙잡았다.

“그럼 인간 세상에 도착한 다음 바로 거기로 이동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요?”

굳이 이렇게 다른 도시에 머물 필요가 있었을까? 덕분에 쓸데없이 루미에르의 동료를 만나서 일만 복잡해지지 않았나?

하지만 그 의문은 금방 풀렸다.

“레라지에가 어제 구한 저택이다.”

레라지에는 인간계에서 정말 많은 일을 했구나.

떨떠름해진 제냐가 열심히 마차를 몰고 있을 레라지에를 생각했다. 마차가 튼튼한 것도 있겠지만 큰 흔들림 없이 부드럽게 이동하는 걸 보면 이런 쪽에도 재능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마계의 귀족인데,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럼 한동안은 거기에 머무르겠네요?”

“그래. 거기서는 얌전히 저택 안에서 놀아.”

이번 이동은 오로지 너희 때문이라는 걸 강조하는 말이었다. 괜히 말을 더했다가 간신히 잦아든 기 싸움이 다시 시작될 테니 제냐는 얌전히 대꾸했다.

“…알겠어요.”

때마침 레라지에가 마차를 세우고 마차 벽을 두드렸다.

“폐하, 이쯤에서 이동할까요?”

“그래.”

마왕의 답이 끝나자마자 화려한 은빛 마력이 그들을 감쌌다.

몇 초나 지났을까? 끼익, 열리는 문 사이로 레라지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착했습니다.”

문이 열리자 마왕이 먼저 훌쩍 마차를 떠났다. 제냐는 루미에르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리면서 주변을 돌아봤다.

저택 내부 중앙 홀로 바로 이동한 덕인지, 저택 안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구한 지 얼마 안 된 저택 같은데, 저택 내부는 깔끔했다. 웅장하다기보다는 우아하고 깨끗한 느낌.

“어때, 마음에 드나?”

“네.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요.”

정말 수도에 몸을 숨겨도 되는 걸까? 제냐의 걱정에 레라지에가 악동 같은 웃음을 흘렸다.

“원래 등잔 밑이 제일 어둡다고 하지 않나?”

수도 저택에 숨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할 거라며 킬킬 웃은 레라지에가 응접실로 그들을 안내했다.

“저는 저택을 좀 둘러봐야겠습니다. 적당한 방을 좀 골라야겠어요.”

저택이 안전한지, 레라지에의 심미안에 적절한지 확인하는 절차일 게 뻔했다. 제냐는 군말하지 않고 그를 보냈다.

그리고 다시, 어색하고 불편한 셋이 응접실에 남았다.

일행 중 상황을 부드럽게 풀어 주는 윤활유 같은 레라지에가 사라지자 방의 분위기는 냉랭해졌다.

제냐가 슬쩍 둘의 눈치를 살피는데, 시선이 마주친 마왕이 불쑥 질문을 던져 왔다.

“그래서 계획은 세웠나?”

무슨 말인가 싶었던 제냐가 황당함을 드러냈다.

“너무 재촉하시는 것 아니에요?”

심술도 이 정도면 너무 과했다. 하지만 이어진 마왕의 말에 제냐는 한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신전에서 정말로 행사 일정을 앞당겼어.”

“…신전도 대단하네요, 정말.”

용사가 죽었다는 소문 때문에 초초해진 신전이 그들의 건재함을 알리기 위해 행사를 앞당긴 것이다.

제냐가 의식적으로 전날 루미에르와의 대화를 지워 내며 마왕이 줬던 서류를 꺼냈다. 그리고 미리 골라 뒀던 귀족 명단을 테이블에 펼쳤다.

“이 사람을 이용할까 생각 중인데요.”

그래논 백작.

마왕이 서류를 훑으며 물었다.

“어떻게?”

“원하시는 대로 제 신분을 이용해야겠죠.”

“아는 사이인가?”

제냐는 기억 속 흐릿한 얼굴을 떠올렸다.

“모르는 사이는 아니에요. 멀긴 해도 아버지랑 친척이고요.”

“왕국의 공작이었군?”

“뭐, 혈연에 기대려는 건 아니지만요.”

“그럼?”

제냐가 건조하게 마왕을 쳐다봤다.

“제국에 넘어간 귀족 중, 마족에게 온 가족을 잃은 유일한 사람이라서요?”

서류를 쳐다보던 마왕이 눈만 들어 제냐를 쳐다봤다. 제냐는 담담히 그 시선을 마주 봤다. 마왕이 계속해 보라는 듯 서류를 테이블에 툭 던지고는 그녀를 쳐다봤다.

“따로 재혼도 하지 않았으니까, 혹시 문제가 생겨도 피해가 제일 적고요.”

또래라 종종 마주치곤 했던 그래논 백작의 딸을 잠시 떠올리던 제냐가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뭐, 결국은 네가 하는 일이니 원하는 대로 해.”

“결과에 대한 책임도 제가 지고요?”

“당연하지.”

오만한 그 답에 제냐가 빳빳하게 대꾸했다.

“알겠어요. 그럼, 언제쯤 움직이면 좋을까요?”

“행사는 이틀 뒤야. 오전 중에 황족들은 황궁을 떠난다.”

“…빠르기도 하네요.”

제냐가 루미에르에게 돌아갈 것 같은 고개를 붙잡는데, 마왕이 물었다.

“언제가 좋겠어? 전날, 아니면 당일?”

