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티를 냈나? 아니면 나를 잘 아는 건가.
‘오래 함께하긴 했지.’
허탈하게 웃음을 흘린 제냐가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마왕이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꼬락서니가 딱 그래서.”
제냐가 입을 삐죽였다.
“그 꼬락서니가 어떻냐고 여쭈는 건데요.”
마왕이 툭 튀어나온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며 말했다.
“쓸데없는 말이 많아. 행동도 번잡하고.”
딱히 비꼬는 기색 없이 사실만을 말하는 느낌이었기에 제냐는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이왕 다 들킨 거 여기서 시간을 좀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할 일이 없으니 더욱 완벽하다.
제냐는 마왕의 맞은편 소파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마왕이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제냐는 당당했다.
“이왕 눈치채신 김에, 좀 앉았다가 갈게요.”
마왕이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표정으로 제냐를 쳐다봤다.
“미친 건가?”
“아니요. 정이 드셨다니까, 이 정도는 봐주실 것 같아서요.”
제냐가 무심한 얼굴로 답하자 마왕이 코웃음을 쳤다.
“정이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녀를 갓난아이라고 할 정도로 나이도 많으면서,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가볍게 마음 갖는 분 아니시잖아요?”
마왕이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할 이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제냐도 알았다.
“폐하가 절 아는 만큼 저도 폐하를 잘 아니까요.”
마왕이 할 말 많은 얼굴로 제냐를 쳐다봤다. 이대로 쫓아낼까 걱정이 된 제냐가 급하게 입을 열었다.
“레라지에 후작님은 자리를 비운 것 같던데. 일을 맡기셨나요?”
“그래.”
“어제처럼 정보를 얻어 오라고 하신 거예요?”
“전날 그놈도 처리하고.”
“그놈…, 동료요?”
간신히 루미에르를 머리에서 밀어냈는데, 보람도 없이 다시 그와 관련된 일이 튀어나왔다. 제냐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왜?”
제냐가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아까 신전에 잡혀가더라고요.”
“그걸 그냥 두고 봤나?”
아마 마왕도 제냐와 비슷한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루미에르는 왜 신전 인사를 그냥 보냈는가.
같은 생각을 한 주제에 제냐가 따지듯 물었다.
“그럼요?”
“흐음.”
이상한 소리를 내며 빤히 제냐를 쳐다보던 마왕이 별다른 말 없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 심심한 반응에 참다못한 제냐가 물었다.
“그게 끝이세요?”
“뭘 더 해야 하는데.”
동료랑 여기로 만나기로 한 거냐, 무슨 속셈이 있는 건 아니냐, 조용히 있어라, 등등의 경고 또는 행동으로 위협을 해야 하지 않을까?
“언제까지 넘어가 주시려고요?”
“먼저 덤비지 않는다면야, 봐줄 수 있지.”
언제부터 이렇게 관대했다고.
마왕이나 루미에르나 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덤비면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야지.”
“네?”
어이없다는 제냐의 반응에도 마왕은 심드렁했다.
“쫓겨나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물고 조용히 있어.”
달싹거리던 입이 꾹 다물렸다.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루미에르와 단둘이 있을 자신이 없었던 제냐가 몸에 힘을 쭉 빼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 * *
함께 여관에 머무는 이상 제냐가 루미에르를 피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적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는데.’
제냐는 레라지에와 함께 마왕의 방으로 들어오는 루미에르에 서둘러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놀란 것도 놀란 거지만 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닌가 걱정이 앞섰다.
레라지에가 제냐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마왕에게로 다가갔다. 제냐가 멀어지는 레라지에를 보다가 작게 속삭였다.
“레라지에 님이 부른 거예요?”
“네.”
일부러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루미에르 역시 평소처럼 제냐를 대했다.
그러니까 손을 붙잡아 왔다는 소리다.
제냐는 루미에르의 손을 쳐 내지 않고 그와 함께 소파에 앉았다. 살짝 그를 훔쳐보자 마찬가지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던 루미에르와 시선이 마주쳤다.
잠시 머뭇거리던 제냐가 입술을 달싹였다.
‘이따 방에서 이야기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 그 일은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마왕의 옆에 있으면서 어느 정도 진정이 됐으니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긴 해야 했다.
그녀의 입 모양을 읽었는지 루미에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약속을 잡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하지만 그런 편안함은 레라지에의 말 한마디에 산산조각이 났다.
“용사가 죽었다는 소문이 수도에 잔뜩 퍼졌습니다.”
제냐가 화들짝 놀라며 레라지에를 쳐다봤다. 레라지에의 말에 마왕이 흥미 가득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호?”
마왕이 픽, 웃음을 흘리더니 레라지에에게 물었다.
“누가 낸 소문인지는 알고?”
“황실 쪽에서 내는 것 같습니다.”
뭐? 움찔, 몸을 떠는데 루미에르가 괜찮다는 듯 제냐의 손등을 토닥였다.
제냐는 차마 루미에르를 쳐다보지 못하고 그의 손을 강하게 붙잡았다.
그러는 사이 마왕과 레라지에는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 갔다.
“신전은?”
“올 것이 왔다는 분위기입니다. 이미 신전 내에서도 퍼지고 있던 소문 같고요.”
“정말 죽었는지는 확인할 수 있나?”
다 알면서 잘도 그런 질문을 했다. 욕을 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 냈다.
“적어도 한 달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건 확실합니다.”
“흐음.”
레라지에의 말에 의미심장한 얼굴로 제냐를 쳐다보던 마왕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좋아, 일단 그 부분은 넘어가고.”
