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 탁!
소파에 올라가 있던 쿠션의 각을 잡던 제냐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쿠션을 내려놓았다.
정말 직업병인가? 긴장한 보람도 없이 제냐는 지금 딱 시녀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분명 씻으러 들어간 지 30분가량이 지났는데 여전히 마왕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어차피 씻을 거면, 식사 후에 부르면 되잖아?’
투덜거리면서도 제냐는 화장실 앞에 마왕의 옷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제냐가 다시 소파로 돌아가자마자 타이밍이 좋게 욕실 문이 열렸다.
가슴을 훤히 드러낸 마왕이 발밑에 차이는 옷을 내려다봤다.
“뭐지?”
“뭘까요? 입고 나오세요.”
제냐가 얼른 그 옷을 들고 다시 욕실로 들어가라고 눈짓을 하자, 마왕이 귀찮음이 가득한 얼굴로 옷을 가지고 욕실로 돌아갔다.
차라도 탈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제냐는 들썩거리는 엉덩이를 간신히 붙이고 앉아 있었다.
다행히 마왕은 괜히 찝찝해진 제냐가 차를 타기 전 욕실을 나왔다. 제냐는 뜨거운 수증기와 함께 그녀의 앞에 앉는 마왕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옷차림이 거슬렸다.
‘그래도 가운이 아닌 것에 감사해야 하나?’
제냐가 작게 한숨을 쉬는데, 마왕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가면이 바뀌었더군?”
“…네?”
어떻게 알아차렸지? 분명 똑같은 걸로 주문해서 가져왔는데.
제냐는 빠르게 당황을 숨겼다.
“가면이 바뀌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머리카락 색이 다르다.”
그게 뭔 소리야? 제냐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자 마왕이 피식 웃었다.
“인간계에서 가장 흔한 갈색으로 맞췄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누가 봐도 마계에서 제일 흔한 색이잖아?”
“아.”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남이 주는 걸 덥석덥석 받진 않으니 똑똑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놀리듯 돌아온 말에 제냐 역시 뾰족하게 대꾸했다.
“그러고 싶으세요?”
“글쎄.”
능청스레 말끝을 흐리는 마왕에 약이 바짝 올랐다.
“언제까지 이런 상태를 유지하실 건데요?”
제냐가 마왕의 눈치를 보고, 마왕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이 상황은 누가 봐도 매우 괴상했다.
“궁금한가?”
신경질적인 제냐와 대조되게 마왕은 여전히 여유가 넘쳤다. 어이없는 되물음에 제냐가 날 선 답을 날렸다.
“안 궁금하겠어요?”
마왕이 소파에 나른하게 몸을 기댔다.
“안 말해 주면 욕이라도 할 기세네.”
정확하게 봤다. 제냐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를 노려보자 마왕이 팔짱을 꼈다.
“아직은 생각 중이야.”
“…제 처분을요?”
“그것도.”
제냐는 또 한 번 몰이해에 빠졌다. 도대체 마왕과 엘리고스는 왜 이러는 걸까?
제냐가 빳빳하게 세우고 있던 목에 힘을 빼며 물었다.
“엘리고스 님께도 여쭤보긴 했는데, 혹시 저한테 정드셨어요?”
질문을 하면서도 긍정이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마왕이라면 엘리고스처럼 표정으로 욕을 하거나, 대놓고 욕을 할 거라고 짐작했고.
“…….”
하지만 돌아온 건 침묵이었고 거기에 든 뜻은 놀랍게도 긍정이었다.
“정드셨어요?”
그 속에 지금 네가 제정신이냐는 물음이 포함되어 있었다. 마왕이 뭐가 문제냐며 되물었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엘리고스 님은 아니라고 하셨는데요.”
믿을 수 없다는 걸 숨기지 않았지만 마왕은 태연자약했다. 그는 오히려 엘리고스가 옛날부터 수줍음이 많았다는 개소리도 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신경은 쓰겠지.”
“왜요?”
“우리라고 감정이 없는 건 아니니까. 너도 알잖아?”
따질 생각이 만만하던 제냐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두툼하면서도 다정한 손길을 떠올리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
제냐의 침묵에 마왕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 눈이 꼭 너도 우리에게 정이 든 건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묻는 것 같았다.
입 안의 살을 잘근잘근 깨물며 그 시선을 외면하는데, 마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 끝내고 8시에 내 방으로 와.”
“왜요?”
흠칫 놀라며 돌아간 물음에 마왕이 제냐를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내가 명령하니까.”
“…짜증 나.”
작게 중얼거리는데, 마왕이 작게 웃었다.
“들린다.”
점점 더 멀어지는 마왕의 발소리에 집중하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이번 일정에 대해 설명할 거다.”
그 말에 제냐가 몸을 돌려 마왕을 쳐다봤다.
“이번에도 전부 이야기해 주진 않으실 거죠?”
마왕이 제냐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충 손을 흔들었다.
“그래.”
그 심드렁한 뒷모습에 제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왕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짜증 나.”
그러자 마왕이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이제는 대놓고 하는군.”
제냐는 헛웃음을 흘리는 마왕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들린다고 하셨잖아요.”
마왕이 제냐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좋지? 라는 뜻이 가득 담겨 있는 시선에 제냐가 턱을 뻣뻣하게 치켜들었다.
“그게 대놓고 하라는 소리는 아니었는데.”
꼭 키우던 애완동물이 주제도 모르고 그의 손을 무는 걸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다. 정말 깨물어 보기라도 하면 소원이 없겠다.
