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바스는 이른 아침부터 그를 찾아온 엘리고스를 신경 쓰지 않고 준비를 마쳤다. 엘리고스 역시 딱히 말을 걸 생각은 아니었는지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어깨에 로브를 걸친 마르바스는 그제야 엘리고스를 돌아봤다.
“왜?”
“가셔도 괜찮겠습니까?”
새삼스러운 질문이었다.
“한두 번 가는 것도 아닌데.”
이제껏 인간계에 내려간 수가 몇 번인데, 참 쓸모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엘리고스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조금 다른 의미로 가는 거니까요.”
마르바스가 여상하게 답했다.
“이제 와서 이성을 잃을 것 같지는 않아.”
감정에 치우쳐 일을 망칠 시기는 지났다.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났잖아?”
마르바스가 주름 하나 없는 엘리고스의 얼굴을 눈으로 훑으며 말했다.
“너무 늙은이 티 내지 마.”
마르바스와 동년배처럼 생기긴 했지만 엘리고스는 그보다 몇 배는 나이를 먹은 마족이었다. 몇백 살은 훌쩍 넘긴 그의 나이를 떠올리며 마르바스가 말을 덧붙였다.
“그대에게는 짧은 시간이겠지만 나한테는 긴 시간이었어.”
하지만 엘리고스는 이런 가벼운 태도로는 안심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더 걱정됩니다. 고여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변함없이 딱딱한 얼굴에 마르바스는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엘리고스는 백 년간 감정이 희석되었다고 말하는 그에게 그 감정이 고이고 고여 독이 되진 않았냐고 묻고 있었다. 마르바스가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남아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감정도, 그리고 사람도.
틈 없는 얼굴로 더 이상 그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티를 내자 엘리고스가 약간의 침묵 뒤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냐에게는 왜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제냐.
마르바스는 눈 밑을 시커멓게 물들이고 있던 얼굴을 떠올리고.
“별다른 이유는 없어. 그냥…….”
시원한 얼굴로 웃었다.
“재밌잖아?”
출장을 가는 건 난데, 일을 왜 이렇게 많이 시키냐는 그 눈빛.
자신이 없어도 당신은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욕이 가득 적힌 표정이 재미있었다.
오늘 자신을 발견하고 지을 표정도 재미있을 테고.
마르바스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엘리고스를 쳐다보자 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한결 가벼워진 얼굴을 확인한 마르바스가 시간을 확인하며 당부했다.
“아무튼, 다녀올 동안 잘 지키고 있어.”
엘리고스의 얼굴에 벌써 피곤함이 어렸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시는 걸 추천합니다.”
미리 처리했다고 해도 늘 사고를 치는 마족들이 있었으니 앞으로 엘리고스가 해야 할 일은 많았다. 마르바스가 짓궂게 웃었다.
“보고.”
뭐, 말은 이렇게 해도 최대한 빨리 돌아와야 하는 건 맞았다. 마왕인 그가 자리에 없는 걸 반마왕파에게는 들키지 않는 게 편했다.
물론 함께 가는 일행들에게는 알려도 됐지만.
복잡미묘했던 보랏빛 눈을 떠올린 마르바스가 몸을 돌렸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이르긴 했지만 계속 있다가는 엘리고스의 잔소리만 들을 게 뻔했다. 마르바스는 사용인들의 인사를 받으며 마법진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리 크지 않은 발소리도 크게 울려 퍼지는 복도를 지난 마르바스는 익숙한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를 보자마자 경악한 레라지에를 마주했다.
‘이런.’
놀라움은 금방 사라지고 점점 더 환희에 싸이는 얼굴에 작게 뒷걸음치던 마르바스는 결국 레라지에에게 붙잡혔다.
“폐하! 어떻게 여기에……!”
“나도 함께 가니까.”
“제가 폐하와 함께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다니, 이리 행복할 수가!”
안 그래도 큰 공간에 레라지에의 큰 목소리가 더해지자 귀가 아팠다.
마르바스는 피곤한 얼굴로 얼른 기다리던 이가 오기를 바랐다.