그게 끝?
용사가, 루미에르가 죽은 사람이 됐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는데?
제냐가 결국 참지 못하고 루미에르를 올려다봤다. 시선이 부딪치자 그는 제냐가 그랬듯 입만 움직였다.
‘방에 가서 이야기해요.’
그래, 대화하기로 했으니까. 우선은 레라지에가 가져온 소식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레라지에가 손가락을 튕기더니 마왕에게 문서 하나를 건넸다.
마왕이 팔락팔락 종이를 넘겨 건성으로 내용을 살피며 물었다.
“다른 건?”
“일정이 바뀔 것 같습니다. 소문이 퍼졌으니까요. 확실히 바뀌게 되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초상화는 여기 있고요.”
저건 또 뭔가? 제냐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마왕에게 넘어간 그림을 살피는데 그가 손을 휘저었다.
“잘했어. 그럼 나가 봐.”
“네, 폐하.”
뭔데? 그게 뭔지 알려 주진 않을 생각인가? 제냐가 눈을 찌푸리며 마왕을 쳐다보는데, 그림에 시선을 고정한 마왕이 말했다.
“너는 남고. 옆에는 남든지 말든지.”
그 말에 루미에르가 자리에 버티고 섰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루미에르까지 이곳에 남게 한 건가 초조해지는데, 마왕이 심술궂은 미소를 지었다.
“신전에서 곧 큰 행사가 열릴 거야.”
“…용사가 죽었는데요?”
“그러니까 더 해야지. 그리고 그 행사에 황족들이 전부 참여할 거고.”
이게 이제껏 마왕이 기다렸던 일정인 걸까?
“그리고 우린 바로 그때를 노려 황궁에 들어간다.”
마왕이 제냐에게 들고 있던 서류와 초상화를 건넸다.
“서류는 나중에 방에 돌아가서 따로 읽어 보고…….”
옆에 서 있던 루미에르가 초상화를 대신 받아 들었다. 제냐가 초상화를 살피며 몸을 딱딱하게 굳히자 마왕이 킬킬 웃음을 흘렸다.
‘왜 루미에르도 남아도 된다고 했나 했더니.’
정말이지 성격이 너무 나빴다.
* * *
방으로 돌아온 제냐는 가면을 벗는 루미에르를 향해 가볍게 운을 뗐다.
“불편하진 않아요? 가면요.”
그러자 루미에르가 화려한 금발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답했다.
“괜찮아요. 편하니까.”
“말해 주는 걸 까먹었는데, 그거 엘리고스가 준 게 아니라는 걸 알더라고요.”
제냐가 머리카락을 가리키며 한숨을 쉬었다.
“머리색이 다르다던데.”
“뭐라던가요?”
“딱히 그 외에는 별말이 없었어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어색한 침묵이 깔렸다. 아침의 일도 그렇지만 조금 전 마왕의 방에서 있었던 일도 분위기를 망치는데 기여했다.
말을 고르던 제냐가 결국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 이야기하기로 한 게 있죠?”
“네.”
“우선 그거 먼저 이야기할까요?”
“그래요.”
이번에야말로 피하지 말고 제대로 이야기를 해야 했다.
“일단 사건을 순서대로 살펴보죠. 정확히는 우리가 만나게 된 계기부터.”
동의하냐고 그를 쳐다보자 루미에르가 곧장 설명을 시작했다.
“사고가 있었다고는 말을 했었던가요?”
“네.”
“말 그대로예요. 어제 봤던 그 마법사가 마나 폭주를 일으켰거든요.”
“마나 폭주요?”
“알고 있나요?”
마법을 할 줄 모르지만 보고 들은 건 많아서 그게 뭔지는 알았다.
“마계에서 마력 폭주라고 불리는 것과 똑같은 거죠. 마법사가 통제력을 잃는 거잖아요.”
마법사가 목숨의 위기를 느낄 때 드물게 일어나는 현상으로, 통제력을 잃어 자기 몸속 마나를 터트리거나 또는 주변 마나로 적, 아군 구분 없이 주위의 모든 것을 망가트리는 것.
“네, 맞아요. 오늘 잡혀갔던 그 마법사가 마나 폭주를 일으켰어요.”
제냐가 멀쩡하기 짝이 없었던 남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되물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멀쩡하죠?”
그도 그럴 것이 마나 폭주는 운이 나쁘면 몸속 마나 회로가 모두 꼬여 폭주가 끝나는 즉시 마법사도 사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니, 그건 둘째 치고 그때도 마족이랑 싸우고 있었어요?”
“아니요.”
“그럼요?”
싸움이 아니면 도대체 마법사가 폭주를 일으킬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제냐가 미간을 좁히는데 루미에르가 별것 아니라는 것처럼 말했다.
“뭘 좀 잘못 먹었어요.”
뭘 잘못 먹어야 마나 폭주가 일어난단 말인가? 가볍기 짝이 없는 대꾸에 제냐의 눈썹이 절로 하늘 높이 치솟았다.
“먼젓번처럼 독초라도 뜯어 먹었어요?”
정말 그랬다면 이번에야말로 쓰레기나 주워 먹고 다니는 저 쓸모없는 입을 때려 줄 셈이었다. 눈에 불을 켜자 그가 재빨리 손을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에요.”
“그럼?”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 묻기 전에 알아서 답을 좀 해 줬으면 좋을 텐데. 제냐가 눈을 뾰족하게 뜨고 루미에르를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