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냐, 이제 일어나요.”
몽롱한 정신 사이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살살 그녀의 어깨를 흔드는 손길.
제냐는 이불에 가득 묻혀 있다가 눈을 떴다.
“아.”
잠기운 하나 없는 얼굴로 제냐를 깨운 루미에르가 작게 웃다가 욕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제냐가 스르륵, 몸을 일으켰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대충 손으로 빗어 정리한 제냐는 소리가 나는 배를 붙잡았다.
“아침 올려 달라고 할까?”
제냐가 방 한쪽에 마련된 1층과 연결된 통신구에 손을 올리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응?”
혹시 루미에르가 먼저 식사를 올려 달라고 이야기를 했던 걸까?
“이제껏 열심히 시중을 든 보람이 있구나.”
제냐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아직 제대로 씻지도 못해 부스스한 그녀와 달리 아침부터 반짝반짝 광이 나는 레라지에를 마주했다.
“…레라지에 님?”
“제냐, 잘 잤나?”
“아, 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색하게 질문을 건네면서 제냐는 머리를 굴렸다. 레라지에가 왜 그녀를 찾아온 걸까? 제냐는 가장 무난한 질문을 던졌다.
“식사 때문에 오신 건가요?”
“아니, 그건 아니고. 오늘 정보를 알아보려 나갈 건데.”
“네에…….”
그걸 나한테 왜 말하나 싶어 말끝을 흐리는데, 레라지에가 밝게 웃으며 물었다.
“그대와 아스도 함께 가겠나?”
제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저희도요?”
“그래, 폐하께서도 허락하셨네. 오늘 폐하는 방에서 쉬시겠다고 하셨고.”
“아.”
“인간계가 어색하다며? 이왕 이렇게 나온 김에 좀 돌아보는 게 좋지 않겠어?”
제냐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마왕이 정확히 뭘 원하는지 모르는 지금, 레라지에를 따라가 그가 원하는 정보가 뭔지 알아 두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미인계도.’
아직도 미련을 놓지 못한 제냐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아침 식사를 하고… 10시쯤 만날까?”
슬쩍 그녀의 옷차림을 훑으며 약속 시간을 정하는 레라지에에 다시 민망함이 찾아왔다. 제냐가 어색하게 웃으며 옷을 추스르는데, 욕실 문이 열렸다.
“제냐?”
제냐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뒤를 돌아봤다. 다행히 루미에르는 가면은 쓰고 있었다.
‘그런데 옷은 어디다 내팽개쳤어?’
정말이지 마왕이나 용사나 다 똑같은 놈들이었다. 아니 용사가 더 했다.
먼젓번도 그렇고 도대체 왜 가운도 아니고 수건으로 허리춤을 대충 가리고 나온단 말인가?
그것도 하필 레라지에가 있을 때.
제냐가 슬쩍 레라지에의 기색을 살피는 데 아니나 다를까 그에게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으어!”
‘너무 좋아하는데.’
얼굴을 붉게 물들인 레라지에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물론 손 틈 사이는 다 벌어져서 열심히 루미에르의 몸을 훑고 있었고.
“허억.”
본인도 인지하지 못하고 튀어나오는 것 같은 소리에 질색한 제냐가 방 안쪽으로 한 발 물러났다. 그러나 잔뜩 흥분한 얼굴이 그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제냐가 다시 한번 뒤로 물러나는데, 도대체 언제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건지 루미에르의 몸에 등이 부딪쳤다.
훅 끼치는 온기와 살짝 눅눅한 물기가 느껴지는 등. 어쩐지 레라지에의 얼굴이 점점 더 붉어진다 했다.
제냐는 그녀를 감싸듯 멈춰 선 루미에르를 힐끗 올려다봤다가 그녀의 뒤에서 뻗어져 나온 팔이 문을 붙잡는 걸 발견했다.
“나가.”
그리고 귀 옆에서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까지.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솔직히 이번에는 레라지에가 좀 잘못했다.
제냐와 눈이 마주치자 레라지에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미안하네. 내가 너무 놀라서.”
불쾌해하기는커녕 냉큼 뒤로 물러난 레라지에가 다시 루미에르를 쳐다봤다.
“그런데 저기, 뒷모습도 좀 보여 주면 안 되나?”
미안하다면서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헛웃음을 흘리는데, 루미에르가 문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끼긱, 문이 소리를 내자 레라지에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물러났다.
“그럼 조금 이따 보지, 제냐.”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레라지에의 얼굴을 못 본 척하며 제냐가 서둘러 인사를 건넸다.
“네, 레라지에 님.”
제냐가 인사를 건네기가 무섭게 루미에르가 쾅, 문을 닫았다. 덕분에 자연스레 제냐는 문과 루미에르 사이에 갇혀 있는 꼴이 됐다. 제냐는 문을 꾹 누르고 있는 그의 팔을 두드렸다.
“이제 좀 나와요.”
루미에르가 몸을 떼어 내자 등에 찬기가 돌았다. 살짝 몸을 떤 제냐가 몸을 돌려 그를 쳐다봤다.
“하나도 안 닦고 나왔어요?”
그의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제냐가 푹 한숨을 쉬며 그를 조금 더 밀어냈다.
착, 손바닥에 달라붙은 젖은 살결에 손끝이 움츠러들 것 같았지만 제냐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떼어 냈다. 그때 루미에르가 눈매를 좁히며 물었다.
“이따 보자는 게 무슨 소리예요?”
