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제냐는 레라지에의 안내에 따라 기분 좋게 주변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인간인 제냐에게 마족인 레라지에가 인간 세상을 안내해 주는 게 조금 아이러니했지만, 뭐 다들 즐기고 있으니 나쁜 건 아니었다.
거기다가 여관 직원이 추천해 준 식당은 정말이지 훌륭했고 이어서 음식점 직원에게 추천받았던 카페도 분위기가 좋았다.
그러니까 새 손님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제냐는 기분 좋게 타르트를 먹고 있다가 잔뜩 큰 소리를 내며 카페로 들어서는 사내에 고개를 들었다.
“여기 아무거나 찬 음료로 하나 가져 와!”
제냐네 일행의 대각선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사내의 막무가내식의 주문에도 직원은 업무용 미소를 잃지 않고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뭐가 그렇게 짜증 나는 건지, 거칠게 머리를 헤집으며 상대에게 목소리를 높이는 사내에게서 관심을 끊은 제냐가 맞은편의 레라지에를 쳐다봤다.
“조금 소란스러워질 것 같네요.”
그러니까 적당히 먹었으면, 이제 일어나자는 소리였다. 레라지에 역시 동의하는 바인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얼른 비우고 일어나지.”
루미에르도 진작에 차를 비우고 자기 몫의 디저트를 제냐에게로 밀어 준 상태였기에 그들은 금방 자리를 정리할 수 있었다. 만약 사내의 큰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대로 자리를 피했을 것이다.
“이게 다 그 용사 놈 때문이야!”
카페가 울릴 정도로 크게 외치는 사내의 목소리에 제냐와 레라지에의 시선이 부딪쳤다.
갑작스러운 말에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제냐는 그녀만큼이나 놀란 것처럼 보이는 레라지에에 당황했다.
‘아니, 왜 저렇게 놀라?’
슬쩍 돌아본 루미에르조차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제냐가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일어나자 말하려는데, 또다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씨X, 걔가 그렇게 된 게 왜 우리 탓인데?!”
“진, 목소리를 낮춰.”
“낮추긴! 누가 듣는다고!”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면서 아무도 그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게 더 어이가 없었다. 제냐가 헛웃음을 삼키는데, 앞에서 레라지에가 작게 속삭였다.
“이 이야기를 좀 듣다 가도 되겠나?”
“…네?”
“내가 용사에게 관심이 많아서.”
그제야 제냐는 용사가 레라지에의 잘생긴 미남에 포함된다는 걸 떠올렸다.
‘맞다.’
제냐는 귀를 쫑긋 세우고 저들의 대화에 집중한 레라지에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루미에르와 눈을 맞췄다.
어떻게 하냐고, 눈으로 질문을 던졌지만 질문을 알아듣지 못한 건지, 루미에르는 맑은 눈으로 그녀를 보며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혼자서만 안절부절못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제냐가 결국 몸에 힘을 빼고 다시 좌석에 허리를 기댔다.
그리고 레라지에가 그렇듯 저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아니, …하잖아. 그게 왜…….”
다만 아까보다 목소리를 줄인 탓인지 그들의 대화가 잘 들리지 않았다. 제냐가 눈썹을 치켜세우는데, 옆에서 루미에르가 작게 속삭였다.
“용사가 실종됐다는군요. 그걸로 신전의 추궁을 받는 모양입니다.”
제냐가 놀라 루미에르를 쳐다봤다. 이런 이야기를 왜 이렇게 담담히 한단 말인가?
루미에르는 제냐의 표정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아예 본신전으로 소환이 됐는데 가지 않고 버티고 있다네요. 하지만 자기 외에는 다 소환에 응해서 불안하대요.”
저 사람이 누군데, 신전에서 루미에르가 실종됐다고 저 인간을 소환한단 말인가?
“이제는 겁에 질려서 한탄을 하고 있고요. 전부 알려 줄까요?”
원한다면 저들의 대화를 그대로 알려 줄 것 같은 루미에르에 제냐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앞에 앉은 레라지에를 의식하며 물었다.
“용사가 실종됐다고요?”
마왕이 레라지에에게도 루미에르의 정체를 밝혔는지를 알 수 없으니 별수가 없었다. 레라지에가 알고 있다고 해도, 지금처럼 모르쇠로 굴었겠지만.
“그렇다네요.”
“하지만 저 말이 진실일 리가 없잖아요. 정말 용사가 실종됐다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지 않아요?”
식사를 하기 전 두세 시간가량 시가지를 돌아다녔지만 그 어디에도 용사의 실종과 관련된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다. 그래서 자연스레 루미에르와 관련된 이야기는 윗선에서 막아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반대편에 있는 사람 말로는 저자가 용사의 동료 중 하나라네요.”
“…네?”
“용사의 동료요.”
정말로? 제냐가 벙쪄 있는데 맞은편에서 레라지에가 끼어들었다.
“그래, 저자가 용사의 동료 중 하나인 마법사라는군.”
그 말에 제냐가 삐걱거리며 레라지에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눈을 찌푸렸다.
“이야기를 들어선 진짜 같긴 한데.”
“…그, 용사를 직접 보신 적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동료들을 보신 적은 없으세요?”
“글쎄. 봤다고 해도 저 정도 얼굴이면 기억 못 했을 거야. 잠시만…….”
얼굴에 관해서는 참 냉정했다.
맘 같아서는 얼른 루미에르를 붙잡고 정말 저자가 당신 동료냐고 묻고 싶었다. 제냐가 이를 악무는데, 루미에르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 왔다.