다행히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 인기척이 느껴졌다. 레라지에 역시 그걸 느낀 건 마찬가지인 듯했다.
마르바스는 스윽, 열리는 문을 바라보며 입가에 새는 웃음을 숨겼다. 그리고 잔뜩 굳은 얼굴로 방 안으로 들어온 이를 쳐다봤다.
열리는 문 너머, 마르바스를 보며 어울리지 않게 맹한 얼굴을 한 제냐가 보였다. 왜 네가 여기 있냐는 물음이 표정에서 다 보였다.
“장난해?”
레라지에의 말에 참지 않고 새어 나오는 마음의 소리는 또 어떻고?
웃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간질거리며 올라가던 입꼬리는 그녀의 뒤에서 짐승처럼 안광을 빛내는 존재에 의해 거짓말같이 사라졌다.
그래, 네가 있었다. 몇 달 전부터 거슬리게 내 영역에 붙어 있던 것.
감히 내 사람 옆에서.
‘먼저 발견한 건 난데.’
꼭 자신이 제 것을 노린다는 양 이를 드러내는 꼴이 우스웠다.
마르바스가 용납해 주지 않았다면, 거기에 있지도 못했을 것이.
웃음기가 사라진 자리에는 오만하고, 권위적인, 권태가 가득 섞인 표정이 자리했다. 마르바스가 버릇없는 푸른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봤다.
그러자 주제도 모르는 게 기다렸다는 듯 기세를 피워 올렸다.
“하?”
그렇게 눈싸움 아닌 눈싸움을 하려는데, 제냐가 서둘러 그들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저 커다란 놈을 가릴 수 있을 정도로 덩치가 큰 것도 아니었다. 겁이 많아 늘 뒤로 물러나 있기를 택했던 제냐가 저 인간을 지키겠다고 앞으로 나섰다.
거슬림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잔뜩 긴장한 얼굴을 보자, 이게 뭔 의미가 있나 싶어졌다.
순간 몰려오는 귀찮음에 눈에서 힘을 풀었다. 제냐가 그제야 편안해진 얼굴로 따지듯 물었다.
“왜 여기 계세요?”
“내가 못 올 곳을 왔나?”
여기는 마왕성이고 난 마왕이니 내가 가지 못할 곳은 없다는 유치한 답을 해 주자 제냐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어지간히 짜증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보는 눈들이 있다고 제냐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공손하게 물었다.
“마법진을 가동하려고 오신 거죠?”
그런 건 레라지에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설명을 해 줄까 하다가, 조금 심술을 부렸다.
“귀에 문제가 생겼나 보군.”
레라지에가 하는 말을 들었을 텐데. 마르바스가 제냐의 귀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물론 걱정하는 게 아니고 비꼬는 게 맞았다.
저 조막만 한 머리는 제법 똑똑하니 분명 답을 알 텐데, 왜 불필요한 질문을 하는 걸까? 저 인간을 지키려고?
못마땅함에 성질을 조금 긁어 주자 잔뜩 열이 오른 제냐가 뒤에 있는 존재를 잊은 듯, 마르바스에게로 다가오며 헛웃음을 흘렸다.
“왜 같이 가는 거라고 말씀 안 하셨어요?”
마르바스가 얄밉게 어깨를 으쓱였다.
“안 물어봤잖아?”
“하!”
커다란 코웃음에 마르바스가 놀리는 것처럼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제냐가 억울함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걸 알려 주셔야……!”
“제냐.”
하지만 뒤에 있던 존재가 제냐의 손목을 붙잡으며 자기의 존재를 어필했다. 나도 여기 있다고, 잊지 말라고.
너무 속이 훤히 보이는 수였지만 우습게도 제냐의 관심이 뒤로 향했다. 그러고는 자식을 지키는 어미처럼 저 인간을 싸고도는 것이 아닌가.
누가 누굴 보호하겠다는 건지.
경계심이 가득한 눈을 마주하자 배알이 뒤틀렸다.
‘내가 얼마나 잘해 줬는데, 저렇게 쳐다봐?’
