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들렀던 마을 주민들이 준 음식을 먹었는데, 거기에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잠깐만. 뭐라고?
“저는 독에 내성이 어느 정도 있었는데, 동료들은 아니라서요.”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 이해한 제냐가 경악해 물었다.
“음식이 상한 게 아니라 독이 있었다고요?”
제냐가 다급하게 그를 재촉했다.
“왜요? 설마 오늘 그 인간들처럼…….”
흥분해 말을 뱉다가 이게 혹시 루미에르에게 상처가 될까 입을 다무는데, 그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답했다.
“그럴 수도 있고요. 저도 아직 이유는 모릅니다. 마나 폭주에 휘말려서 마계로 튕겨 나가서요.”
‘도대체 폭주를 어떻게 해야 마계로 가는 통로를 열 수 있는 건데?’
정말이지, 불운에 불운이 겹친 셈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제냐가 다시 한번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잠깐만, 독에 내성이 있었다면서요. 그런데 배는 왜 뚫렸어요?”
루미에르의 말에 따르면 그는 음식에 든 독에 영향을 받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그대로 놔두면 마법사는 죽었을 테니까, 말리다 보니……. 좀 다쳤죠.”
“좀이요?”
어이없다는 듯 물어보자 루미에르가 그녀의 눈을 피했다.
“다른 사람들도 지켜야 했고.”
용사의 동료라면 자기 몸 정도는 지킬 수 있는 사람들 아닐까? 도대체 왜 그들을 지키려고 했던 걸까?
“주변에 마을 주민들도 몇 있었고, 막지 않으면 여러모로 위험했습니다.”
정말이지 루미에르 때문에 속이 터져 죽을 것 같았다. 그들이 준 음식을 먹고 문제가 발생했는데 주민들을 걱정할 여유도 있다고?
“솔직히 나중에는 어떻게 됐는지 잘 모르겠어요. 의식을 잃었거든요.”
올라간 입꼬리가 거슬렸다. 딱히 웃으면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하늘이 붉었어요. 노을이 졌다고 하기에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마족들하고 마주쳤죠.”
“설마, 마족이랑도 싸웠어요?”
“네. 그래서 상처가 더 벌어졌습니다. 그렇게 몇 명 처리하다가 또 정신을 잃었는데, 일어나 보니까 제냐가 있었어요.”
중간에 많은 게 생략된 것 같았지만, 그래 봐야 마족들과 어떻게 싸웠느니 이야기가 이어질 게 뻔했다.
“어떻게 마왕성까지 왔는지는 기억 안 나요?”
“네.”
그것도 참 이상하다, 생각하는데 루미에르가 수줍게 웃었다.
“아마, 제냐가 있는 곳을 본능적으로 알았던 거 아닐까요?”
깜빡.
잠시 침묵하던 제냐가 냉정하게 그 말을 무시했다. 지금은 이런 말에 부끄러워하거나 민망해할 때가 아니었다.
“그럼 오늘 있었던 일로 넘어갈까요?”
루미에르는 서운해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요.”
“우선은 더 가벼운 쪽 먼저 해결하죠. 그러니까 초상화요.”
제냐가 테이블 위에 놓인 초상화와 서류를 바라보자 루미에르가 그를 따라 테이블을 응시했다.
“여기 안에 있는 건 제국에 편입된 아비에 왕국 출신 귀족들의 명단이고.”
제냐가 초상화를 보며 혀를 찼다.
“이건 보이는 대로…, 제레미야의 초상화죠.”
더티 블론드에 초록빛 눈을 지닌, 얼핏 보면 제냐와 비슷해 보이는 초상화의 주인은 루미에르의 약혼녀이자 제국의 황녀인 제레미야였다.
“닮았네요.”
제냐의 중얼거림에 루미에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모르겠는데, 그래요?”
뭐라는 건지. 제레미야를 보니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를 정도인데.
솔직히 루미에르가 진작에 두 사람의 혈연관계를 의심하지 않은 게 말이 안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쪽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고.’
제냐가 초상화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색만 다르지 비슷하게 생겼잖아요. 마왕이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하는지 알 것 같지 않아요?”
루미에르가 빤히 초상화를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모르겠네요. 정말 다른데.”
“아예 똑같다는 게 아니라…….”
제냐는 말을 길게 잇지 않기로 했다. 아직 해야 할 말도 많은데 여기서 발목 잡힐 수는 없었다.
“아무튼 마왕이 제안한 대로 조금만 노력하면 황성 안에서 충분히 제레미야인 척 굴 수는 있을 거라는 소리예요.”
초상화를 건네주며 마왕이 한 말은 참 허무맹랑한 소리 같았다.
‘그리고 넌 그때 황녀인 척 굴어 보는 거야. 어때?’
‘장난하시는 건가요?’
‘설마, 꽤 그럴듯하지 않아?’
‘도대체 어디가요?’
‘글쎄. 나는 이게 꽤 좋은 방법 같거든. 한번 생각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