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잡함에 말없이 얼마나 걸었을까? 여관 앞에서 걸음을 멈춘 레라지에가 어서 오라는 듯 손짓을 하더니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제냐가 여관의 간판을 확인하며 루미에르를 올려다봤다.
기분이 가라앉은 건 가라앉은 거고,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들어가기 전에 물어볼 게 있는데.”
“뭘요?”
“아까 왜 그랬어요? 이렇게 뾰로통해서.”
그가 했듯이 입을 쭉 내밀자 루미에르가 재밌다는 듯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가 눈썹을 축 늘어트리며 처연하게 말했다.
“다들 제냐한테 너무 친한 척을 해요.”
“언제요?”
“제냐는 몰라요.”
내가 뭘 몰라? 어리둥절해 그를 쳐다보자 루미에르가 다시 한번 입을 삐죽거렸다.
“얼굴도 만져 주려다가 말고.”
어린애도 아니고. 제냐가 헛웃음을 흘리자 루미에르가 고개를 숙였다.
“만져 달라고요?”
“네.”
장난치지 말라고 웃어 버리는데, 루미에르가 웃으면서도 고집스레 제냐를 쳐다봤다. 그러니까 진담이라는 뜻이었다.
제냐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이번만…….”
“안 들어오나?”
루미에르의 얼굴에 손이 닿기가 무섭게 마왕이 나타났다. 그러고는 두 사람을 바라보더니 혀를 쯧쯧 차며 다시 여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니, 왜 이럴 때만 나타나?’
억울하다 못해 답답했다. 제냐가 입을 벌리고 여관을 바라보는데, 루미에르가 제냐의 손을 마저 잡아당겨 얼굴을 묻었다.
“여기요.”
정말이지, 이젠 나도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얌전히 손을 내어 주자 루미에르가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 들어가요. 친절하게 굴고요.”
다시 한번 그들의 계획을 상기시키자 루미에르가 방긋방긋 웃으며 순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제냐의 손을 꼭 잡은 채, 여관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막 직원에게 열쇠를 받아 든 레라지에가 그들을 반겼다.
“왔나? 사람들이 많지?”
제냐는 그들과 멀지 않은 곳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웰컴 음료를 마시는 마왕을 발견했다. 그녀를 보자마자 올라가는 삐딱한 입꼬리를 외면한 제냐가 레라지에를 돌아봤다.
“그렇네요. 참 활기차요.”
“덕분에 좀 곤란하게 됐는데.”
“네?”
레라지에가 들고 있던 키를 흔들었다.
“남은 방이 얼마 안 돼서 말이야. 다행히 웃돈을 조금 더 주고 방을 구했는데.”
제냐는 레라지에의 흰 손가락에서 뱅글뱅글 돌아가는 키를 확인했다.
“안타깝게도 방이 세 개야.”
사람은 넷인데 방이 셋이라. 제냐가 여관으로 들어오기 전 봤던 거리를 떠올렸다.
“저기 반대쪽에도 여관이 있는 것 같은데. 그리로 갈까요?”
그 말에 프런트 앞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던 직원의 얼굴이 싹 굳었다. 하지만 얼굴이 굳은 건 직원만이 아니었다.
레라지에가 정색을 하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폐… 마르바스 님께서 머물 만한 품격이 있는 방은 여기뿐이야.”
제냐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저게 진심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아서 할 말이 없었다. 더군다나…….
‘진짜 이름을 불렀어.’
레라지에는 기껏 이름을 불러 놓고 한껏 부끄러워하며 마왕을 훔쳐봤다. 하지만 그와 달리 마왕은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큼, 목을 가다듬은 레라지에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 둘이서 머물 이를 정해야 해. 아무래도 레이디는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니까. 나와 그대의 연인이 함께 방을 쓰면 어때?”
아무리 미인계를 쓰려고 했다지만, 레라지에와 루미에르를 한방에서 재우라고?
제냐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젓는데, 레라지에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니면 마르바스 님의 방에서 제냐가 머무는 것도 나쁘지 않지. 방이 따로 딸려 있거든.”
제냐가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새된 목소리로 되물었다.
“폐… 마르바스 님 방에요?”
“거기가 제일 넓어.”
그게 정말 최선이냐고 묻고 싶은데, 루미에르가 뒤에서 제냐의 어깨를 안아 왔다.
“제냐는 저와 함께 방을 쓰면 됩니다.”
제냐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빠르게 고개를 주억였다. 레라지에가 침음을 냈다.
“흠, 그래? 아무래도 그게 가장 보편적이긴 하지?”
알면서 왜 물어본 건데? 제냐가 눈썹을 꿈틀거리는데 레라지에가 걱정스레 물었다.
“하지만 제냐, 그래도 밤에는 편하게 혼자 쉬면 좋을 텐데. 고생을 많이 했잖아.”
이렇게 말하면 욕을 할 수도 없었다. 조금 황당한 제안이긴 해도 좋게 넘어가자고 결론 낸 제냐가 빙그레 웃었다.
“정말 괜찮아요, 레라지에 님.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제냐가 빈틈없는 얼굴로 감사 인사를 하자 레라지에가 한발 물러났다.
“…어쩔 수 없지. 그럼 방으로 올라갈까?”
레라지에가 몸을 돌려 어느새 음료를 다 마신 마왕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마왕이 우아하게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냐는 얼음만 남은 음료잔을 보며 눈을 빛냈다.
‘입맛에 맞나?’