제냐가 삐딱하게 대꾸했다.
“제 귀가 그렇게 들었어요.”
“말장난을 하고 싶은 건가?”
제냐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고 싶으신 줄 알았는데요.”
물러섬이 없는 제냐의 태도에 질린 건지, 아니면 하려던 말을 다 한 건지, 마왕이 문을 활짝 열어 줬다.
“나가.”
황송하게 문도 열어 주냐고 물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래도 정도를 지키기로 했다. 제냐가 작게 고개를 까딱였다.
마왕을 지나쳐 방을 나선 제냐는 그가 문을 닫기 전 물었다.
“그런데요. 이 이야기 하려고 저를 부르신 건가요?”
8시까지 오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30분 이상 그녀를 잡아 놨냐는 물음에 마왕이 눈을 접어 웃었다.
“겸사겸사.”
그 속에 가득한 장난기와 짜증을 읽어 낸 제냐는 의아해졌다. 장난기와 짜증이 함께 엮일 수 있는 건가?
“다른 이유는 뭔데요?”
이번에는 뱅뱅 돌리지 않는 답이 돌아왔다.
“거슬리게 하잖아. 그게.”
그게. 제냐는 아주 잠시 ‘그게’가 뭔지 생각해 봤다. 일행 중 마왕을 거슬리게 할 만한 이는…….
‘루미에르.’
마왕이 씨익, 한쪽 입꼬리를 얄밉게 올렸다.
“안달복달하고 재밌을 것 같잖아?”
물론 루미에르가 오늘 내내 조금 과하게 마왕과 레라지에를 견제하긴 했다. 하지만 마왕이 이렇게 유치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어린애세요?”
제냐의 비난에도 마왕은 꿋꿋했다.
“어린 편에 속하지.”
고작 백 살밖에 더 됐냐며 마왕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조금 큰 듯한 흰 티가 그의 한쪽 어깨 쪽으로 흘러내렸다.
그래, 옷도 제대로 정돈하지 못하는 걸 보면 다 큰 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어리다니, 그건 좀.
“그럼 저는 막 태어난 갓난아이인가요?”
나를 앞에 두고 자기가 어리다고? 하지만 마왕은 강적이었다.
“그런 셈이지.”
점점 더 유치해지는 대화를 멈추고 싶었다. 제냐가 어이없음을 잔뜩 드러내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지적했다.
“그 거슬리는 놈도 그럼 갓난아이인데요.”
그러자 마왕이 혀를 쯧, 차며 살벌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그 어린놈이 시건방지게.”
“와.”
그리고 미처 제냐가 뭐라고 반응을 하기도 전 쾅, 문이 닫혔다.
“진짜 미쳤나 봐.”
차별이 엄청난 건 둘째 치고 방금 그거 정말 노인네 같았다. 제냐가 떨떠름한 얼굴로 눈앞에서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여전히 정신이 반쯤 나간 제냐가 계단을 내려오며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진짜 이상해. 머리가 어떻게 된 게 틀림없어.”
* * *
방에 돌아오고 나서부터 계속해서 그녀의 주위를 뱅글뱅글 도는 루미에르에 멀미가 날 것 같았다. 아무 일도 없는 게 맞냐고 세 번째 묻는 루미에르를 보며 그녀가 입꼬리를 올렸다.
“정말로 괜찮아요.”
마왕의 말처럼 안달복달하며 그녀를 걱정했던 게 훤히 보였다. 마왕의 유치한 노림수가 그대로 먹혔다는 게 착잡했다.
그 때문에 복도에서의 손장난을 지적할 생각도 사라졌다. 솔직히 별일도 아니었다. 들키지 않았으니까.
제냐가 그를 달래듯 말했다.
“정말 괜찮아요. 걱정해 줘서 고맙고요.”
제냐는 루미에르가 또 괜찮냐고 묻기 전, 방을 둘러봤다. 좋은 방이라 예상은 했지만 마왕성에 있는 제냐의 방보다 훨씬 화려하고 큰 방이었다.
“방이 좋네요.”
입을 몇 번 달싹이던 루미에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소파에 앉았다.
“…그런 편이죠.”
“레라지에랑은 어떻게 헤어졌어요?”
“그냥 적당히 돌려보냈습니다.”
“잘했어요. 얼핏 듣기는 했거든요.”
“그 마족, 너무 끈질깁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레라지에는 루미에르에게 관심이 지대하니까.
“그래도 오늘처럼만 해 줘요. 좀 더 다정하면 더 좋고.”
잔뜩 피곤한 얼굴을 하는 루미에르에 제냐가 웃음을 흘리며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음식들을 가리켰다.
“이제 그만 보고 좀 먹어요. 식기 전에.”
제냐가 그의 앞으로 그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밀어 주자 그제야 루미에르가 포크를 들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8시에는 다시 가야 해요.”
루미에르가 입 안의 음식을 삼키며 물었다.
“무슨 대화를 했습니까?”
“그냥…….”
그녀를 뒤흔들었던 마왕의 말이 다시 한번 귓가를 맴돌았다.
‘우리라고 감정이 없는 건 아니니까. 너도 알잖아?’
모르겠다. 당시에는, 얼굴을 보고 이야기할 때는 그게 진실이라고 자연스레 받아들였지만…….
“그냥 앞으로의 일정을 알려 준다고요.”
별것 아니었다며 얼른 배를 채우라고 그가 좋아할 만한 음식을 밀어 주면서 제냐는 찬물을 들이켰다.
명치가 콱 막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