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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52)화 (5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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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황녀와 공주

분명 여관 직원이 소개해 준 이 식당의 아침은 맛있었을 것이다. 달걀은 부드럽고 베이컨은 짭조름하니 바삭해서 참 맛있을 텐데.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황녀와 약혼을 했으니까…….’

제냐는 습관처럼 음식을 씹을 뿐, 아무런 맛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맞은편에 앉은 루미에르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어찌저찌 식당까지 오기는 했는데, 그 이후로 루미에르는 제냐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딱딱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선 제냐가 아무렇지 않게 말꼬를 터야 한다는 건데, 문제는 제냐는 전혀 그러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나랑 제레미야의 관계를 몰랐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고백한 순간, 약혼 사실을 밝혔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만약 그의 마음을 받아 주기로 마음먹었다면 어쩔 뻔했나? 아무것도 모르고 약혼녀가 있는 남자랑 사귈 뻔한 것 아닌가?

‘물론 나는 사귈 생각이 없었지만!’

아! 그래서 좋아한다고 말은 하고 사귀자고는 안 한 건가? 약혼녀는 따로 있으니까?

왈칵 치솟는 분노에 다시 루미에르를 째릿 노려보던 제냐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렇게 화를 낼 일이 아니긴 했다. 결국에 제냐와 루미에르는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화를 내는 건 옳지 못했다. 별 사이도 아닌데 약혼 사실을 숨길 수도 있었다.

‘아니, 그게 말이…….’

제냐는 다시 한번 치미는 분노를 내리눌렀다. 도대체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제냐가 제레미야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그래서 나름 친한 루미에르가 제레미야와 엮인 게 싫은 걸까?

‘그럴지도.’

하지만 그건 너무 유치하지 않은가? 난 쟤랑 사이 안 좋으니까 너도 놀지 말라는 건 너무 어린애 같은 사고방식이 아닌가.

‘그러니까 풀자.’

제냐는 고개를 들어 루미에르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녀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루미에르가 홱 고개를 숙였다.

“루미에르.”

제냐의 부름에 루미에르가 잽싸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쫓기는 사람처럼 외치는 것이다.

“제냐, 잘못했어요.”

그 밑도 끝도 없는 사과에 간신히 펴졌던 제냐의 미간이 다시 찌푸려졌다.

“…뭘요?”

제냐는 아득, 갈릴 뻔한 이에 턱에서 힘을 뺐다. 또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그의 얼굴에 수심이 들어찼다.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던 루미에르가 입을 열었다.

“그냥 다요.”

아, 못 참겠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애써 마음을 다잡았는데 왜 또 사람을 건드리는 걸까?

제냐가 후, 길게 숨을 내쉬고 다시 눈을 떴다. 그러고는 생긋 미소를 지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 나 화난 적 없어요.”

“네?”

화났냐고 묻지도 않았는데 화난 적 없다고 하면, 그거야말로 나 화났었다고 알려 주는 꼴이 아닌가? 혀를 깨물고 싶은 걸 참아 낸 제냐가 다시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거예요.”

안 괜찮다고 사방팔방 말하는 느낌이었다. 제냐는 주먹을 꽉 쥐며 루미에르에게 흠 없는 미소를 보여 주기 위해 노력했다.

“네. 아무렇지 않군요, 제냐.”

다행히 루미에르는 제냐가 무슨 답을 원하는지 알아차렸다. 거의 반강제적으로 받아 낸 답이지만 그래도 그녀가 괜찮음을 인정받았다.

제냐는 이쯤에서 완전히 망해 버린 아침 식사를 정리하기로 했다. 괜히 여기서 말을 더했다가는 죄 없는 사람한테 화를 낼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루미에르는 그럴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제냐, 약혼에 대해 할 말이 있어요.”

제냐의 얼굴에 다시 살얼음이 끼었다.

“별로 들을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원해서 한 약혼은 아닙니다.”

듣고 싶지 않다니까? 하지만 제냐가 입을 열기도 전 루미에르가 줄줄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저도 전해 들은 약혼이에요. 부상을 입고 쓰러졌는데, 일어나고 보니 이미 약혼이 끝나 있었습니다.”

그래도 약혼을 한 건 사실이 아니냐고 빈정거리던 제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제가 모습을 보이지 않는 기간이 길어지면 좋지 않다고 여기신 모양이에요.”

미움받고 싶지 않다고 온 얼굴로 말하며 루미에르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제가 만약 그대로 죽었으면, 그 뒤에는 제국과 연합을 단단히 하는 게 신전에도 좋으니까요.”

푸른 눈이 그녀의 표정을 기민하게 탐색했다.

“제 대역을 만들어서 약혼식을 크게 했습니다. 덕분에 제가 다친 소식이 퍼지진 않았어요.”

루미에르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테이블 위 제냐의 손을 붙잡았다.

“신전과 황실에 대한 사람들의 지지도 높아졌고…….”

제냐가 그 손을 쳐 내지 않자 루미에르의 표정에 약한 희망이 들어찼다. 물론 그건 잠시였고, 루미에르는 다시 우울한 얼굴로 속삭였다.

“실제로 만나 뵌 적은 한 손에 꼽습니다. 만났을 때도 딱히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고요.”

덩치는 산만 한 사내가 눈을 내리깔며 연약한 척 잔망을 떨었다. 근데 그게 꼴사납기는커녕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잘 어울렸다.

“약혼 초반을 제외하고는 바빠서 약속을 잡을 시간도 없었고…….”

