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혼란스러워하는 제냐를 두고 상황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정말 이게 인간계로 향하는 마법진은 맞나? 다른 무슨 해괴한 수를 쓰는 것이 아닌가?
“무섭나?”
둥둥 떠다니던 질문들을 무섭냐는 마왕의 도발 한마디에 지워 낸 제냐가 홀랑 마법진 중앙으로 다가갔다. 마왕과 함께 일하면서 너무 자주 보던 표정이었고 그에 따라 자연스레 흘러나온 반응이었다.
‘멍청하긴!’
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루미에르의 잘못도 조금 있었다. 그녀의 손에 붙잡혀 따라오던 루미에르가 위험할 것 같다거나, 손을 한 번만 뒤로 잡아당겼어도 제냐는 금방 정신을 차렸을 텐데.
제냐는 몸 전체를 짓누르는 것 같은 압박감을 견뎌 냈다. 붉은색으로 형상화된 마왕의 마력이 숨을 콱 누르고 있었다.
함께 생활할 때면 종종 저게 진짜 마왕이 맞나 생각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저 날개와 뿔만 보면 그가 정말 마왕이라는 걸 상기하곤 했다.
그리고 그걸 인지하자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있는 용사 루미에르가 다시 한번 크게 다가오는 것이다.
“제냐.”
그 부름에 제냐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그의 손을 더 세게 붙들었다. 그러자 루미에르가 제냐를 지탱해 주는 것처럼 손을 더 강하게 그러쥐었다.
그녀의 손 전부를 감싸는 커다란 손이 전해 주는 온기에 손가락이 따뜻해졌다.
‘루미에르가 왜 따뜻해서 좋다고 하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그에게는 말하지 못할 생각을 하는데 옆에서 황홀한 감탄사가 들려왔다.
“아, 폐하!”
누가 들어도 레라지에의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제냐는 입 안의 살을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오늘 도움을 받은 것도 있으니, 이번 출장 동안은 그에게 최대한 잘해 주고 싶었다. 겸사겸사 문제가 생기면 도움도 좀 받고.
‘마왕이 있어도 도와줄진 모르겠지만.’
그렇게 표정을 가다듬는데, 마법진이 가동되면서부터 이리저리 일그러지고 물감이 흐르듯 진득하게 흘러내리던 풍경이 또렷해졌다.
미로의 거울에서 겪었던 마법과는 다른, 조금 더 피부로 와닿는 변화였다. 그리고 코끝에 청량한 공기가 닿는 순간.
짹!
새소리와 눈에 닿는 쨍한 햇볕에 제냐가 눈을 찡그렸다.
“하아.”
점점 더 참기 힘들 정도로 막혀 오던 숨이 한 번에 틔었다. 드디어 마법진 가동이 완료된 것이다.
제냐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주변을 살폈다.
맑은 하늘, 발바닥에 닿는 흙, 그리고 주변의 풍경. 그리고 풀 냄새.
마계의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숲에는 그들 외의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놓고 사람들이 한가득 모여 있는 곳으로 이동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기에 문제가 되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여기가 인간계가 맞으면.’
제냐가 초조함을 숨기며 주변을 살피는데, 등에 따뜻한 손길이 닿았다.
“숨, 가다듬어요.”
귓가에 닿는 루미에르의 목소리와 일정하게 토닥거리는 손길에 사방으로 튀던 제냐의 숨결이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제냐가 루미에르의 박자에 맞춰 숨을 들이마시는데, 그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인간계가 맞습니다. 주변에는 저희 외에 아무도 없고요.”
루미에르의 말에 온몸을 가득 채우던 긴장감이 사라졌다.
하지만 마음껏 기뻐할 수는 없었다. 옆에서 느껴지는 이 시선의 주인은 마왕일 테니까.
눈에 띄게 안도하는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 고개를 숙이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충분히 모든 게 정돈된 뒤 제냐는 고개를 들고 마왕을 쳐다봤다.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루미에르의 정체를 알고 있다면 그를 이렇게 순순히 인간계로 데려오면 안 되는 것 아닌가? 그의 홈그라운드인 마계에서 루미에르를 처리하는 게 마왕에게는 더 수월할 텐데.
혼자서도 루미에르를 처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일까? 아니면 무슨 다른 속셈이 있는 걸까.
제냐가 복잡한 눈으로 마왕을 쳐다봤다. 그러자 마왕이 그 시선을 잠시 받아 주다가 레라지에를 돌아봤다.
“폐하, 벌써 없애신 겁니까? 조금 더 보고 싶은데…….”
레라지에는 날개와 뿔을 갈무리한 마왕의 옆에서 잔뜩 아쉬워하는 중이었다. 제냐는 레라지에를 쳐다보며 질문들을 입 안으로 삼켰다.
마왕이 레라지에의 말을 자연스레 무시하며 제냐를 돌아봤다.
“가까운 곳에 있는 마을로 갈 거다.”
“아, 네.”
제냐가 표정을 피며 허리를 곧게 세웠다. 그러자 이번에 마왕의 시선이 그녀의 뒤로 향했다.
“너, 뭐라고 부르길 원하지?”
스스로 정체를 밝히라는 소리인가? 제냐가 흠칫 몸을 떠는데, 루미에르가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스.”
제냐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마왕과 눈을 맞추고 있던 루미에르가 제냐를 내려다보며 눈웃음을 쳤다.
아스라니? 그게 뭐야? 아니, 마왕이 호칭을 물은 게 맞기는 한가?
