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미에르의 얼굴에 물음표가 가득 들어찼다. 도대체 왜 이렇게 이해를 못 하지, 눈을 찌푸리던 제냐는 그제야 제대로 된 설명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제냐가 손뼉을 쳤다.
“아, 미인계를 써야 하는 건 제가 아니라 루미에르예요.”
“뭐라고요?”
제냐는 곧 일주일 전의 일과 가면의 상관관계. 그리고 지금 한 말의 의미를 전부 설명했다.
잠시 뒤, 모든 이야기가 끝나자 루미에르가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마왕과 집사가 제가 누군지 아는 것 같다는 거죠?”
“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이 일을 문제 삼지 않고 있고요.”
제냐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인간계로 출장이 잡히고, 동행인을 데려와도 된다고 하더니 가면까지 보냈다.”
“맞아요!”
루미에르가 상황을 완벽히 이해했다. 머리가 아픈지 그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 마족이 일정에 함께 한다는 건 알겠어요. 그런데 어째서 결론이 미인계죠?”
“말했잖아요. 레라지에 후작님이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한다니까요?”
“아니, 내 말은 왜 그 마족을 이용해야 하냐는 건데요.”
마족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게 불편한 걸까? 하지만 이게 정말 최선이었다. 루미에르가 다른 방법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뭐, 다른 계획이라도 있나요?”
빤히 제냐를 쳐다보던 루미에르가 말했다.
“무작정 마왕성을 무너트리진 못해도 제냐 한 명쯤은 데리고 도망은 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이 있는 건 좋았지만, 그래도 현실은 달랐다.
“마계에서 마왕의 눈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인간 세상으로 가면 되죠.”
일이 그렇게 간단하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제냐가 생긋 미소를 지었다.
“루미에르, 마법사예요?”
“…아니요.”
“동료들과 연락이 됐나요?”
루미에르가 고개를 저었다. 제냐가 좀 전보다 더 짙은 미소를 띠고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요?”
이번에도 루미에르는 별다른 고민 없이 답했다.
“마족 중에는 마법을 쓸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습니까? 적당히 협박하면 될 텐데요.”
루미에르는 계획을 너무 대충, 즉흥적으로 짜는 것 같았다. 뭐, 이 이야기를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제대로 된 계획을 짤 시간이 없기도 했겠지만.
그리고 루미에르가 모르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그건 안 돼요.”
단호한 제냐의 말에 루미에르가 되물었다.
“마족들을 협박하면 안 된다고요?”
설마.
“루미에르, 인간계로 향하는 마법은 아무나 알고 있는 게 아니에요.”
“…네?”
“사용인들은 당연히 모르고, 귀족 중에서도 모르는 마족들이 태반이란 말이에요.”
루미에르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반박했다.
“마족들 중에는 마법사가 굉장히 많다고 들었는데요.”
그 말대로였다. 마족들은 유독 마법에 특화된 종족이었으니까.
“그렇죠. 하지만 그 마법은 사장됐어요. 정확히 말하면 마왕이 그 마법을 아는 마족들을 전부 죽이거나 권속으로 삼았죠.”
루미에르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럼 마족들은 도대체 인간계로 어떻게 이동하는 겁니까?”
“마법진을 이용하는 거죠.”
미리 그려 둔 마력식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대규모로 이동을 할 때 적절한 방법이었다.
“그럼 그걸 이용하면 되겠네요.”
이번에도 루미에르는 간단하게 말했지만, 그것 역시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 마법진 역시 마왕이 관리하고 있어요.”
“그게 무슨…….”
제냐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마족들은 인간 세상에 갈 때 마왕의 허락을 받고 가야 해요.”
제냐가 이제껏 탈출을 생각도 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마왕은 인간계로 향하는 모든 마족을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우리가 무사히 도망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이곳 마왕성에서 해결을 봐야 한다는 소리죠.”
심각해진 루미에르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왜 마왕이 그런 걸 관리하죠?”
제냐도 그 이유를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마계의 권력 구도와 관련된 이야기인 것 같은데,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구세력 귀족들과 신세력 귀족들과의 권력 싸움과 관련된 일이라는 건 알았는데, 그 이상은 제냐도 잘 몰랐다.
“인간계로 가는 마법진과 관련된 일들은 전부 1급 기밀이거든요.”
그리고 바로 여기서 레라지에가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레라지에 후작님은 다르죠. 그분은 인간계로 향하는 마법을 알거든요.”
마왕의 최측근이며 그에게 무한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레라지에는 인간계로의 이동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마족 중 하나였다.
그걸 알게 된 계기가 좀 볼품없긴 했다.
‘틈만 나면 인간 세상의 미남 미녀와 예술품을 보러 나간다고 마왕을 귀찮게 했다던가?’
정말로 인간계에 하루걸러 한 번씩 가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마왕을 보러 온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설령 인간계로 간다는 출장이 다 거짓말이더라도, 레라지에 님만 잘 설득하면 어떻게든 도망칠 틈은 만들 수 있어요.”
이번 출장이 제냐와 루미에르를 처리할 어떤 수라면 레라지에가 꼭 필요했다.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레라지에에게 호감을 사는 건 도움이 됐다.
“진짜로 인간계로 가는 거라면, 그 후 레라지에 님만 어떻게 잘 처리하면 도망치는 건 어렵지 않고요.”
차분한 제냐의 설명에 잠시간 침묵하던 루미에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답했다.
