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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36)화 (36/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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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인간계

제냐는 황급히 눈을 비볐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문질러도 눈앞의 남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제냐.”

제냐는 당연하다는 듯 그녀에게 다가오는 루미에르를 보며 입을 뻐끔거렸다.

“왜, 왜 나와 있어요?”

제냐는 급하게 루미에르의 꼴을 살폈다. 루미에르는 전에 줬던 로브를 입고 있었지만 저 잘난 얼굴은 하나도 가려지지 않았다.

빠르게 주변을 살핀 제냐가 굳어 있던 몸에 힘을 주며 루미에르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녀는 루미에르의 이마께에 자리한 모자를 쭉 늘어트리며 작게 외쳤다.

“도대체 뭐예요?!”

당황과 놀람이 섞여 머리가 하얗게 비는데, 루미에르가 고개를 숙였다.

불쑥 가까워지는 거리에 코를 부딪칠 뻔한 제냐가 눈을 찌푸리며 뒤로 고개를 뺐다. 그리고 생글생글 웃고 있는 루미에르에게 삐딱하게 물었다.

“왜 웃어요?”

“그냥, 마중을 나오니 좋아서요.”

그 태평한 답에 헛웃음이 튀어나올 뻔했다. 제냐가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자 루미에르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걱정 말아요. 다른 마족들과 마주치지 않았어요.”

그게 정말이냐고 눈을 가늘게 뜨는데, 루미에르가 제냐의 어깨를 감싸 왔다.

“뭐예요?”

손을 잡긴 해도, 어깨를 감싼 건 처음이었다. 제냐가 기겁하는데 루미에르가 옆 통로를 눈짓했다.

“누가 와요.”

철렁, 심장이 발끝으로 처박혔다. 제냐가 숨을 죽이며 초조하게 복도를 쳐다봤다.

“어쩔 건데요?”

밖으로 나왔다면, 뭔가 생각해 둔 게 있을 것 아닌가? 제냐의 물음에 루미에르가 작게 미소를 짓더니, 그녀를 끌고 복도 한쪽에 자리한 커다란 조각상 뒤로 몸을 숨겼다.

“움직이면 안 돼요.”

제냐가 루미에르의 몸과 벽 사이에 눌려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루미에르의 숨결에 정수리의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는 게 느껴질 정도로 너무나 가까운 거리였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귀를 쫑긋거리고 있던 제냐는 아무리 기다려도 느껴지지 않는 인기척에 눈을 찌푸렸다.

‘설마 거짓말을 한 거야?’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그녀를 좋아한다는 루미에르의 말이 떠올랐다.

어이가 없어서 새초롬하게 눈을 뜨는데, 작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서? 그럼 내일은…….”

바로 내뱉었으면 부끄러울 뻔했다. 아닌 척해도 루미에르의 말을 엄청 신경 쓰고 있던 게 들킨 셈이다.

아니, 그래도 이렇게 멀리 있었으면 그냥 방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 아닌가?

“잘도 이기겠다!”

“네가 뭘 알아? 나 이번에 훈련 엄청 했거든?”

“웃기시네, 따라오지도 못할 놈이?”

“야! 잡히면 죽는다!”

사용인들은 유치한 대화를 나누며 빠르게 멀어졌다. 제냐는 그들이 멀어지는 걸 확인한 뒤 루미에르를 밀었다. 그리고 의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루미에르는 그런 제냐의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는 건지, 순진한 얼굴로 웃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이제 제냐는 저 착해 보이는 얼굴을 믿지 않았지만……. 정확하지 않은 일을 닦달했다가 부끄러운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신경 쓰고 있다는 걸 티 낼 수는 없지.’

그리고 지금은 진실 파악보다는 얼른 방으로 돌아가는 게 더 중요했다. 제냐가 루미에르의 옷소매를 붙들었다.

“일단 우리 방에 가서 이야기해요.”

주춤거리며 제냐에게 끌려오던 루미에르가 손을 비틀어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누가 오면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서둘러 가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건 방금 봐서 알았다. 하지만 제냐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루미에르에게 여긴 적진 한복판이었다. 이렇게 복도 한가운데에 서 있는 건 미친 짓이었다.

“알겠어요. 그래도 조심할 건 최대한 조심하는 게 좋잖아요.”

“그럼 조금 늦게 가는 게 좋겠습니다.”

조심하는 게 좋다는데, 늦게 가는 게 좋다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루미에르를 올려다보던 제냐가 미간을 좁혔다.

“…설마, 누가 와요?”

“아까 방에 손님이 왔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테라스로 빠져나왔어요.”

“뭐라고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사용인 같았는데, 문을 열어 줄 때까지 기다릴 것처럼 계속 제냐를 불러서요. 안에 있다가 기척을 들키는 것도 곤란할 것 같아서.”

“그럼 들키지 않으려고 나온 거네요?”

루미에르는 담담하게 답했다.