“자기가 정보 알아보려고 나가는데 10시쯤 같이 나가자고 하더라고요. 구경을 시켜 주려는 것 같은데 여러모로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알겠다고 했어요.”
“…둘이서요?”
“당연히 셋이죠.”
제냐가 손을 뻗어 가면에 손을 댔다.
루미에르가 허락을 했는지, 가면은 부드럽게 벗겨졌다. 제냐는 몸과 마찬가지로 물에 젖은 얼굴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뭐가 급하다고 이렇게 나왔어요?”
“누가 온 것 같아서…….”
턱선을 타고 떨어지는 물방울의 흔적을 쫓다가 다시 그의 맨몸을 몸에 담은 제냐가 서둘러 시선을 루미에르의 얼굴로 고정했다.
하지만 그것도 딱히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제냐아.”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음울하게 말끝을 흐리는 루미에르에 제냐가 말을 더듬었다.
“네, 네?”
“정말, 정말 해야 합니까? 못 할 것 같은데.”
자신감 없는 얼굴로 입술을 깨무는 루미에르는 전에 없이 처연하고 청순해 보였다.
‘자신 없긴!’
얼굴이 붉어질 것 같은 느낌에 제냐가 다시 한번 그를 쭉 밀어내며 외쳤다.
“다 필요 없고, 가서 옷이나 입어요!”
“네?”
“물 다 흐르잖아요!”
제냐는 어리둥절한 채로 그녀에게 밀리는 루미에르를 욕실 쪽으로 계속해서 밀었다.
정말 이상하게 신경질이 났다.
* * *
준비를 마친 제냐는 가면을 써도 잘생김을 숨길 수 없는 루미에르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내가 한 말 다시 말해 봐요.”
제냐가 어깨를 털어 주며 말하자 루미에르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무시하지 말기, 먼저 말을 걸어보기, 눈이 마주치면 웃어 주기, 이름을 불러 주기……. 정말 이걸로 될까요?”
저 얼굴을 하고 왜 저렇게 자신이 없는 걸까? 답답함을 참다못한 제냐가 저도 모르게 말했다.
“정 못 하겠으면 저한테 하는 것처럼만 해 줘요.”
“네?”
말을 뱉어 놓고 조금 당황했지만 제냐는 뻔뻔하게 굴기로 했다.
“레라지에가 저라고 생각하라고요.”
알겠냐고 눈을 치켜뜨자, 루미에르가 곱게 눈을 접었다.
“네, 알겠어요.”
아까보다 한결 편해 보이는 얼굴에 마음을 놓은 제냐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루미에르를 챙겨 1층으로 내려갔다.
“…그런가? 예약을 미리 해야 할까?”
그리고 프런트 직원과 이야기 중인 레라지에를 발견했다.
“저희가 해 드리겠습니다.”
“고맙군. 레라지에로 1시로 잡아 주게.”
그는 전날 입었던 은빛 로브를 입고 있었는데 여전히 많은 이들의 이목을 사고 있었다.
“점심 코스 요리로 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그래, 제일 맛있고 비싼 걸로.”
“네!”
“신경 써 줘서 고맙네.”
레라지에가 꽤 큰 팁을 쥐여 줬는지 직원의 얼굴이 환해졌다.
“감사합니다!”
제냐는 사람들의 이목이 더 쏠리기 전 얼른 레라지에에게로 다가갔다.
“레라지에 님.”
“왔나? 괜찮은 식당을 하나 추천받았어.”
“그렇군요.”
“식사 시간 전까지는 좀 돌아다니자고.”
“네.”
얼른 나가자고 몸을 돌리던 레라지에가 제냐의 뒤에 있던 루미에르를 돌아봤다.
“아스도 가 볼까?”
딱히 답을 바라는 건 아니었다는 듯 레라지에가 다시 몸을 돌리는데, 루미에르가 입을 열었다.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립니다. …레라지에.”
“오.”
레라지에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기쁘게 웃었다. 그러고는 어깨를 들썩이며 여관을 나섰다.
약간 망설이긴 했지만 충분히 노력한 루미에르에게 제냐가 잘했다는 듯 그의 팔뚝을 두드렸다. 그러자 루미에르가 기다렸다는 듯 몸을 가깝게 붙여 왔다.
보는 눈이 많았지만 제냐는 그런 루미에르를 밀어내지 않고 받아 줬다. 그러자 살짝 불거져 있던 루미에르의 턱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렇게 세 일행은 나쁘지 않은 분위기로 여관을 나섰다.
그 분위기가 계속 유지되면 참 좋았을 텐데.
“악! 야, 양팔이 부러진 것 같아.”
“이 미친놈들은 뭐야?”
제냐는 겁에 질린 채, 바닥을 구른 사내 하나와 그 사내를 부축하는 친구로 보이는 남자 하나, 그리고 무장을 한 채 건물 안에서 우르르 뛰어나오는 사람들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여길 따라온 거지.’
제냐가 할 말 많은 얼굴로 작금의 상황을 만든 두 인물을 돌아봤다.
자기가 손을 줘 놓고 금방이라도 욕을 뱉어 낼 것 같은 루미에르와, 반대로 루미에르의 손을 쥐고는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하게 웃는 레라지에.
“손이 참 멋있군!”
“…고맙, 고맙…….”
레라지에의 칭찬에 어떻게든 대꾸하려고 노력하던 루미에르가 결국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기들만의 세상에 빠져 있는 둘의 모습에 제냐가 결국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 먼저 해결하는 게 어떨까요?!”
일을 친 사람들은 저토록 태연한데 제냐만 이렇게 속이 터지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최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