그렇다면 저 음료가 뭔지 좀 알아 두고, 나중에 직원에게 저 음료를 좀 더 시킬 수 있냐고 확인을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겸사겸사, 여기서 주는 음식 중에 마왕의 취향에 제일 적절한 메뉴를 찾아 두고…….
줄줄 시녀다운 생각을 이어 가던 제냐는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루미에르에 번쩍 정신을 차렸다.
시선이 마주친 루미에르가 계단을 올라가려는 레라지에와 마왕을 가리켰다. 제냐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고마워요.”
직업병이 따로 없었다. 실소를 흘린 제냐가 직원의 인사를 받으며 위층으로 향했다.
‘보통 방 안내는 직원이 하는 것 아닌가?’
제냐는 자기기 직원인 양, 자연스레 여관 소개를 시작한 레라지에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마르바스 님의 방은 제일 위층이고 저희 방은 바로 아래에 있습니다.”
고급스럽고, 화려한 여관의 인테리어는 딱 레라지에의 취향 같았다.
“식사는 보통 1층에서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원한다면 5층 손님들부터는 방에도 식사를 가져다준다고 하더군요.”
제냐는 그 뒤에 이어진 나머지 설명은 가볍게 흘려들었다. 이불이 어떻고 방에 있는 과일이 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그때 루미에르가 제냐가 집중하지 못한 걸 알아차린 것처럼 톡톡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리의 방은 5층과 6층인데…….”
고개를 돌리자 루미에르가 제냐의 손끝을 잡아당겼다. 뭔가 할 말이 있나 싶어 눈썹을 세우자 그가 입을 달싹였다.
‘…손, 잡아 줘요?’
눈을 찡그리며 그의 입 모양을 쳐다보던 제냐가 움찔 몸을 떨었다. 잘못 알아들은 게 아니라는 듯 루미에르의 손가락이 제냐의 손바닥을 긁었다. 제냐가 화들짝 놀라며 그를 쳐 냈다.
타악-
“방 수준은 수도 못지않은 곳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다행히 그 소리는 레라지에의 설명에 묻혔다.
심장이 빠르게 쿵쾅거렸다. 너무 손을 세게 쳐 낸 것이 아닌가 하는 미안함과 들키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정신이 없었다.
제냐가 하지 말라는 의미로 눈에 잔뜩 힘을 줬다. 하지만 루미에르는 그런 제냐의 표정을 보지 못한 척, 다시 슬금슬금 손을 뻗어 왔다.
‘왜 이래?!’
뭐 하는 거냐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걸 참아 내며 제냐가 레라지에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 손을 피하려는데, 마왕과 시선이 부딪쳤다.
“…….”
그녀가 바짝 언 사이 루미에르는 기어이 제냐의 손을 쟁취해 냈다. 다행히 마왕은 두 사람의 맞잡은 손을 발견하진 못한 듯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진짜!’
제냐가 깜짝 놀라 빠르게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는 루미에르를 노려봤다. 하지만 루미에르는 무서워하기는커녕 해맑게 웃을 뿐이었다.
웃음이 나오나? 한마디 하려는데 앞에서 레라지에가 그녀를 불렀다.
“제냐?”
제냐가 재빨리 붙잡은 손을 등 뒤로 숨기며 레라지에를 돌아봤다.
“네?”
“따로 더 궁금한 게 있나?”
제냐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빠릿빠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레라지에가 6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눈짓했다.
“폐하의 방은 6층이네. 우리 방은 여기 5층에 10호, 11호고.”
제냐가 레라지에가 건네는 열쇠를 받아 들며 물었다.
“이제 각자 방으로 갈까요?”
얼른 방으로 들어가서 루미에르에게 한마디 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제냐가 답을 구하듯 마왕을 쳐다봤다.
“그래, 넌 잠깐 날 따라오고.”
왜? 잠시 경계하듯 마왕을 쳐다본 제냐가 스스로의 위치를 되뇌었다.
‘난 시녀잖아.’
마왕이 그녀를 따로 부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먼저 들어가 있어요, …아스.”
혹시 문제가 생기면 빨리 달려오라는 눈빛을 가득 담아 루미에르를 쳐다보자 그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냐가 등 뒤의 손을 얼른 털어 냈다. 그러자 루미에르가 미적거리다 손을 놓아줬다.
제냐가 그에게 열쇠를 건네주고는 레라지에에게 다가가 마왕의 방 열쇠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벌써 계단을 오르고 있는 마왕을 뒤따라갔다.
“아스, 그대는 곧장 방으로 갈 건가?”
“…네.”
“함께 차라도 마시는 건? 앞으로 꽤 오래 함께할 텐데 친해지는 것도 좋지 않겠어?”
“나중에 제냐도 함께하시죠.”
“오, 그래. 그래.”
조금 딱딱하긴 해도, 레라지에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받아 주는 루미에르에 안도했다. 초대를 받았다면 좋았겠지만, 단둘이 만나는 건 제냐도 조금 걱정이긴 했으니 저 정도만 돼도 충분했다.
뒤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집중하다 보니 속도가 조금 느려졌다. 그 때문에 먼저 계단을 오른 마왕이 문 앞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와.”
누굴 걱정하는지. 눈으로 욕을 하는 것 같은 마왕에 제냐가 얼른 마왕의 앞으로 가 문을 열었다.
달칵.
활짝 열리는 문 너머, 눈이 아플 정도로 반짝거리는 방을 확인하며 제냐는 숨을 가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