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냐를 두고 방을 나선 루미에르와 레라지에는 아무런 말 없이 5층으로 내려왔다. 루미에르가 레라지에에게 고개를 까딱이며 방문을 여는데, 레라지에가 그를 붙잡았다.
“아스, 그대.”
루미에르가 문을 열다 말고 그를 돌아보자 레라지에가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품에서 작은 봉투를 꺼내 들었다.
“오늘 우리가 꽤 친해진 기념이네.”
루미에르가 레라지에가 건네는 봉투를 빤히 바라보자 그가 봉투를 흔들었다.
“초상화를 구하면서 하나 더 구해서 말이야. 제냐의 어린 시절 초상화야. 작긴 하지만, 펜던트에 들어갈 정도는 되네. 그 시계도 가능하겠지.”
레라지에가 루미에르의 목에 걸려 있는 회중시계를 눈짓했다. 그 말을 이해한 루미에르가 즉각 손을 뻗어 작은 봉투를 받았다.
그러자 레라지에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참 투명하군, 귀여워!”
루미에르가 그런 레라지에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까딱였다. 레라지에가 그럼 쉬라며 먼저 방으로 사라지자 루미에르가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얼른 봉투 안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루미에르는 문 앞에서 바로 봉투를 뜯었다.
그 안에는 레라지에의 말처럼 회중시계에 들어갈 만한 아주 작은 개인 초상화가 들어 있었다.
그의 옆구리에 끼워진 제냐의 가족 초상화 속 모습보다 조금 더 성장한, 그의 기억 속 모습과 흡사한 얼굴에 루미에르가 환하게 웃었다.
“제냐.”
그는 얼른 회중시계를 열고 시계의 맞은편에 그림을 집어넣었다. 꼭 맞춘 것처럼 딱 크기가 들어맞았다. 루미에르는 소중히 회중시계를 붙들다가 그 사진에 작게 입을 맞췄다.
* * *
제냐는 이른 아침, 그녀를 깨우는 루미에르의 손짓에 눈을 떴다.
“루미에르.”
이미 씻고 나왔는지 루미에르에게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루미에르가 작게 눈웃음을 흘리다가 못마땅한 얼굴로 물었다.
“오늘도 일을 하는 건가요?”
“…모르겠는데.”
제냐가 질린 얼굴로 천장을 바라봤다. 전날, 마왕에게 붙잡힌 제냐는 논 만큼 일을 하라는 마왕의 말도 안 되는 명령에 따라 야근을 했다.
“쉬라고 했더니 사고만 치지 않았어? 일을 하면 시끄러울 일도 없겠지.”
얄밉기 짝이 없는 그 얼굴에 서류를 냅다 던졌으면 참 속이 시원했을 텐데.
제냐가 폭 한숨을 쉬며 손목을 확인했다. 깨끗하고 하얀 손목은 전날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일을 시키겠다고 손목까지 고쳐 주다니, 마왕은 지독했다. 제냐가 가만히 손목을 바라보고 있자, 루미에르가 제냐의 손목을 붙잡아 가볍게 쓸어내렸다.
“안 했으면 좋겠어요.”
“…아침은 내려가서 먹을까요?”
괜히 여기서 식사를 했다가는 마왕의 전화를 받고 불려 나갈지도 몰랐다.
전날, 저녁을 먹으라고 내려보내기에 일이 다 끝난 줄 알았다가 식사 시간이 끝나자 칼같이 그녀를 불러내어 일을 시키던 마왕을 떠올린 제냐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조금 불편하겠지만.”
제냐가 미안한 얼굴로 그의 맨얼굴을 바라봤다. 나가서 식사를 하면 여러모로 루미에르가 불편할 게 뻔했다.
하지만 루미에르는 괜찮다는 듯 웃었다.
“아예 이 여관을 벗어나야겠네요. 그럼 얼른 씻고 나와요. 연락이 와도 무시할게요.”
장난스러운 그 말에 제냐가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요, 얼른 씻어야지.”
마왕이 연락 오기 전 얼른 이 방을 떠나야 했다.
제냐는 정말 빠르게 준비를 마쳤다. 로브는 아니지만 얼굴을 가리게 챙이 있는 모자까지 챙겼다. 제냐는 레라지에라도 마주칠까 서둘러 루미에르를 데리고 1층으로 내려갔다.
그대로 여관을 나가려는데, 루미에르가 제냐를 붙잡았다.
“여관 직원에게 적당한 식당을 알아 올게요.”
하긴, 전날 여관 직원이 추천했던 식당은 나쁘지 않았다.
“그럴래요?”
“네, 잠시만 기다려요.”
루미에르가 다정하게 웃으며 프런트 앞에 있는 직원에게 다가갔다. 제냐는 루미에르를 기다리며 적당히 여관 한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바로 그 뒤가 여관에 있는 식당이었기에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조금씩 들려왔지만, 여관 자체가 고급스러운 덕인지 그리 시끄럽지는 않았다.
바로 뒤에 앉은 사람들의 대화 소린 잘 들렸지만 딱히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 악취미는 없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용사에 대한 이야기만 하지 않았다면.
“용사 말이야.”
지루하게 앉아 있던 제냐가 허리를 바로 세웠다.
“이번에 용사가 저기 남쪽에 내려간 거 알지?”
“당연하지. 소문 자자하던데.”
“대단하신 용사님께서 이번에 글쎄 논을 통째로 태워 먹었다지 뭐야?”
빈정거림이 가득한 목소리에 제냐가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그건 상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뭐?”
황당하다는 기색이 가득한 목소리에도 처음 이야기를 꺼낸 이는 쯧쯧 혀를 차며 말을 이어 나갔다.
