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56)화 (56/145)

1660758436918.jpg

“당신이 가진 힘은 특별하니까요. 당신은 나처럼 이용만 당할 거예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일갈하려던 제냐는 금방 상황을 이해했다. 신전에서 꼭 필요한 루미에르와 그를 치유할 수 있는 그녀의 성력.

‘신전이 눈이 돌아갈 만하지.’

하지만 상황을 너무 나쁘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신전이 루미에르를 필요로 하는 만큼, 반대로 제냐는 더 안전해질 수도 있었다.

“상황은 상대적이잖아요. 협상만 잘한다면…….”

“제냐, 나는 거기서 10년을 살았어요. 어머니의 사고방식은 내가 제일 잘 알아요.”

애써 상황을 좋게 바라보려고 노력하던 제냐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내가 당신을 아끼는 걸 아니까 당신을 이용해서 나를 더 묶어 두려고 하겠죠.”

하지만, 하지만 그걸로 당신이 안전해진다면…….

“가볍게 생각해선 안 돼요. 당신을 묶어 둔다는 데에는 여러 방법이 있으니까.”

그 말에 머릿속에서 여러 방법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부터 루미에르에게 했듯 약혼 또는 결혼을 강요하는 것까지.

“그런 게 잘못됐다고 말한 건 당신이잖아요. 그러니까 신전은 안 돼요.”

루미에르가 제냐의 흔들리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차라리 마왕이 나아요. 마왕은 당신을 아끼니까.”

“네?”

루미에르가 대놓고 불쾌함을 드러냈다.

“마음에 안 들지만 인정할 건 해야겠죠. 마왕은 당신을 아끼고, 그 때문에 나도 포용하고 있어요.”

스스로도 짐작하고, 마왕에게도 직접 들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그렇지 않을 거라고, 다른 속셈이 있을 거라고 외면해 왔던 진실.

마왕은 제냐를 아꼈고, 그녀가 상처받는 걸 원치 않기에 루미에르를 죽이지 않는다.

귓가에 루미에르의 목소리가 웅웅,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멀미가 날 것 같았다.

“물론 제냐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죠. 예쁘고, 착하고 다정하고, 일도 잘하고, 따뜻하고…….”

제냐가 신물이 튀어나올 것 같은 목을 부여잡고 외쳤다.

“그만!”

크게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거슬렸다.

“그만해요.”

제냐가 꽉 조여 오는 목을 긁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이야기는 거기까지 해요.”

그녀의 인생을 망가트렸던 마왕이 그녀를 아낀다는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제냐의 절박함을 읽은 걸까? 끝을 볼 것 같았던 루미에르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 * *

다음 날 아침, 느긋하게 방에서 식사를 마친 제냐와 루미에르는 전날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는 듯 마왕이 준 서류에만 집중 중이었다.

“참 열심히 조사했네요.”

아비에 왕국 출신 귀족들의 개인적인 가정사부터, 능력, 정치적인 위치, 우호적인 세력 등등 매우 상세한 정보였다.

두 사람은 마왕이 건네준 서류를 꼼꼼히 살펴봤다.

“그러니까 마왕은 이 세력들을 이용해 보라는 거잖아요. 특별한 방법이 있을까요?”

제냐의 물음에 루미에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제냐의 정체를 알고 나서 제안한 거니까. 그쪽으로 움직여야겠죠.”

루미에르의 말대로였다.

“하지만 뭘, 어떻게 이용할 수 있겠어요? 말 그대로 다른 왕국 출신인데.”

아무리 제국에 편입됐다지만, 그래도 본래는 다른 왕국 출신이니 큰 힘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회의적인 제냐의 말에 루미에르가 서류를 뒤적거리며 답했다.

“아니요. 생각보다 그들의 처우는 나쁘지 않습니다.”

“그래요?”

“황제가 백성들의 지지를 받게 된 계기가 아비에 왕국의 멸망 때문이니까요.”

“자세히 설명해 봐요.”

“자기들과 다르지 않게 마족들에게 가족을 잃은 황제 후보. 동정심과 동질감이 큰 도움을 줬죠.”

무슨 말인지 알겠다. 제냐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루미에르가 서류 몇 장을 골라냈다.

“여기 이 사람들은 제국의 주류층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요?”

그가 제국 귀족 세력에 빠삭한 건 제레미야의 약혼자이기 때문일까?

제냐는 문뜩 든 생각을 홀로 삭히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걸 다 알아요?”

“어머니께서 적어도 제국의 귀족들은 다 알아 두는 편이 좋다고 하셔서요. 여러모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 중이니까요.”

또 신전인가?

제냐가 눈을 팍 찌푸리자 루미에르가 너털웃음을 흘리며 제냐의 눈썹 근처를 문질렀다.

제냐가 살짝 고개를 털어 루미에르의 손을 떼어 내고 표정을 풀었다. 그러고는 집중하라는 듯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래서 이 귀족들을 이용하면 될 것 같다는 거죠?”

“네.”

“그럼 이 중에서는…….”

제냐가 쭉 서류를 살피다가 한 인물을 가리켰다.

“이 사람이 낫겠어요.”

여러모로 딱 이 일에 맞는 적임자였다.

“일단 가족이 없으니까, 이자만 어떻게 잘하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네, 그래요. 신전과도 딱히 연관이 없는 인물이니까, 신전에 뒷말이 전해지는 것도 나중…….”

