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46)화 (46/145)

16607583852106.jpg

황제는 이른 아침임에도 틈 하나 없이 완벽한 치장을 한 딸을 내려다봤다.

“폐하.”

고개를 숙이는 목과 드레스를 붙잡은 손 모든 곳에 품위와 우아함이 넘쳤다.

황녀라는 위치를 제하고도 사교계에서 가장 고상한 여성이라는 평을 받는 그의 딸.

“이리로.”

황제는 곧게 선 제레미야의 모습을 품평하듯 살피다 쯧, 혀를 찼다.

남들은 완벽하다 칭송한다는데, 황제에게 제레미야는 늘 부족해 보이고 못나 보이는 딸이었다.

머리가 좋은 건 알았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둘은 알았다.

하지만 똑똑해서 뭐 어쩌려고?

‘그래 봐야 황녀인데.’

아무리 그가 자리를 잘 닦아 놓아 봐야 황제의 자리는 결국 다른 사내놈에게 넘어가는 것이다. 황녀와 결혼한 그가 데릴사위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처럼.

나중을 생각하면 적당히 숙일 줄도 알아야 했건만, 제레미야는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못 했고, 고분고분 웃어 주는 걸 싫어했다.

황제인 저조차도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이들의 발밑에 고개를 숙였고, 기회를 엿봤다. 그런데…….

“쯧.”

언제나처럼 고상하게 고개를 뻣뻣하게 치켜든 딸을 보고 있자니 속이 콱 막혔다.

무거운 눈으로 제레미야를 내려다보던 황제는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흐트러짐 없는 딸에게 불쑥 명령했다.

“살을 좀 빼야겠다.”

“네?”

“용사가 죽어 간다는데, 약혼녀인 네가 너무 멀쩡한 것도 보기 좋진 않지.”

“아.”

제레미야는 용사의 실종 소식을 알고 있었으니 이것만으로도 그가 하려는 바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짐작하면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제레미야에 되레 황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제 슬슬 네 짝을 새로 찾아야겠구나. 어느 정도 잠잠해진 뒤가 좋을 테니 반년 뒤가 어떨까?”

“…네. 따르겠습니다.”

“행동거지는 조심하고, 파티 참석은 당연히 안 된다.”

“네.”

“가 봐.”

황제는 조용히 자리를 떠나는 제레미야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봐도 못마땅했다.

하지만 황제는 제레미야의 생각을 오래 붙잡진 않았다. 그에게는 제레미야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넘쳐 났으니까.

* * *

제냐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마왕을 어이없는 눈으로 쳐다봤다.

“…알고 계시던 것 아닌가요?”

“전혀.”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는 게 황당했다. 그럼 아까 그 시선은 도대체 뭐였지?

자기 혼자 비밀을 까발린 셈이 된 제냐가 억울함을 담아 따지듯 물었다.

“어째서죠?”

그 어조에 마왕이 눈매를 찡그렸다.

“네가 말을 안 했으니까.”

마왕의 괴상망측한 표정에 그녀는 비네 자작이 정말 침묵했다는 걸 깨달았다. 제냐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중얼거렸다.

“제가 괜한 말을 했네요.”

마왕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황당한 상황에 서로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는데 레라지에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제냐, 그대가 황족이라는 거지?”

그러더니 제냐의 손을 양손으로 꼭 붙잡고 눈을 빛내는 것이다.

“역시 이 매력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었어.”

하지만 레라지에가 뭘 더 할 틈도 없이 루미에르가 제냐의 손을 빼냈다. 다행히 전처럼 무례한 느낌은 아니었다.

제냐는 레라지에가 루미에르의 행동을 지적하기 전 입을 열었다.

“아니요, 그건 아닌데요.”

“응?”

이건 정말 확실히 하고 싶었다. 제냐는 황족이 아니었다.

“황족은 아니에요. 전 황제의 친조카고 황제는 데릴사위니까요.”

“아.”

제냐는 황제를 싫어했고, 따라서 그와 한 묶음으로 엮이고 싶지 않았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한 건 이 때문이었다.

“저는 굳이 따지자면 왕족이죠. 어머니가 왕비셨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세상에! 공주님이라니!”

마왕의 물음은 레라지에의 환호에 묻혀 버렸다.

양손을 번쩍 든 레라지에가 사실 황녀님보다는 공주님이 더 있어 보이지 않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루미에르는 제냐의 옆에 붙어 그녀에게 뻗어지는 레라지에의 손을 밀어내기 바빴다.

그때 한동안 침묵하던 마왕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다 거짓말 아니야?”

세상에서 제일 억울한 말이었다. 제냐가 저도 모르게 홱 고개를 들어 마왕을 노려봤다.

“제가 그런 거짓말을 왜 하나요?”

마왕이 별다른 대꾸 없이 제냐의 옆에 있는 루미에르를 눈짓했다. 그 시선의 의미를 깨달은 제냐의 표정은 더 괴상해졌다.

그러니까 루미에르 때문에 제가 공주에다가 황제의 조카라고 이야기했다고?

“나라가 망해서 그렇지 왕족은 맞아요. 아비에라고, 한때 좀 잘나갔던 왕국이에요.”

허탈해진 제냐가 찾아볼 테면 찾아도 된다고,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록을 살피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

“흐음.”

하지만 마왕은 여전히 불신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제냐는 그 시선을 모른 척했다. 그와 관련해서는 딱히 꿀리는 것 없으니 당당했다.

“아무튼 그럼 이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겠네요. 저는 또 이 점을 이용하시려고 저를 일행에 포함시키신 줄 알았거든요.”