제냐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루미에르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라는 건가?’
제냐가 그 미소의 의미를 이해해 보려는데, 또다시 레라지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더 들을 건 없겠군. 슬슬 일어날까?”
아.
여기서 미적거리거나 충격을 받은 모습을 보이는 건 절대 좋은 일이 아니었다. 제냐는 비틀거리지 않으려 애쓰며 다리에 힘을 주고 레라지에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을 마치고 카페를 나서자 레라지에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왕이면 가짜이면 좋겠어.”
“…네?”
“용사가 실종이라니, 너무 슬픈 일이 아닌가.”
여기서 뭐라고 반응해야 하는 걸까? 제냐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레라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 아름다운 외모가!”
그 얼굴의 주인이 바로 코앞에 있는데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면서 말은 참 잘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그 용사가 정말이지 매우 아름답다네. 폐하에 비견되는 아름다운 자이지. 특히 그 호수 같은 푸른 눈이 얼마나 대단한지 아나?”
레라지에가 수심이 짙은 얼굴로 웅얼거렸다.
“그런 얼굴을 잃은 건 나라의, 아니, 인간계의 손해야.”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 분명할 그 이야기를 들으며 제냐가 어색하게 웃었다.
“잠시 여관으로 돌아가서 쉬었다 갈까요?”
우울해하는 레라지에도 관광에 흥미를 잃은 것처럼 보였고, 무엇보다 제냐도 루미에르에게 정확히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레라지에는 제안을 거절했다.
“아니야, 괜히 나 때문에 그럴 순 없지.”
“괜찮아요. 매우 즐거웠는걸요.”
제냐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답하자, 레라지에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그럼, 딱 한 군데만 더 들렀다 가지. 폐하께서 명령하신 일도 처리는 해야 하니까.”
“아.”
그거라면 제냐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레라지에가 시간을 확인하며 길을 안내했다.
“미리 연락해 뒀으니 정보만 받아 오면 될 거야.”
제냐는 궁금증을 내리누르고 다시 레라지에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레라지에의 목적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밖에서 잠시 기다리게.”
시커멓고 허름한 건물을 가리키는 레라지에에게 제냐가 말했다.
“같이 들어가도 괜찮은데요.”
“딱히 바람직한 곳은 아니라네. 이래저래 험악한 놈들도 많고.”
이렇게 아무것도 확인하지 못하면 따라 나온 목적이 사라지는 셈이었다. 제냐가 다시 한번 말을 하려는데, 레라지에가 주변을 돌아보더니 야외석이 길게 늘어진 카페를 가리켰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게.”
그러고는 제냐가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손을 들어 음료를 주문하고는 붙잡을 새도 없이 사라졌다. 쏜살같이 사라진 레라지에에 제냐가 눈을 찌푸렸다.
“따라 나온 보람이 없네요.”
“몰래 숨어서 엿들을까요?”
제냐가 반색했다.
“가능해요?”
“저 혼자라면…….”
“그래요? 그럼 부탁해요.”
그 말에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던 루미에르가 멈칫하며 물었다.
“혼자 있어도 되겠어요?”
“이렇게 날도 밝고 사람도 많잖아요. 그리고 잠깐이고요.”
날이 좋은 덕인지 이제껏 돌아다니던 시가지보다 외각이긴 했지만 카페 야외석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제냐가 앉아 있는 곳과 레라지에가 들어간 건물 간의 거리를 가늠해 보던 루미에르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소리를 질러요.”
“네, 그럴게요.”
몇 번 더 망설이는 것처럼 제냐를 쳐다보던 루미에르가 빠르게 자리에서 사라졌다. 제냐는 눈 깜짝할 새에 텅 비어 버린 자리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대단하네.”
그러고는 다시 건너편의 시커먼 건물을 바라보는데, 테이블 위로 잔이 놓였다.
“응? 일행분은 어디 가셨어요?”
차를 건네며 묻는 카페 직원의 물음에 제냐가 작게 웃었다.
“잠시 주변을 보고 오겠다고 했어요. 곧 올 거예요.”
“그래요?”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희한하다 중얼거리며 직원이 사라졌다. 제냐가 그녀의 몫으로 나온 음료를 들이켰다.
얼떨결에 떠밀려 들어온 곳치고 음료는 나쁘지 않았다.
적당히 고소하고 달콤한 음료의 재료를 가늠해 보며 제냐는 조금 전, 카페에서 있었던 일을 다시 떠올렸다.
‘그 남자가 동료가 아니라면…….’
이제 슬슬 루미에르의 실종 소식이 사람들 사이로 퍼져 나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소문이 점점 더 커지면 사람들의 불안이 커질 테고.
‘그 전에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
만약 남자가 정말 용사의 동료라면, 신전에서도 최선을 다해 루미에르를 찾고 있는 것 아닌가?
“감정을 받아 주니 마니, 고민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는데.”
씁쓸한 미소를 흘리며 잔을 내려놓는데, 그녀의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졌다. 벌써 돌아온 건가 의아함에 고개를 드는데, 순간 억센 손아귀가 그녀의 손목을 붙들었다.
“너, 아까부터 뭔데 계속 내 옆에서 알짱거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팔목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얼굴을 사정없이 일그러트린 제냐가 고개를 들어 손의 주인을 바라봤다.
“미친…….”
카페에서 소란을 피우던, 용사의 동료라고 주장하던 그 남자가 험악한 얼굴로 제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