“…일리가 있네요.”
“그렇죠?”
“하지만 미인계는…….”
선뜻 알겠다고 하지 못하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마족에게, 그것도 같은 사내에게 미인계라니. 조금 민망하긴 할 것이다.
제냐가 부드럽게 그를 설득했다.
“가장 쉽게 환심을 사는 방법이에요. 아름다운 것에는 마음이 너그러우시니까요. 물론 저도 같이할 거고요.”
당신만 하는 게 아니라고, 같이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를 달래는데 루미에르가 화들짝 놀라 제냐를 쳐다봤다.
“네?”
“왜요?”
“제냐도 하게요?”
왜 저렇게까지 놀라는 걸까? 의아함을 숨기며 제냐가 답했다.
“레라지에 님이 제 얼굴도 마음에 들어 하시거든요.”
오늘 보니 성력을 보여 준 이후, 완전히 호의를 얻어 낸 것 같아 루미에르와 달리 적당히 비위만 맞춰 주면 되겠지만, 그런 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다.
“제가 할 테니까, 옆에서 비슷하게 하면…….”
어떻게 그를 설득시켜야 할까 고민하는데, 루미에르가 목소리를 높였다.
“제가!”
응?
“제가 열심히 할게요.”
갑자기? 그럼 좋기야 하지만.
“음, 고마워요?”
제냐가 떨떠름하게 말하자 루미에르가 긴 한숨과 함께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고는 눈만 슬쩍 들어 시무룩하게 묻는 것이다.
“그런데 미인계라니, 어떻게 하면 되죠?”
참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노리고 했든, 그냥 저도 모르게 했든 루미에르는 그런 데에 꽤 재능이 있었다.
검지를 척, 치켜든 제냐가 눈을 곱게 접었다.
“저한테 하듯이 하면 돼요.”
“제냐에게 하듯이요?”
루미에르가 아리송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사르륵, 흩어지는 금발과 순하게 처진 눈매를 차례로 살피며 제냐는 만족했다.
그래, 이런 모습만 보여 주면 레라지에는 금방 루미에르에게 흠뻑 빠져들 것이다.
“네.”
루미에르는 마왕보다 훨씬 더 아름다우니까!
루미에르의 외모에 관한 한 자신감이 넘치는 제냐가 뿌듯하게 웃었다.
* * *
“갈게요.”
출근하자마자 밑도 끝도 없이 던진 말이었지만 마왕은 금방 제냐가 한 말을 알아들었다.
“가겠다고?”
“네.”
자기가 가라고 해 놓고 가겠다니 어디가 잘못됐냐고 쳐다보는 마왕이 웃겼다.
“안 가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어떻게 해도 위험하다면, 적어도 행동하고 위험한 게 낫지 않겠는가? 제냐가 대충 어깨를 으쓱이며 책상 앞에 앉았다.
“오늘도 일은 넘쳐 나네요.”
곧 죽을지 모르는데도 일을 하겠다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게 우스웠다.
수상쩍은 짓을 하고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계속해서 부려 먹는 마왕도 이상했고.
마왕의 입장에서야 죽일 때는 죽이더라도 한 장이라도 일을 더 하고 죽으면 손해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날 뭘 믿고?’
제냐가 완전히 회까닥 돌아서 서류를 전부 엉망으로 만들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애당초 이건 마계의 일인데, 인간인 제냐가 왜 죽자 살자 매달려 있는 건지 모르겠다.
글자가 종이 위를 둥둥 떠다녔다. 책상 위에 가득 쌓인 서류를 싹 쓸어 바닥에 내던지고 발로 쾅쾅 내리찧고 싶었다. 시커먼 발자국이 잔뜩 찍힌 서류를 불에 태워 버리면 더 재미있을 것이다.
그래 봐야 현실은 시궁창이었지만.
“으휴, 하기 싫어.”
숨길 새도 없이 마음의 소리가 그대로 새어 나갔다. 당연히 그 말을 들은 마왕이 헛웃음을 흘렸다.
“뭐?”
“네?”
제냐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화사하게 웃었다. 그리고 펜촉에 잉크를 가득 묻히며 말했다.
“그냥 좀 하기 싫으네요.”
“뭐?”
할 줄 아는 말이 ‘뭐’밖에 없나? 제냐가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왜요?”
황당하다는 듯 눈을 깜빡이던 마왕이 중얼거렸다.
“또 시작이군.”
“또요?”
“그래, 왜 투정이야?”
정말 몰라서 묻나? 제냐가 말없이 그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자 그가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달래듯 말했다.
“누군 좋아서 일을 하나?”
알 바야? 제냐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쩌겠어요. 마계는 폐하의 것인데.”
네 거를 네가 관리하는데 싫고 말고가 어디 있냐?
제냐와 마왕의 처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괜히 말을 이었다가는 더 속이 터질 것 같아서 제냐가 쌩하니 고개를 돌렸다.
“일하세요. 저는 그만 보시고요.”
직접적으로 그만 쳐다보라고 말을 했음에도 마왕의 시선은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제냐가 서류에 시선을 고정하며 날카롭게 말했다.
“계속 쳐다보시면 더 하기 싫은데요.”
그러자 마왕이 쯧 혀를 차더니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자기가 져 준다는 것 같은 그 모습에 코웃음이 튀어나왔다. 누가 보면 제냐가 아무 이유 없이 변덕스레 마왕을 괴롭히는 줄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