아직 무슨 짓을 한 것도 없는데, 억울했다.
마르바스가 가라앉은 눈으로 제냐와 그 뒤에 있는 인간을 쳐다봤다.
제냐는 마르바스와 인간 사이에서 기민하게 눈치를 보고 있었다. 본래 이쯤이면 적당히 물러나 줬겠지만, 저 푸른 눈깔이 마음에 안 들었다.
대치가 길어지자 이제껏 공기 취급을 당하던 이가 나섰다. 여기서 제일 눈치가 없는, 아니 어쩌면 제일 눈치가 좋은 레라지에가 밝은 목소리를 냈다.
“세상의 아름다움이 전부 여기 모였군요. 아, 눈이 부셔요!”
손뼉을 짝짝 치며 순식간에 이목을 집중시킨 레라지에가 두 남정네 사이에 끼어 있던 제냐를 자연스레 빼냈다.
우아한 손짓으로 제냐의 손을 붙잡아 당긴 레라지에가 그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그렇지 않나, 제냐?”
쭉, 저항 없이 끌려가는 제냐를 따라 마르바스와 레라지에의 시선이 돌아갔다. 부딪치던 시선이 떨어지자 팽팽한 분위기도 풀렸다.
제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레라지에에게 웃어 보이자 그가 눈을 찡긋거렸다.
“물론 여기서 제일 아름다운 건 그대라네.”
“언제나 감사해요. 레라지에 님.”
이번만큼은 진심이 듬뿍 담긴 감사 인사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르바스가 작게 코웃음을 치면서 몸에 힘을 풀었다.
하지만 제냐의 뒤에 있는 인간은 정도를 몰랐다.
성큼, 앞으로 튀어나온 인간이 레라지에의 손에서 냉큼 제냐의 손을 낚아채 갔다. 그러고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제냐의 손을 정성스레 닦아 냈다.
불식간에 일어난 일에 제냐가 어정쩡하게 그에게 손을 맡기다가 지친 낯을 했다.
역시 신경에 굉장히 거슬리는 놈이 맞았다. 하지만 마르바스는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시간이 다 되기도 했고.’
마르바스가 관심 없다는 듯 등을 돌리자 뒤에서 제냐의 한숨 소리가 따라왔다.
“…잊었어요? 그만 좀 해요!”
작은 목소리로 타박하던 제냐가 레라지에에게도 사과 인사를 했다.
“죄송합니다. 레라지에 님.”
“괜찮아. 이 정도 질투야 귀엽지.”
귀엽다니, 꼴사납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마르바스는 굳이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대신 그들을 재촉했다.
“다 모였으니 이제 가지.”
커다란 방을 가득 채운 마법진의 한가운데 멈춰 서며 한 말에 레라지에가 서둘러 그를 따라왔다. 그리고 그 뒤로 잔뜩 긴장한 얼굴의 제냐가 다가왔다.
이번의 긴장은 조금 전의 것과는 결이 달랐다. 마르바스가 그 불안을 빤히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무섭나?”
도발하듯 건네진 물음에 제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고는 바짝 약이 오른 얼굴로 인간의 손을 붙잡으며 걸음을 빨리했다.
“설마요, 가시죠.”
인간이 기다렸다는 듯 냉큼 손깍지를 꼈다. 맞잡은 손이 거슬리긴 했지만, 그래도 겁에 질린 얼굴보다는 오기가 가득한 얼굴이 나았다.
살짝 눈썹을 치켜세웠던 마르바스는 안 가고 뭐 하냐며 그를 돌아보는 독기 오른 보라색 눈에 마력을 운용했다. 붉은 마력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휘이익- 마르바스의 등 뒤에서 커다란 날개가 펼쳐졌다. 보이진 않아도 뿔도 돋아났을 게 뻔했다.
휘몰아치는 마력과 바람에 머리카락이 잔뜩 흔들리는데도 제냐는 눈을 감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마르바스가 그 강단 있는 얼굴을 눈에 담으며 인간계로 향하는 마법진을 가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