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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39)화 (39/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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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내일이네요.”

수상쩍기 짝이 없는 출장이 내일로 다가왔다.

출장을 가겠다고 선언한 제냐가 제일 먼저 한 건 바로 짐을 싸는 일이었다. 그런 것치고 일주일이 다 되어 가는 지금까지 일이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그러니까 오늘은 완벽히 짐을 싸야 해요.”

루미에르가 방 한쪽에 작은 동산을 이룬 물건들을 빤히 쳐다보다가 순순히 제냐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 시선에 괜히 민망해진 제냐가 어색하게 웃었다. 배달이 올 때마다 나름 정리를 했는데, 아직도 풀지 않은 짐이 한가득했다.

‘전부 마왕 때문이야.’

출장을 가겠다고 했으면 적당히 준비할 시간도 줘야지, 평소보다 일을 더 시켰다. 덕분에 짐을 쌀 시간도 없었다.

‘그렇다고 루미에르에게 맡기기에는 불안하고.’

보는 것만으로도 피곤을 불러일으키는 물건의 산을 외면하며 제냐가 하나씩 정리를 시작했다.

포장을 뜯고 물건의 부피를 줄이는데, 그녀를 따라 물건들을 바닥에 나열하던 루미에르가 익숙한 상자 하나를 열며 물었다.

“이거 왔네요? 제냐가 꼭 사야겠다고 한 거요.”

제냐는 루미에르의 손에 들린 검은 가면을 보며 눈을 빛냈다.

“다행이네요.”

얼마 전 엘리고스가 보내 준 것과 똑같은 가면이었다.

상대가 루미에르의 정체를 알든 말든, 두 사람은 웬만하면 얼굴은 계속 가리기로 합의를 봤다.

물론 엘리고스가 보낸 가면을 쓸 생각은 없었다. 때문에 제냐는 엘리고스가 준 가면과 똑같은 가면을 주문 제작했다.

일주일은 조금 촉박한 것 같다는 제작자에게 가격을 두 배나 높여 불러야 했지만 물건은 괜찮아 보였다.

“똑같네요. 그렇죠?”

제냐가 루미에르의 얼굴 옆으로 가면을 대보자 그가 가면을 받아 착용했다.

“네, 마법도 잘 걸려 있고요.”

루미에르의 얼굴보다 살짝 컸던 가면이 그의 얼굴 크기에 맞춰 크기를 줄이더니 착, 자연스레 얼굴에 달라붙었다.

“불편하진 않고요?”

제냐가 살과 떨어진 빈틈은 없는지 더듬거리며 가면의 가장자리를 매만졌다. 일단 손으로 만졌을 때는 들뜸 없이 밀착된 느낌이었다.

검은색으로 변한 루미에르의 머리카락도 이질감이 들지 않았다. 제냐가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데, 루미에르가 입꼬리를 올렸다.

“네, 좋아요.”

“다행이에요. 계속 쓰고 다녀야 하는데 불편하면 안 되죠.”

딱딱해 보이는 외양과 달리 안쪽은 부드러운 재질을 사용했다더니, 다행히 비싼 값을 했다.

몇 번 더 루미에르의 가면 쓴 얼굴을 꼼꼼히 살피던 제냐가 다시 가방을 싸는 데 집중했다.

“이것도 챙길까요?”

“여기 이거랑 비슷한 거 아닌가요?”

“얘는 작고 얘는 크잖아요.”

이 두 개는 완전히 다른 물통이었다. 제냐가 보란 듯 물통을 들이밀자 루미에르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다 넣어요.”

애당초 이것들은 전부 루미에르에게 줄 생각으로 시킨 것이었다.

‘둘 다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지.’

루미에르에게는 당연히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제냐는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살 수 있는 건 전부 샀고 무슨 핑계를 대서든 모든 물건을 가방에 때려 넣었다. 생활력이 없는 루미에르가 이런 걸로 고생을 하지 않았으면 했다.

“이것도 챙길까요?”

“네, 원한다면요.”

결국 산 모든 물건을 가방에 넣으며 제냐가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큰 가방으로 사길 잘했어요.”