제냐가 편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는데 마왕이 딴지를 걸었다.

“아니, 쓸 만하겠는데.”

“네?”

의혹 섞인 시선을 보낼 땐 언제고 다시 오만한 얼굴로 돌아간 마왕이 명령했다.

“그 점을 사용할 방법 좀 생각해 보지.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네?”

쓸 만한 게 생겼으니 써먹어야 하지 않겠냐는 그 얼굴에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 * *

방으로 돌아온 제냐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는 루미에르를 돌아봤다.

“왜 그렇게 봐요?”

그러자 루미에르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몰랐습니다.”

“말을 안 해 줬으니까 몰랐겠죠.”

공주라는 것과는 결이 다르게 말하고 싶지 않던 부분이었다.

“별로 닮지 않은 것 같습니다.”

유심히 얼굴을 쳐다보다가 한다는 소리가 그런 거라서 제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요? 이래 봬도 외탁했다는 소리를 듣는 편인데?”

제냐는 색을 빼고는 어머니를 닮았고, 어머니와 황제는 닮았다. 그러니 제냐는 결과적으로 황제와 닮은 편이었다.

하지만 루미에르는 동의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전혀 다릅니다.”

“그런가? 그러고 보면 루미에르는 황제랑도 자주 봤겠네요?”

“…….”

가볍게 던진 질문에 무거운 침묵이 돌아왔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고 뭔가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왜요?”

방금 질문 어디에 놀랄 만한 게 있나 생각해 보는데 루미에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러면서 시선을 피하는데, 그 묘한 말투와 조금 전 루미에르의 반응을 더하자 한 가지 결론이 났다.

“아, 사이가 안 좋았구나?”

루미에르가 고개를 더 깊숙이 숙였다. 정곡이 찔린 것 같았다. 제냐는 뭘 그런 거 가지고 그러냐며 손을 흔들었다.

“괜찮아요. 나랑도 별로예요. 내가 엄청 싫어하거든.”

그 말에 루미에르의 고개가 슬쩍 올라왔다.

“그렇습니까?”

루미에르가 눈가를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황제는 어머니와 친합니다.”

루미에르의 어머니라면.

“성녀와요?”

“네.”

대륙에서 제일가는 나라라고 할 수 있는 제국과 성녀.

세상이 이렇게 변했으니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끼리 하나로 똘똘 뭉쳤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제냐가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제냐가 말을 하다 마는 루미에르를 재촉했다.

“그리고?”

루미에르가 고개를 크게 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뭔데요?”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꾹 다물린 고집스러운 입에 제냐는 더 이상 캐묻지 않기로 했다. 제냐 역시 황제와의 일은 더 말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요, 안 물어볼게요.”

대신 제냐는 어처구니가 없던 마왕의 명령을 떠올렸다.

“그건 그렇고. 도대체 무슨 방법을 만들어 내라는 거야?”

지끈거리는 머리를 양손으로 부여잡는데, 루미에르가 그런 제냐의 손을 잡아 내렸다.

“제냐, 고민은 잠시 미뤄 두고 자요.”

제냐가 시간을 살피는데, 루미에르가 부드럽게 그녀의 고개를 다시 그에게로 돌렸다.

“조금 이르지만 오늘은 쉬고, 맑은 정신으로 같이 고민해 봐요.”

이번만큼은 루미에르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제냐는 순순히 그가 이끄는 대로 잘 준비를 시작했다.

넓은 방 크기에 비해 침대는 본래 쓰던 것보다 조금 작았지만, 그래도 적당히 널찍해 둘이 자기에는 충분했다.

침대에 누운 제냐는 평소보다 조금 많이 가까워진 것 같은 루미에르를 힐끗 쳐다봤다. 그리고 그가 이쪽을 쳐다보기 전 얼른 천장을 쳐다봤다.

제냐가 천장을 바라보며 눕자 루미에르가 불을 껐다. 창이 큰 탓에 밝은 달빛이 방 안으로 쏟아져 생각보다 방 안은 밝았는데 그것도 제법 운치 있어 보였다.

‘붉은 달이 아니라 더 마음에 들고.’

크기는 좀 작지만 침대도 푹신했고 이불도 몸을 포근히 감싸 주니, 잘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눈만 감으면 바로 잘 수 있을 만큼 피곤하니까…….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상황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잠자리가 바뀌었기 때문인지, 갑자기 황제를 생각해서인지, 그도 아니면 인간계에 왔다는 게 이제 와 신경 쓰이는 건지.

제냐가 작게 한숨을 쉬며 몸을 뒤척이는데, 머리에 커다란 손이 닿았다. 움찔 몸을 떨자 옆에서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루미에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이 안 와요?”

가까이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제냐는 눈을 뜨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지금은 눈을 떠선 안 될 것 같았다. 눈에 힘을 주는데, 루미에르가 그런 제냐의 눈가를 살짝 문지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옆에 있잖아요.”

내가 뭘 걱정하는지도 모르면서.

아니, 사실 스스로도 뭘 걱정하는지 알 수 없어서 제냐는 얌전히 그 손길을 받았다.

눈가를 문지르던 손이 속눈썹을 간지럽게 쓸고, 이내 그녀의 머리카락을 사락사락 매만졌다. 언젠가 제냐가 악몽을 꾸던 그의 머리카락을 만져 줄 때처럼.

그렇게 점점 의식이 흐려졌다.

“…잘 자요, 제냐.”

그 목소리를 끝으로 제냐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