말끝을 흐린 루미에르가 울멍울멍 눈을 뜨고는 제냐를 쳐다봤다.

“제가 약혼을 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있어서 미처 말을 못 했어요.”

구구절절 긴 설명이 이었다. 그런데 짜증이 안 났다. 그렇게 신경질이 났었는데.

변덕이 죽을 끓었다. 자신이 이렇게 제멋대로인 사람이었나, 잠시 자괴감이 들었지만, 우선 그보다는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설마 그런 일이 잦았어요?”

“네? 뭐가요?”

제냐가 답답함을 참으며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다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일이요.”

“아무래도 상처 치료는 자연 치유력에 기대다 보니까…….”

루미에르는 답을 하면서도 의아한 기색이었다. 도대체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

제냐도 루미에르가 성력도 통하지 않고 마법도 잘 통하지 않는 체질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루미에르가 다치는 일은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계에서는 연일 루미에르의 승리 소식만을 전달받았으니까.’

제냐에게 루미에르는 불패 신화를 가진, 용사님이었다.

너무 안일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마족들이 얼마나 강한지 같이 살면서 뼈저리게 느꼈으면서. 웬만한 상처 정도는 빠르게 아물고 튼튼한 마족들을 알면서.

‘멍청하긴.’

그런 마족들의 곁에 있었기 때문에 부상에 둔감해지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지금은 자책할 때가 아니었다. 제냐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질문을 이었다.

“그때는 얼마나 쓰러져 있었는데요?”

“한 달 정도.”

그렇게 오래? 제냐가 눈을 크게 뜨자 루미에르가 변명처럼 말했다.

“아, 그때는 유독 크게 다쳐서…….”

다친 게 루미에르의 잘못은 아니었다. 제대로 좀 싸우지, 왜 그렇게 크게 다친 거냐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제냐가 크게 숨을 내뱉었다.

“그래서 약혼은 왜 그냥 넘어갔는데요?”

깨어나 보니 이미 끝난 약혼. 형식을 넘어서 대역까지 세운 제대로 된 약혼이었다.

그러니 이제 와 내가 아니었다고 하면 미친놈 취급을 받았을 테다. 분해도 그걸 그대로 따랐을 수밖에 없을 거고. 이를 알면서도 제냐는 부러 심술을 부렸다.

하지만 루미에르가 뱉는 말은 그녀의 상식 밖이었다.

“그냥…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뭐라고요?”

절로 목소리가 커지는데 루미에르가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본래도 딱히 제 의견을 묻고 행동하시는 분들도 아니고.”

황당했다.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 없으니 입을 다문 게 아니라 원래 그랬으니까 그냥 넘어갔다고?

“루미에르.”

루미에르가 그녀의 손을 그러쥐며 말했다.

“제냐를 만날 줄 알았다면 안 그랬을 거예요.”

포인트를 완전히 잘못 짚었다. 제냐가 루미에르에게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이마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런 것까지 설명해야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하아.”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자 루미에르가 다시 사과했다.

“잘못했어요, 제냐.”

“나한테 잘못한 게 아니라 루미에르 본인에게 잘못한 거죠.”

“네?”

제냐는 어린애를 가르치는 것처럼 최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집어넣지 않고 다정하게 말하려 노력했다.

“본인의 권리를 찾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잖아요.”

혹시나 반발이 튀어나올까 얼른 말을 덧붙였다. 속 터지는 이야기를 더 듣고 싶진 않았다.

“통하지 않더라도, 뭐라도 해 봐야 했다니까요?”

말을 하면서 점점 더 열이 났다. 애당초 꺼진 불이 아니었으니 말 몇 마디에 다시 타오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설령 통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나는 만만히 당해 주고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보여 줘야……!”

목소리 끝이 조금 갈라졌다. 이 이상 흥분하는 건 꼴불견이었다.

“아니, 미안해요.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겠죠.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당신 옆에 있는 사람들이 어떨지는 뻔하고.”

사실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동안 루미에르가 자기 이야기를 아예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고, 그와 함께 지내면서 그의 행동에서 이상함을 종종 느꼈으니까.

부모님이 그렇게 믿고 의지하던, 상상 속에 있던 성녀는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루미에르는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지만 성녀가 딱히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 준 것 같지도 않았다. 물론 성녀를 따라 다른 신관들도 그랬을 테고.

그렇지 않고서야 루미에르가 저딴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도대체 당신 옆에 있던 사람들은 왜 다 그 모양 그 꼴이에요?”

생각하면 할수록 열이 치솟아서 머리를 비우려 애쓰는데, 루미에르가 작게 중얼거렸다.

“…라요.”

목소리가 너무 작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네?”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로 되물으면서도 제냐는 루미에르가 또 어떤 답답한 소리를 할까 걱정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그런 게 아니었다.

“이제, 제 옆에 있는 사람은 달라요.”

푸른 눈이 달콤하게 휘며 단내를 풀풀 풍겼다.

“제냐는 저를 제일 먼저 걱정해 주잖아요.”

그리고 그 단내를 풍겨 내고 있을 짙은 믿음을 목격한 순간, 제냐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자신이 저 믿음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나는 루미에르의 곁에 있는 사람을 욕할 자격은 있나?

난 당신이 믿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절대 아닌데.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 믿음을,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전 제냐가 정말 너무 좋아요.”

그래서 진심 가득한 그 말을 들으면서도 제냐는 비겁하게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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