“잠깐.”

“네?”

제냐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루미에르를 쳐다봤다.

맙소사, 신전.

“제냐?”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버려서.

“어, 어떡하죠?”

“네?”

이걸 왜 이제야 생각해 낸 걸까.

“당신 동료 말이에요. 신전은 당신을 찾고 있고, 그래서 당신 동료를 데려갔잖아요.”

그 말에 루미에르의 얼굴에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분명 당신에 대해 이야기했을 거예요.”

정체를 확신하지 못했지만 의심이 가는 인물을 발견하지 않았던가? 당연히 그 가벼운 입을 주절거렸을 것이다.

제냐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왕에게 가야겠어요. 우리는 이 마을을 떠나야 해요.”

* * *

제냐는 급하게 정리한 짐을 들고 서둘러 1층으로 내려갔다. 여관 직원이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그들을 배웅했다.

“바깥에 마차가 대기 중입니다.”

“네, 고마워요.”

그 말대로 여관 앞에는 호화로운 마차 하나가 대기 중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그들을 기다린 것으로 보이는 레라지에가 있었다.

“제냐.”

그들을 발견한 레라지에가 당연하다는 듯 마차의 문을 열어 줬다.

제냐는 마차 안에 앉은 채, 한심하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마왕을 발견하고는 헛기침을 했다.

“미리 나와 계셨네요.”

“제냐, 안쪽으로 들어가요.”

하지만 제냐와 달리 루미에르는 당당했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 제냐를 에스코트해 마차에 올려 주고는 냉큼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제냐는 얼굴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시선을 외면하며 마차 밖에 서 있는 레라지에를 바라봤다.

“안 올라오세요?”

레라지에가 활짝 웃으며 대꾸했다.

“나는 마차를 몰 거라네.”

“네?”

마차를 몬다고? 제냐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레라지에가 마왕에게 인사를 하며 문을 닫고 사라졌다.

“하하하, 그럼.”

곧이어 부드럽게 움직이는 마차에 제냐가 멍한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정말 레라지에 님이 마차를 모는 건가요?”

“그래, 누가 급하게 떠나야 한다고 했으니까.”

갑자기 들이닥쳐 얼른 이 도시를 떠나야 한다고 외친 그녀를 미친 사람처럼 쳐다보던 마왕의 시선을 떠올리며 제냐는 어색하게 웃었다.

“…마부를 못 구하셨어요?”

“마을 밖에서 마법을 써 이동할 테니까, 괜한 목격자를 더 만들 필요는 없지.”

아.

안 그래도 혹시 모를 신전의 추적자를 피해 급하게 이동하는 입장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수상쩍은 일을 더 만들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그래야지.”

당연하다는 듯 떨어진 답에 반박할 수 없는 처지가 슬펐다.

“똘똘하게 키운 것 같은데, 옆에 있는 놈 때문인가?”

똘똘하게 키웠다는 게 설마 제냐, 그녀를 말하는 걸까?

‘자기가 언제 날 키웠다고?’

제냐가 황당함을 담아 마왕을 쳐다봤지만 그는 뻔뻔했다.

“뭐?”

“…아닙니다.”

지은 죄가 있는 사람은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잔소리가 너무 많은 것 아닐까?

“도대체 뭘 어떻게 했기에 들키고 다녀? 가면은 장식인가? 설마 가면을 벗고 다니기라도 했어?”

“설마요.”

“멍청하게 이름을 불렀다던가?”

아니, 그렇게 멍청한 줄 아나?

“그것도 아닌데요.”

“인간 세상에 와서 긴장감이 줄었어?”

그건 좀 맞는 말 같기도 하고.

“헬렐레 앞뒤 생각 안 하고 행동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니야.”

“헬렐레…….”

그건 좀 아니지 않냐고 조심스레 마왕을 쳐다보는데 그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아니라고?”

도대체 정체를 들킬 일이 어디 있냐고 묻는 그 눈빛에 제냐가 억울함을 담아 루미에르의 얼굴을 척 가리켰다.

“솔직히 저 얼굴이 손바닥만 한 가면에 다 가려지는 것도 말이 안 되거든요?!”

말을 뱉고 나서야, 지금이 소리 지를 타이밍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마왕이 아니꼬운 눈빛으로 제냐를 쳐다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아니, 폐하.”

마왕이 루미에르를 돌아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축하하네. 그대의 얼굴이 잘생겼다는군.”

기어이 루미에르까지 끌어들이는 마왕에 제냐가 새초롬하게 눈을 세웠다. 그러나 제냐가 뭐라 하기도 전, 루미에르가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제냐. 역시 내가 더 잘생겼죠?”

“네?”

“저쪽은 로브로 대충 가리면 되는 거고, 저는 가면을 써도 가려지지 않잖아요.”

“…뭐라고요?”

뭐래? 제냐가 황당함에 눈만 깜빡이며 루미에르를 쳐다보는데, 그가 의기양양하게 마왕을 쳐다봤다.

그러자 마왕이 형편없이 일그러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말 대단하군.”

“그런 편입니다.”

“뭐, 저런 게…….”

자기들끼리는 대화가 통한 것 같은데, 제발 이쪽에도 설명을 해 줬으면 좋겠다.

제냐가 피곤한 얼굴로 어느새 다시 눈싸움을 시작한 마왕과 루미에르를 외면했다.

‘자기들끼리 잘 맞네, 응.’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