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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37)화 (37/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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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냐는 그날 밤, 루미에르에게 출장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인간계가 출장지라는 것도 마음에 걸렸었는데, 가면까지 선물받고 나자, 선뜻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웠다.

‘언제 떠나냐고 물었다가 독초를 씹어 먹었는데.’

만약 루미에르에게 출장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다가 방향을 잘못 틀면…….

-또 나를 버리려고요?

자기 멋대로 최악까지 상상한 루미에르가 또다시 미친 짓을 저지를지도 몰랐다.

반쯤 돈 것 같았던 정원에서의 루미에르를 떠올린 제냐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또다시 그 꼴을 볼 수 있을 리가.’

그러니 적어도 상황을 전부 파악하고 해결 방법을 찾은 뒤에나 이야기하자고, 이 이야기는 조금 뒤로 미뤄 두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까지지.’

마왕이 말한 기한이 내일로 다가왔다. 그리고 제냐는 아직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마왕이나 엘리고스가 마왕성에 자자한 제냐의 연애를 응원한다는 가정은 어떨까?

‘꿈과 희망이 넘치네, 응.’

공과 사가 뚜렷한 마왕이 애인을 데려와도 된다고 한다고? 엘리고스가 순수한 호의로 선물을 줬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그녀가 다른 마족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선언이었다.

‘가장 최악의 가정은.’

마왕과 엘리고스가 루미에르에 대해 알고 있다.

꿈과 희망이 넘치는 가정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는데, 이 최악의 가정은 가능성이 너무 있어 보여서 소름이 돋았다.

제냐는 슬쩍 고개를 들어 마왕을 쳐다봤다. 그러자 마왕이 기다렸다는 듯 그녀에게 손짓했다.

제냐가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옆으로 다가가 눈매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부르셨어요?”

의심 가득한 속내가 전혀 보이지 않는 친절한 가면을 뒤집어쓴 제냐가 생긋 웃었다.

“엘리고스에게 서류 하나 받아 와.”

“네, 알겠습니다.”

제냐는 군말 없이 방을 나서 엘리고스에게로 향했다. 찝찝하기 그지없는 마음과 달리 엘리고스의 집무실까지 가는 길은 금방이었다.

“왜?”

“2분기 예산안과 관련된 서류를 받아 오라고 하셔서요.”

“아, 그거. 여기.”

제냐는 서류를 받아 들면서 빤히 그를 응시했다.

마왕이나 엘리고스나 그런 짓을 하고도 정말 평소와 다른 점이 하나도 없었다.

제냐는 숨기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엘리고스를 관찰했다. 하지만 무심한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제냐가 한숨을 삼키는데 엘리고스가 돌연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결정은 내렸나?”

“무슨 결정이요?”

모르쇠로 잡아떼자 엘리고스가 눈만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정확하게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날짜가 촉박해지니 겁보다는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 강했다. 떠보고,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도 피곤했고.

마왕과 엘리고스가 루미에르의 정체를 안다면, 두 마족은 이미 모든 대비를 끝냈을 것이다.

이미 결론이 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시간을 끄는 걸까?

“정말 그러면 좋겠나?”

제냐가 어깨를 으쓱였다.

“혼자 생각하는 데 지쳤어요.”

“같이 있는 사람한테 물어보지 그래?”

‘사람.’

엘리고스도 이제는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뭐, 그건 제냐도 마찬가지였다.

“저 잘리는 건가요?”

한 번에 잘려 나가 바닥을 굴렀다던 사용인들의 머리를 떠올리는데, 엘리고스가 관심 없다는 얼굴로 답했다.

“네 결정에 따라 다르겠지.”

‘지금처럼만 지낸다면 아무 일도 없을 거다.’

역시 그때부터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녀가 아는 엘리고스는 맺고 끊음이 확실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관대하게 구는 걸까?

“아직도 유예예요?”

“그래.”

어째서? 왜? 제냐가 따지듯 물었다.

“저한테 정드셨어요?”

무기질한 차가운 색의 눈이 제냐를 쳐다봤다. 온기 하나 없는 그 눈빛에 제냐가 얼른 말을 정정했다.

“아니군요. 그럼 그때 말씀하신 것처럼 아직 피해가 가지 않아서 그런 건가요?”

똑같은 침묵이었지만 이번에는 조금 전과 달리 긍정이 담겨 있었다.

손쉽게 저 생각을 읽어 내는 스스로가 웃겼다. 허탈하게 웃은 제냐가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냥 두고 보시는 건데요?”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야.”

또 두루뭉술한 답이 돌아왔다.

“그럼 지금은 그냥 봐주겠다?”

엘리고스가 긍정하듯 눈을 깜빡였다. 어째서?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알 수 없는 행동 덕에 루미에르가 무사할 수 있다면, 그가 도망갈 틈을 만들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냐가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역시 인간계로 가는 데 뭐가 있죠?”

“그래.”

“계획을 알려 주실 생각은요?”

“없어.”

제냐가 입을 삐죽거렸다.

“치사하게.”

엘리고스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제냐는 뻔뻔함을 유지했다.

“뭐 어때요? 곧 잘릴지도 모르는데.”

더 있어 봐야 정보를 얻지 못할 거라는 걸 확인한 제냐는 서류를 품에 안고 몸을 돌렸다.

