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냐는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자연스레 차를 타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몸에 뱄네, 뱄어.’
이제 이런 사소한 것 따위는 신경도 안 쓰였다. 제냐가 대충 끓인 차를 들고 억지로 소파에 앉혀 둔 루미에르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각자의 앞에 차를 내려놓았다.
“폐하가 머무는 방에 들어올 영광을…….”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지.”
마왕이 익숙하게 레라지에의 말을 잘라 냈다. 제냐는 그녀에게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마왕을 유심히 바라봤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마왕이 입을 열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제국의 수도다.”
“…수도요?”
“그래, 거기에 내가 찾는 물건이 있거든.”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마족 주제에 신관이 가장 많은 제국의 수도에는 어떻게 갈 생각인지, 수도에 도착해서 찾는 건 뭔지,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걸 루미에르 앞에서 다 이야기하는지.
하지만 제냐는 그 모든 물음은 뒤로하고 제일 중요한 걸 물었다.
“그 물건이 수도 어디에 있는데요?”
마왕이 눈썹을 까딱이며 대꾸했다.
“황궁 지하.”
“네?”
제냐가 귀를 의심하는데 마왕은 말을 바꾸지 않았다.
“황궁 지하에 있다고.”
제냐가 띵한 머리를 붙잡으며 억지로 웃었다.
“혹시 황궁 침공 계획이 있으신가요?”
그러자 마왕이 멍청하다는 눈빛으로 제냐를 쳐다봤다.
“조용히 가져오겠다고 했는데.”
제국의 수도, 그것도 황궁 지하에 가는데 그게 가능할까? 제냐가 더욱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불가능을 말씀하시네요.”
하지만 마왕은 아주 자신만만해 보였다.
“그러니까 준비해야지.”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는 그 얼굴에 제냐가 물었다.
“계획이 있으신가요?”
“없진 않아.”
마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레라지에가 적극적으로 이야기했다.
“적당히 인간들을 쓰러트리고 가져오면 될까요?”
“그래도 되고.”
순간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뻔했다. 제냐가 루미에르의 반응을 살피는데, 눈이 마주친 그가 제냐의 앞으로 슬쩍 찻잔을 밀어 줬다. 그러고는 입술을 달싹이며 차가 식기 전에 마시라고 속삭이는 것이다.
생긋 웃는 루미에르는 마왕과 레라지에의 말에 충격받은 기색이 전혀 없었다.
‘정말 용사가 맞아?’
제냐가 마왕을 돌아봤다.
“그게 조용히 처리하는 건가요?”
“소란스럽지 않게 방해하는 인물들만 처리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
결국 어떻게 되든 인간은 처리하겠다는 소리였다. 제냐가 눈에 힘을 주고 물었다.
“그렇게 하실 거면 뭐 하러 여기서 정보를 얻나요? 처음부터 황실로 가시지.”
제냐가 눈을 찌푸리는데 마왕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면 뭐, 다른 확실한 방법이라도 있나?”
소파 등받이에 올려 둔 손에 얼굴을 기댄 마왕의 눈빛은 의미심장했다. 기대가 가득 담긴, 동시에 꿍꿍이가 가득한 그 시선에 제냐는 눈을 질끈 감았다.
‘비네 자작이 말한 건가?’
아니, 비네 자작도 그녀가 한 나라의 공주라는 것만 알 뿐이었다. 하지만 제국의 수도를 입에 담은 순간,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래,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정 좋아하시네.’
마왕은 분명 처음부터 그녀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다시 눈을 뜬 제냐가 크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른 방법이 있으면 따르실 생각이시고요?”
“그게 합리적이라면?”
씩 웃는 입을 한 대 때려 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제냐가 마른세수를 하며 째려보듯 마왕을 쳐다봤다.
“효율적이지 않다는 말은 취소할게요. 정말 엄청나게 효율적이세요.”
빈정거리는 말투에 레라지에가 놀란 듯 그녀를 쳐다봤지만 제냐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고 삐뚜름한 얼굴을 고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비열하긴.’
정이 들었다고 사람을 그렇게 찝찝하게 만들더니 결국 제냐의 혈통을 이용하려고 하지 않았나?
제냐는 망한 왕국의 공주라는 신분 외에 그녀를 칭하는 또 하나의 명칭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이제는 인간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사람 중 하나가 된, 그녀의 외삼촌을 떠올렸다.
제냐가 마왕에게 납치당하기 전까지 승승장구를 멈추지 않았던 사람.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도시에 들어선 순간 들려온 이야기였다. 제국 명문가의 가주에서 결국에는 원하던 자리를 차지한 자.
황제.
제냐가 서늘한 눈으로 마왕을 노려봤다.
“그런데 제가 황제의 조카라고 해도 황실에 막 들어갈 방법이 있는 건 아니거든요?”
목이 콱 막혀 부러 더 목소리에 힘을 주는데 여유롭게 제냐를 쳐다보던 마왕이 삐끗한 얼굴로 제냐를 쳐다봤다.
“…뭐?”
꼭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처럼 맹하게 변하는 마왕의 얼굴. 점점 커지는 눈. 그리고 벌어지는 입술을 차례로 눈에 담은 제냐의 눈도 마왕을 따라 점점 더 둥그렇게 변했다.