“제냐를 마중 나오고 싶기도 했습니다.”

덧붙여진 말에 제냐가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상황 복잡해지게 왜 나를 좋아하는 걸까? 그다지 특별한 이유도 없는 것 같은데.

그냥 마왕만 처리해 주고 나랑은 깔끔하게 인사하고 헤어지면 좀 좋아?

그 날것의 속내가 너무 이기적이고 염치가 없었다. 하지만 정도를 모르는 건 루미에르도 마찬가지이니 미안해하지 않기로 했다.

“알겠어요.”

제냐가 다시 발을 내딛는데 루미에르가 그녀의 옆에 붙어 서며 물었다.

“화가 났죠? 그러니까 정원에서의 일요.”

그걸 이제 묻나? 제냐가 루미에르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안 났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사과하기 싫습니다.”

받을 생각도 없었지만 너무 당당해서 순간 울컥했다. 제냐는 홱 돌아갈 뻔한 목을 뻣뻣하게 앞으로 고정시킨 채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다.

“그래요. 사과하지 말아요.”

그 뒤로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한참 복도를 걸었다. 그렇게 루미에르의 안내를 받아 몇 바퀴쯤, 복도를 돌았을까.

제냐가 다시 한번 돌아온 그녀의 방으로 연결된 복도 어귀에 멈춰 섰다.

“모퉁이를 돌아도 될 것 같아요?”

제발 자리에 없어라, 주문을 외는데 다행히 루미에르가 그녀의 물음에 긍정했다.

“네, 아무도 없어요.”

제냐는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걸 참으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루미에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그녀의 방 앞에 사용인은 없었다.

“저게 뭐지?”

하지만 문 앞에는 그녀의 얼굴보다 큰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상자를 내려다보던 제냐가 옆에 있는 루미에르에게 물었다.

“…뭐 같아요?”

루미에르가 선선히 답했다.

“마법 물품요.”

“마법 물품요?”

그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할 일인가?

“그리 대단한 물건 같지는 않은데요.”

그 대단하지 않다는 기준은 누구를 기준으로 한 거지? 만약 그게 루미에르를 기준으로 한 거라면…….

제냐가 슬쩍 뒤로 한 발짝 물러나 그의 뒤에 숨자 루미에르가 거리낌 없이 몸을 숙여 상자를 들어 올렸다.

혹시 잡아들거나, 움직이면 터지는 폭탄 같은 건 아닐까 싶어 눈을 질끈 감았던 제냐는 아무런 소리가 없자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귀엽다는 듯 웃고 있는 루미에르를 발견했다.

“…왜 그렇게 봐요?”

제냐가 붙잡고 있던 루미에르의 로브를 놓으며 묻자 그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귀여워서요?”

제냐가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진저리를 치며 루미에르를 옆으로 밀어내고 잠긴 문을 열어젖혔다.

루미에르가 그녀를 따라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와 테이블 위에 상자를 올렸다.

“아까 그 사용인이 두고 간 건가 봐요. 줄 게 있다고 했었거든요.”

“그렇겠죠.”

그 정도 계산이 없었다면 저 수상쩍은 물건을 챙기게 두진 않았을 것이다. 어떤 놈이 장난을 쳤을지도 모른다고 늘 그렇듯 상자를 무시하거나, 최소 비프를 불러왔겠지.

정체불명의 물건에 살짝 긴장됐지만 옆에 루미에르가 있는 게 안심이었다. 그녀에게는 무슨 일이 생기면 저번처럼 루미에르가 구해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으니까.

제냐가 루미에르와 눈을 맞췄다.

“열어 볼까요?”

“원한다면요.”

열고 싶으면 열라는, 자신만만해 보이는 태도가 더 믿음이 갔다. 제냐는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상자의 리본을 풀었다.

그리 꼼꼼하게 포장돼 있던 것도 아니어서 리본을 하나 풀자 하얀 상자만이 남았다. 더 시간 끌지 않고 상자의 뚜껑을 열자 그 안에서 검은색의 반가면이 튀어나왔다.

“가면?”

생뚱맞기 그지없었다. 도대체 왜 이런 가면이 그녀의 방 앞에 놓여 있는 걸까? 딱히 파티 소식을 들은 것도 아닌데.

제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상자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옆에서 튀어나온 손이 그녀의 손을 막아 냈다.

“제가 볼게요.”

제냐를 가리듯 앞으로 한 발 나선 루미에르가 가면을 들어 올리자 가면 끈에 걸려 있던 종이가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루미에르가 그 종이를 집어 제냐에게 보여 줬다. 작은 글씨체에 제냐가 루미에르의 몸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설명서?”

“가면 설명서인 모양입니다.”

1. 가면의 크기는 사용자에 맞게 조절이 가능합니다.

2. 착용 즉시 머리카락 색이 바뀌니 주의해 주십시오.

3. 사용자가 원치 않는 한 가면은 벗겨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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