“덕분에 이번에 농작물 가격이 더 오르게 생겼다니까?”
제냐는 상대가 용사에게 그게 무슨 태도냐고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럴 줄 알았다. 도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논을 다 태워 먹어?”
하지만 상대 역시 용사에게 좋은 감정을 가진 건 아니었던 듯했다.
“용사라는 게 마족 하나 깔끔하게 처리를 못 해서 그렇게 피해를 끼치고…….”
믿을 수 없는 대화의 흐름에 제냐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애당초, 용사가 잘했으면 진작에 마족들이 다 처리됐을 거 아니야?”
“내 말이. 도대체 어디서 뭘 하길래 매일같이 사람들이 죽어 나가냔 말이야.”
지금 저 미친놈들이 뭐라고 입을 놀리는 건가.
“성녀님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우리는 다 망했을 거라고.”
“어휴. 얼굴은 반지르르하다던데.”
“그냥 얼굴마담 아니야?”
푸핫! 하고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는 꼴이 아주 불쾌했다. 제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몸을 돌려 두 남자를 쳐다봤다.
‘못생긴 것들이…….’
누구 얼굴 가지고 말을 꺼낼 입장이 전혀 아니었다. 제냐가 씩씩거리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은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 갔다.
“실질적인 역할은 동료들이 다 한다는 것도 같고.”
“왜, 어디야, 무슨 마을에서 사람들이 도와 달라고 그렇게 빌었다는데 다른 데 일 있다고 그냥 가 버렸다며?”
화려한 옷을 입은 남자들은 그 비싸 보이는 옷과는 달리 입이 저급했다.
“그게 어디 무도회였다지?”
“허! 그래 봐야 우리랑 똑같은 평민이면서.”
이런 생각을 하고 싶진 않았지만 절로 튀어나오는 감상이 있었다. 돈만 많은 졸부.
“귀족들이 용사님, 용사님, 해 주니까 자기가 뭐라도 된 줄 아는 거겠지.”
“귀족 나리들 사이에서는 또 평민이라고 쳐주지도 않는다던데.”
“어린애들이야 뭣 모르고 용사를 찬양하지.”
“현실을 모르니까.”
“남자애들은 장래 희망이 용사라고 그러잖아.”
“어휴. 나중에 나이 들면 나아지겠지.”
“그러게 말이야. 그렇다고 어린애들 환상을 깨트릴 수도 없고.”
차가운 눈으로 그들을 응시하던 제냐가 냉정하게 몸을 돌렸다. 지금 가서 저들에게 따지고 드는 것도 우습고 여기서 더 대화를 듣고 싶지도 않았다.
마침 루미에르도 말이 다 끝나 가는 것 같으니, 미리 여관 밖으로 나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제냐는 그녀를 돌아보는 루미에르에게 밖에 나가 있겠다고 입을 달싹였다. 그와 동시에 또다시 듣기 싫은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다 여자 잘 만나서 그렇게 우상화되는 거라니까?”
“맞아. 다 그분 덕이지.”
“용사라는 게 참 좋아. 그렇지?”
“꼴에 그런 대단한 분을 만나기도 하고.”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제냐가 짜증스레 그들을 노려봤다. 갈 데까지 가는 대화에 조용히 좀 하라고 한마디 쏘아붙여 줄까 하는데, 믿기지 않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녀랑 약혼했으니까 다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거라고.”
지금 저것들이 뭐라고 한 거지?
“폐하께서 아량이 깊으시지. 유일한 외동딸이신 황녀 전하를 짝으로 점지해 주시고 말이야.”
폐하. 여기는 제국이니까 저들이 폐하라고 말할 사람은 제냐의 삼촌인 황제뿐이었다.
그리고 제냐가 알기로 외숙모는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했으니, 황제의 유일한 자식은 그녀의 사촌인 제레미야뿐이었고.
“그럼, 그럼. 우리 폐하만큼 성군이 또 어디 있어?”
“이번에 피해를 본 지역도 폐하께서 성금을 보내 주셨다던데.”
“사위 잘못 점찍어서 욕보시는 거지.”
그럼 지금 저 사람들 말은.
“뭐, 약혼은 약혼일 뿐이지. 파혼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
“하긴 제레미야 황녀 전하가 뭐가 아쉬워서……. 그분만큼 고상한 레이디가 어디 있다고?”
“암암, 제국 최고의 신붓감인데 말이야!”
“그렇게 아름다우시다며? 화려한 미인이라던데.”
그러니까 루미에르와 제레미야가 약혼을 했다는…….
“제냐, 5분쯤 걸어가면 괜찮은 식당이 하나 있대요. 제냐가 좋아할 만한 음식을 팔 것 같은데 그리로 가요.”
크게 숨을 들이쉰 제냐가 어느새 그녀의 앞으로 다가온 루미에르를 멍하니 올려다봤다.
“제냐?”
제냐는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루미에르를 보며 멍청하게 물었다.
“제레미야랑 약혼했어요?”
루미에르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입을 뻐끔거리다 그녀의 눈치를 살피듯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그 순간 제냐의 기분은 시궁창에 처박혔다.
‘어이가 없네.’
차라리 무심하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면 기분이 이렇게 나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왜 이걸 이제 알았지?’
그야, 제냐에게 용사의 약혼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제레미야라니? 지금 제레미야랑 약혼한 주제에 나한테 좋아한다고 이야기한 건가?
‘미쳤나?’
물론 당시에 루미에르는 제냐가 제레미야의 사촌이라는 걸 몰랐겠지만, 그래도 그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제냐에게도 바로 이야기를 해 줬어야 했다.
“이게 무슨 개족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