“그렇네요.”

제냐는 겉으로 볼 때는 처음과 다를 바 없지만 안은 빈틈없이 꽉 차 있을 가방을 통통 두드렸다.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좋아요. 짐은 다 챙긴 것 같은데……. 그런데 정말 검이나 이런 건 필요 없어요?”

“네.”

제냐가 커다란 루미에르의 손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맨손 격투를 즐겨요?”

손바닥에 굳은살이 많이 박여 있긴 했지만 손등 쪽은 손바닥만큼 굳은살이 많진 않았다. 맨손 격투를 즐기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루미에르는 어정쩡한 답을 내놓았다.

“나쁘진 않죠.”

“아니라는 뜻이잖아요.”

제냐가 세모꼴을 하고 눈을 뜨자 루미에르가 옅은 미소를 흘렸다.

“틀린 건 아닌데. 제 검은 따로 있어요.”

그 검이 여기 있는 건 아니지 않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제냐는 입을 다물었다. 이미 몇 번이나 물었던 이야기고 늘 검은 필요 없다고 답을 하곤 했으니 이 이상 물어보는 것도 민폐였다.

“알았어요. 편한 대로 해요.”

제냐가 가방을 닫자 루미에르가 개운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짐은 다 싼 건가요?”

“네, 그렇죠. 너무 늦었네요.”

잘 시간이 훨씬 지나 있었다. 제냐가 또 챙겨야 할 게 있는지 마지막으로 주변을 훑는데, 루미에르가 옆에서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또 시킨 게 있는 건 아니죠?”

“이, 이제 없어요.”

민망함에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하자 루미에르가 청량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는 얼굴이 그 나이대의 청년을 보는 것 같았다. 하하, 귓가에 닿는 목소리도 나쁘지 않았다.

루미에르를 따라 작게 웃던 제냐가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하고는 그를 재촉했다.

“이제 빨리 자요. 컨디션은 중요해요.”

뭐, 그렇게 말한 것치고 제냐는 결국 잠을 설쳤지만.

* * *

출장 당일, 루미에르에게 아침을 챙겨 준 제냐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요, 제냐?”

“인사하러요.”

“인사요?”

“떠나기 전에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주방에 잠시 다녀올게요.”

루미에르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 비프라는 마족 말이죠?”

“…맞아요.”

마음 한구석에 생기는 찝찝함을 삼키며 긍정하자 루미에르가 무표정한 얼굴로 입술을 매만졌다.

“그래요.”

“네?”

루미에르가 문을 손짓하며 말했다.

“다녀와요. 같이 나가야 하니까 기다릴게요.”

그녀를 붙잡지 않는 루미에르를 몇 번이나 되돌아보던 제냐가 결국 발을 뗐다.

“…아침 꼭 먹어요.”

“네, 그럴게요.”

“그럼.”

흔쾌히 보내 주는 것 같으면서도 살짝 가라앉아 보이는 루미에르를 뒤로한 제냐는 서둘러 주방으로 향했다. 모이기로 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시간이 별로 없었다.

길게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다. 이번이 마지막 대화일지 모르지만, 그래서 더 진지하거나 무거운 분위기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제냐는 딱딱하게 굳으려는 표정을 피며, 주방 문을 열었다.

“비프, 바빠요?”

고개만 살짝 내밀어 그를 부르자 언제나 그렇듯 비프가 반가운 얼굴로 제냐를 돌아봤다.

“바쁘긴, 들어오렴.”

“할 말이 있어서요.”

“응?”

제냐는 최대한 담담하고 차분하게 인간계로의 출장을 알렸다.

* * *

제냐는 가면을 쓴 루미에르를 몇 번이나 올려다보며 문제가 없는지 확인했다. 옷도 적당히 평범했고 가면을 쓴 덕에 얼굴이 잘 보이지도 않았으며 머리카락 색도 달랐다.

저쪽이 이쪽 정체를 다 알고 있는데도 겉모습이 조금 변하니 우습게나마 안심이 됐다.

‘머리카락이 변한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확 달라지네.’