“가 볼게요.”

다른 곳으로 세지 않고 곧장 집무실로 돌아온 제냐는 마왕에게 서류를 건네주며 생각을 마무리했다.

일주일 내내 머리를 굴려도 결론이 난 건 하나였다. 정말 이상하지만, 마왕과 엘리고스가 제냐를 봐주고 있다는 것.

동시에 용사인 루미에르도 봐주고 있었고.

제냐와 루미에르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호의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루미에르의 동료가 나타나면 모르겠지만.’

용사의 동료들은 이제껏 감감무소식이었으니 그들에게 도움을 바라기란 요원했다.

“결정은 내일까지야.”

마왕이 퇴근하는 그녀에게 유예 기간의 마지막 날을 통보했다. 제냐는 별다른 대꾸 없이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답을 내리고도 끝까지 답을 미루는 건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혹시 다른 방법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을 부여잡는 것일 뿐.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지만.

“고작 일주일 만에 특별한 수가 생길 리가 없지.”

그냥 루미에르에게 이야기를 해야 했을지도 몰랐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둘이서 생각했다면 뭔가 다른 수가 생겼을지도 모르고.

제냐가 머리카락을 손으로 마구 흩트리는데 뒤에서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냐, 아름다운 그대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군.”

회색빛 눈이 곱게 휘어지고 하얀 장갑을 낀 손이 가까이 다가왔다.

“실례.”

그러고는 사락- 잔뜩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정리하고는 화려한 웃음을 머금었다.

“레라지에 님?”

“저번에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떠나서 마음에 걸렸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게 돼서 다행이지?”

그러고 보니, 그때 나중에 따로 찾아온 비네 자작을 제외하고는 엘리고스에게 불려 가느라 제대로 인사를 하지 못했었다.

“많이 혼난 건 아니지?”

혼나진 않았지만 이래저래 피곤한 일이 늘었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럼요.”

“안심이군.”

“오신다는 말씀을 못 들었는데, 레라지에 님께서 어쩐 일로 오셨어요?”

레라지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는 턱을 매만지며 대꾸했다.

“아직 못 들었나? 이번 일정 말이야. 나도 함께 가거든.”

능청스레 눈을 찡긋거리는 레라지에에 제냐는 그가 말하는 일정이 인간 세상으로 가는 그 출장이라는 걸 깨달았다.

“레라지에 님도 가세요?”

화들짝 놀라는 제냐에 레라지에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 영광스럽게도 폐하께서 나를 선택해 주셨지.”

레라지에가 같이 간다고?

‘세상에.’

빈틈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제냐가 눈을 반짝 빛내는데, 레라지에가 시간을 확인하며 곤란한 낯을 했다.

“먼저 붙잡아 놓고 미안하지만, 폐하를 뵈러 가야 할 것 같군.”

바쁘게 머리를 굴리던 제냐가 환하게 웃었다.

“네, 그럼요. 얼른 가 보세요.”

생각할 거리도 많은데, 얼른 헤어지는 건 이쪽에서도 반길 일이었다.

제냐는 서둘러 방으로 향했다. 지난 며칠간 힘없이 복도를 돌아다니던 것과 달리 그녀에게서는 생기가 넘쳐흘렀다.

‘됐어!’

그리고 잠시 뒤, 빠르게 걸은 탓에 조금 벅찬 숨으로 문을 벌컥 연 제냐가 놀란 듯 그녀를 쳐다보는 루미에르를 바라보며 제안했다.

“루미에르, 우리 이야기를 좀 해요.”

쾅, 하며 문을 세게 닫은 제냐가 성큼성큼 루미에르의 앞으로 다가갔다.

황금을 뽑아 만든 듯 찬란한 금발과 맑은 호수를 담은 눈동자. 우뚝 솟은 콧대와, 단단한 턱선.

넓은 어깨와 전체적으로 커다란 골격, 몸에 꽉 들어찬 근육.

“…제냐?”

당황한 듯 흔들리고 있지만 듣기 좋은 미성까지.

갑자기 생겨난 빈틈이 점점 더 커다래지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지난 일주일간의 마음고생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마지막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회색빛 눈이 떠올랐다.

여전히 열기가 가득하던, 호의가 넘치던 그 눈빛.

“무슨 일…….”

제냐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려던 루미에르의 손을 홱 잡아챘다.

“루미에르.”

“네?”

어처구니없이 들릴지는 몰라도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법밖에 없었고, 이게 그녀가 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루미에르는 싫어할 게 뻔했지만, 그래도 별수 없었다. 잔뜩 흥분한 제냐가 루미에르에게 몸을 바짝 들이대고 외쳤다.

“미인계를 써야겠어요!”

말로 뱉고 나니 더 완벽한 계획 같았다. 루미에르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제냐,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미인계를 쓰겠다고요?”

“네.”

루미에르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누구에게요?”

잔뜩 흥분한 제냐는 위에서 쏟아지는 날카로운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레라지에 후작님이요.”

“…그때 그 은발 머리 마족이요?”

제냐가 생긋 웃었다.

“맞아요.”

“왜요?”

왜냐니? 그야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그야, 레라지에 후작님이 루미에르를 마음에 들어 하니까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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