황당함에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다시 마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는 나도 이름으로 부르도록 해.”
혼란스럽던 머리가 텅 비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제냐가 마왕을 돌아봤다.
“네?”
“내 이름으로 부르라고.”
“가, 가명이 따로 없으세요?”
제냐에게는 갑자기 포함된 일행이라고는 해도, 마왕은 이미 그전부터 인간계에 가려고 준비 중이었을 게 뻔했다. 그런데 가명 하나 만들지 않고 뭘 했단 말인가?
마왕이 아니더라도 엘리고스가 뭐라도 다른 이름을 만들지 않았을까 기대를 가지고 마왕을 쳐다봤지만 그는 태연하게 말할 뿐이었다.
“인간 중 내 이름을 아는 이는 없는데.”
당연히 인간계에 마왕의 이름을 아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내가 왜 당신 이름을 불러야 하는데?’
제냐가 어떻게든 그런 마왕을 말리려고 하는데 그녀보다 먼저 다른 이가 나섰다.
“세상에, 폐하!”
레라지에.
그의 목소리에 제냐는 크게 안도했다. 레라지에라면 분명 어떤 식으로든 마왕을 말려 줄 수 있을 것이다.
‘감히 폐하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없다거나, 폐하의 이름을 부르면 심장이 멎을지도 모른다고 하거나!’
제냐가 두근거리는 심장을 붙잡고 레라지에의 말을 기다리는데, 그가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폐하의 이름을 입에 담을 수 있다니!”
쿵, 큰 충격을 받은 제냐가 크게 비틀거렸다. 그녀의 옆에 서 있던 루미에르가 그녀를 붙잡아 줬지만 제냐는 그에게 감사 인사를 할 정신도 없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절망도 컸다. 레라지에는 생각보다 더 강심장이었던 모양이었다.
싱글벙글 웃으며 상황을 반기던 레라지에는 거기서 더 나아갔다.
“아, 그럼 저도 그냥 제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폐하. 제냐와 아스도!”
제냐는 해맑은 레라지에의 말을 흘려들으며 입을 뻐끔거렸다. 마왕이 그런 제냐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봤다.
“네 이름을 아는 이도 당연히 없을 테니, 너도 나처럼 그대로 이름을 부르면 되겠군.”
이름으로 부르라니!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아니었다. 제냐가 소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냐, 괜…….”
세심히 제냐를 살피고 있던 루미에르가 그녀의 몸 상태를 살피려는데 그보다 더 큰 목소리가 루미에르의 말을 잘라먹었다.
“그대, 추운가?”
그러고는 성큼성큼 다가와 제냐에게 걱정 섞인 말을 쏟아 내는 것이다.
“마계의 기온보다 조금 낮은 것 같기도 하고. 겨울이라고 하던데, 그래서 그런가?”
레라지에가 염려 가득한 얼굴로 제냐를 내려다봤다.
“옷을 벗어 줄까?”
그보다는 마왕을 말려 주는 게 더 좋았을 텐데. 제냐는 레라지에에게 반쯤 밀려난 루미에르를 힐끗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가면으로 얼굴이 가려져 있는데도 눈이 드러나서인지 그가 레라지에를 짜증스레 쳐다보고 있는 게 너무 잘 보였다.
“춥지 않아요. 그냥 조금 어색하세요.”
“인간계가?”
이름을 부르는 게.
하지만 보아하니 이미 다 결정 난 일인 것 같았다. 무의미하게 입씨름할 생각도 없었고. 제냐는 적당히 레라지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기도 하고.”
“음, 그래. 그래도 추우면 말하고. 알았지?”
“네.”
제냐가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루미에르가 다시 레라지에와 그녀의 사이를 파고들어 왔다. 그 경계심 가득한 태도에 화가 날 법도 한데 레라지에는 생긋 웃었다.
그러고는 아주 자연스레, 그들보다 몇 발자국 앞에 있는 마왕의 옆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정말 대인배다운 태도였다.
제냐가 눈을 깜빡이며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루미에르가 물었다.
“몸이 안 좋은 것 같으면 업어 줄까요?”
제냐가 눈에 힘을 잔뜩 주고 루미에르를 노려봤다.
‘미인계!’
분명 레라지에에게 잘 보여야 한다고 했는데, 그도 동의해 놓고 아까부터 레라지에에게 왜 이따위로 행동한단 말인가?
제냐가 레라지에와 함께 있는 마왕을 힐끗 쳐다보며 루미에르의 귀에 속삭였다.
“왜 그래요?”
“뭐가요?”
“친절하게 굴라고 했잖아요!”
그의 팔뚝을 꼬집으며 말하자 루미에르가 팔을 문질렀다.
“아파요.”
뭘 얼마나 세게 꼬집었다고? 딱딱한 근육 때문에 살이 꼬집히는 감촉도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제냐가 눈에 더욱 힘을 주자 그가 찔끔한 얼굴을 했다. 그러고는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게 제 마음대로 안 됩니다.”
축 처진 눈꼬리가 퍽 안타까워 보였지만 이건 제냐도 물러설 수 없는 문제였다.
“그래도 해야 해요.”
제냐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루미에르가 부루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싫어하다니. 어린애 같은 얼굴에 괜스레 미안해진 제냐가 달래듯 꼬집었던 팔뚝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제냐…….”
루미에르가 어리광을 부리듯 그런 제냐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도 모르게 그런 루미에르의 얼굴을 감싸 주기 위해 손을 뻗던 제냐는 순간 볼에 닿는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꼴값을 떤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는 마왕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