보이는 건 그의 입과 턱선 정도였는데, 그래도 잘생긴 건 티가 났다.

“됐어요. 이제 가요.”

제냐는 마음껏 살펴보라는 듯 고개를 숙여 주고 있던 루미에르의 어깨를 뒤로 밀어냈다. 루미에르가 군말 없이 바닥에 있던 가방을 어깨에 메며 물었다.

“인사는 잘했어요?”

“뭐, 그냥저냥요.”

솔직히 제대로 된 인사는 아니었다. 출장을 가야 하고, 한동안 마왕성을 비우게 됐다는, 알맹이는 하나도 없는 대화였다.

훗날 비프가 알면 조금 서운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게 제냐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제냐가 씁쓸한 웃음을 삼키며 루미에르를 재촉했다.

“늦겠어요. 얼른 가요.”

다행히 루미에르는 아무런 질문 없이 그녀를 따라왔다. 그렇게 출발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일이 없으면 참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상황은 제냐를 도와주지 않았다.

오늘따라 복도에 사용인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제냐는 그들에게 쏟아지는 사용인들의 시선을 정통으로 받고 있었다.

“다들 저와 제냐 이야기를 해요.”

루미에르가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속닥거렸다. 굳이 루미에르가 이렇게 이야기해 주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제껏 연인이 생겼다는 소문이 돌긴 해도, 제냐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옆에 사내를 끼고 다닌 적은 없었으니.

제냐는 눈을 마주치기만 하면 금방이라도 그들에게 달려들 것 같은 사용인들을 외면했다.

“눈 마주치지 말아요. 모른 척해야 해요.”

“그래요.”

얼굴을 가리는 가면을 힐끗 쳐다본 제냐가 슬쩍 운을 뗐다.

“레라지에 님이 아마 기다리고 있을 텐데, 기억하고 있죠?”

우리의 계획.

“…그럼요.”

음울한 목소리를 못 들은 척하며 제냐가 다시 한번 당부했다.

“친절하게요. 알았죠?”

“알겠어요.”

일주일간 지겨울 법도 한데 순순히 답하는 루미에르에 제냐가 볼을 긁적였다.

“너무 잔소리가 많죠?”

“저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잖아요?”

“그렇죠.”

“제냐가 걱정해 주는 게 좋아요. 날 신경 써 주는 것도 좋고.”

…레라지에에게 이렇게만 대하면 될 텐데. 제냐가 열이 오를 것 같은 얼굴을 느끼며 다시 앞을 돌아봤다.

다행히 모이기로 한 장소에 다가갈수록 사용인들의 시선은 줄어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지금 마왕성 안쪽 깊숙한 곳에 위치한, 인간계로 향하는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정에 충실한 건지, 정말 인간계로 가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냐는 그들의 발소리만 들리는 널따란 복도를 지나 그녀보다 몇 배는 큰 커다란 문 앞에 도착했다.

마왕의 군대들이 이 복도를 통해 사라지는 뒷모습을 몇 번 본 적 있어도 그녀가 직접 이곳에 오는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신기함이나 궁금증보다는 긴장감과 초조함, 불안함이 더 컸다.

제냐는 바짝 마르는 입 안을 느끼며 문에 손을 댔다. 그리고 루미에르와 눈을 한 번 맞추고는 커다란 문을 열었다.

“제냐.”

문이 열리자마자 그녀를 반겨 주는 이는 제냐도 이미 알고 있던 이였다. 레라지에.

하지만 그 옆에 있는 이는…….

제냐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상대가 빤히 시선을 맞춰 왔다.

그 눈 맞춤을 눈치챈 레라지에가 눈치 없이 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나도 이제 알았어.”

뭐를? 묻기도 전에 레라지에가 몸을 배배 꼬며 얼굴을 붉혔다.

“제냐도 기쁘지? 우리 위대하신 폐하께서도 이번 일정을 함께 하신다네!”

마왕이 그 말에 맞춰 붉은 눈을 깜빡였다. 기어이 다물고 있던 입술이 벌어졌다.

“장난해?”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조합인가? 마왕과 용사가 함께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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