잠시 고민하던 제냐가 곧장 답했다.

“당일 새벽으로 하죠.”

마왕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설득에 자신이 있나 봐?”

“사용인들 수가 적을 것 아니에요.”

뼈가 담긴 말을 했지만 마왕은 딱히 자극받은 기색이 아니었다.

“흠, 그래.”

마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남은 기간 동안은 어떻게 하면 황녀처럼 보일 수 있을지 같이 고민해 봐.”

마왕이 루미에르를 보며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제레미야와 루미에르가 약혼한 사이라는 꽤 재밌는 모양이었다.

“치장은 레라지에가 도와줄 거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레라지에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폐하, 폐하께서 머무실 훌륭한 방을 발견했습니다.”

마왕이 왜 서 있는지는 전혀 궁금하지 않은 건지, 레라지에가 놀라는 기색 없이 활짝 웃었다.

“그래, 가지.”

제냐는 다녀와서 방을 안내해 주겠다는 레라지에의 말을 흘려들으며 멀어지는 마왕의 등을 응시했다.

* * *

제냐는 부득불 그녀와 같은 방을 쓰겠다는 루미에르 덕에 또 한 번 그와 같은 방에서 지내게 됐다.

“옆에 방이 비었는데요?”

비다 못해 텅텅 남아돌던 방을 떠올리는데 루미에르가 생긋 웃었다.

“위험해요. 제냐.”

“여기가 더 안전하다면서요.”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말에 제냐가 놀라는데 루미에르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신전에 비해서 그렇다는 거죠.”

그 태연한 대꾸에 제냐가 다시 긴장을 풀었다. 갑작스러운 이동에 이래저래 피곤한 몸을 침대에 털썩 누인 제냐가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딱히 남을 설득하는 데 자신이 없어요. 정 힘들면 저를 이용해도 되요. 용사가 함께한다고 하면 괜찮지 않을까요?”

“그거 말고요. 제레미야인 척하는 거요.”

“아.”

제냐가 발을 동당거리다 몸을 돌려 루미에르를 쳐다봤다.

“바로 옆에서 비교를 하진 않으니 완전히 똑같진 않아도 되지만 또 너무 다르게 행동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적어도 딱 봤을 때 귀족처럼은 보여야 했다.

“예법을 기억하고 있으려나.”

제냐가 미심쩍은 눈으로 스스로의 손을 내려다봤다.

“제냐는 움직임도 조용하고 우아해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늘 좋은 말만 해 주는 루미에르는 이런 때에는 신빙성이 부족했다.

“흐음, 그래요?”

“네. 제냐처럼 조용히 움직이는 사람은 드물어요.”

제냐가 삐죽 입꼬리를 올렸다.

“괜히 눈에 띄었다가 마족들에게 붙잡히면 귀찮아져서 몸을 많이 사렸거든요.”

장난스레 말하는데, 루미에르의 얼굴이 낮게 가라앉았다. 제냐가 슬쩍 그의 눈치를 살폈다.

“농담인데.”

그러자 루미에르가 여전히 서늘한 얼굴로 말했다.

“마족들을 상대하느라 늘 긴장하고 있어서 움직임 쪽으로는 예민해요. 그러니까 날 믿어도 좋아요.”

제냐가 미간을 좁히자 루미에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농담이에요.”

누가 봐도 농담이 아니었지만 먼저 시작한 건 이쪽이었으니 적당히 넘어가기로 했다.

“이렇게 말을 잘하는지 몰랐네요.”

“제냐한테 배운 거죠.”

아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뻘쭘해진 제냐가 툴툴거렸다.

“다른 좋은 점도 많았을 텐데요.”

“원래 나쁜 것부터 배운다잖아요.”

제냐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한마디를 안 지네.”

루미에르가 그녀를 따라 부드럽게 웃었다.

“제냐가 이런 걸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내가요?”

도대체 언제? 하지만 루미에르 그 말에 답하지 않고 짐을 정리했다.

정확히는 그들이 가져온 옷을 죄다 바닥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황녀는 검소한 편이라고 들었어요.”

검소? 걔가? 그사이 취향이 변한 건가? 아니면 이것도 이미지 메이킹인가?

부정적인 생각이 마구 떠올랐지만 그들을 미워하느라 시간을 쏟고 싶지 않았다.

제냐는 일어나기 싫은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쓸데없는 데 기운을 소비하는 대신 루미에르와 함께 옷을 살폈다. 챙겨 온 옷 중 가장 화려한 옷을 집어 들었던 루미에르가 의아함을 드러냈다.

“왜 제 몫의 연회복이 있죠?”

‘혹시 몰라서. 언제 어떻게 헤어질지 누가 알아?’

물론 그렇게 말할 수는 없기에 제냐가 대충 얼버무렸다.

“사다 보니까.”

“그런데 제냐 건 없어요.”

그야, 제냐는 화려한 걸 싫어했고 이번 일정에는 파티복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으니까.

“내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루미에르는 어울릴 것 같잖아요?”

적당히 핑계를 대는데 루미에르가 들고 있던 연회복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제냐는 제 얼굴이 좋아요?”

“응?”

“잘생긴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오.

제냐가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피식 웃었다.

“본인이 잘생긴 건 아는구나?”

하긴 자기도 눈이 달렸으면 알 것이다. 보는 눈이 없어도 주변 반응을 보면 자기 얼굴이 객관적으로 어떻게 생겼는지 모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