“네?”
마왕과 제냐가 서로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봤다.
* * *
분명 한 번도 만져 보지 못했을 시커먼 걸레 조각을 건네주자 돌아온 답은 냉담했다.
“싫어.”
나와는 다른 어두운색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항상 빛나던 너였다.
그래서일까? 언제나 부러워하던 네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을 때 처음 느낀 감정은 환희였다.
그래서 나는 너를 더 진창에 빠트리고 싶었다.
이제 사랑받는 공주님은 사라졌다고. 너의 앞에는 낭떠러지뿐이고 나는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거라고.
그래서 제레미야는 사용인을 통해 아스트리아에게 다시 한번 걸레를 건네줬다.
“싫어도 해.”
“내가 왜?”
제레미야가 날카롭게 대꾸했다.
“네가 우리 집에 얹혀사니까.”
“뭐?”
제레미야가 활짝 미소를 지었다.
“너도 알잖아? 너 우리 집에 얹혀사는 거야.”
이제 너를 올려다보기만 하던, 너를 부러워하던 나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니까 너한테 선택권 따위는 없어.”
그 말에 충격을 받은 듯 잘게 떨리던 속눈썹을 보자 손끝까지 짜릿함이 퍼져 나갔다.
하지만 동시에 마음 한구석에서…….
번쩍.
제레미야는 하얀 천장을 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문밖에서 하나둘 사람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면 하루를 시작할 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깨어난 것 같지만 ‘그 애’가 꿈에 나올 때는 늘 그랬으니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언제 적 일인데 계속 꿈에 나오는지.”
이제는 죽고 사라진 애를, 꿈이 아니라면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애가 왜 계속 나타나는 걸까.
그렇게 죽어 버린 게 억울해서?
“나도 행복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인데…….”
올라갈 일만 남았다고 여겼던 미래에 남은 건,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구덩이였다.
“황녀 전하, 기침하셨습니까?”
비릿한 웃음을 흘린 제레미야가 답을 하기도 전에 열린 문을 바라봤다. 사용인이 눈도 마주치지 않고 깊게 고개를 숙였다.
“황제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그건 통보이자 명령이었다.
아득, 이를 악문 제레미야는 울컥 치솟는 감정을 깊은 구덩이 안으로 던졌다.
그리고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준비하자.”
제레미야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르르 방 안으로 들어오는 사용인들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봤다.
아마 이들은 제레미야가 싫다고 해도 강제로 그녀를 치장하고 황제의 앞으로 데려다 놓았을 것이다. 위치는 달라졌으나,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빛나던 네가 사라졌으니 더 이상 부러워할 사람이 없다는 것 하나만큼은 어쩌면 괜찮은 변화일지도.
* * *
이른 아침부터 보고를 받으면서도 황제는 피곤한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흔적이 없다고.”
사내가 고개를 더욱 깊게 숙이며 답했다.
“간혹 들리는 이야기는 완전히 헛소문이거나 신전에서 흘린 이야기 같습니다.”
황제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사내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니, 됐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침묵하던 황제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뭐가 됐든 이쯤 시간이 지났으면 결과는 나온 것 아닌가?”
죽었거나, 아니면 스스로 도망갔거나.
작게 중얼거린 황제가 생각을 정리하는 것처럼 혼잣말을 이어 갔다.
“이제 성녀 역시 슬슬 새로운 대체재를 찾겠지.”
황제의 말을 듣지 못한 양 사내는 침묵했다. 그렇게 얼마나 침묵이 이어졌을까? 황제가 일률적으로 책상을 두드리던 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신전이 먼저 나서기 전에 소문을 내야겠다. 용사가 크게 다쳤다고 해.”
“아.”
단 한 문장뿐인 말이었지만 오랜 시간 황제의 밑에서 일했던 사내는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바로 파악했다.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황제가 양손을 비비며 물었다.
“신전 쪽 우리 사람은?”
“목표량의 절반쯤 집어넣었습니다.”
“더 서둘러.”
사내는 물러가 보라는 황제의 손짓에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혹시나 하는 가정을 꺼내 들었다.
“폐하, 만약 용사가 살아 돌아온다면…….”
사내는 돌아올 답을 알고 있었고 역시나 예상했던 답이 돌아왔다.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만약 그런 기적이 생긴다면……. 그때는 죽여야지.”
한때 용사의 손을 잡고 고맙다며, 그대가 세상을 구원할 거라고 인자하게 웃던 황제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교활하게 눈을 반짝이며 탐욕스러운 웃음을 흘리는 황제에 사내가 마른침을 삼켰다.
“알겠습니다.”
상대를 향한 혐오와 두려움을 숨기려 고개를 더 깊게 숙이는데 다른 방문자가 나타났다.
“폐하, 황녀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나가 보게.”
축객령에 반색한 사내는 재빨리 방을 나섰다. 방을 나가는 길 무표정한 얼굴의 황녀와 시선이 마주치면서 표정을 살짝 들킨 것 같았지만 사내는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네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폐하.”
뒤에서 황녀가 황제에게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높으신 분들은 품위를 지킨다지만 그래도 가족인데 저리 감정이 없다니.
사내는 소름이 돋는 팔을 무시하며 무감하게 들려오는 황녀의 목소리를 흘려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