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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35)화 (3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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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고스까지 만난 그레모리 공작은 미련 없이 성을 떠났다. 그레모리 공작을 배웅한 제냐는 그녀의 묘한 웃음이 계속 생각났다.

‘이왕이면 이쪽에 이득인 쪽이 좋긴 하겠지만. 그래도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오래 산 마족 중 틈만 나면 명언을 날리려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보통은 이야기가 나오는 흐름이라는 게 있었다.

‘도대체 뭐지?’

그냥 헛소리라고 넘기기에는 그간 들어 온 그레모리 공작에 대한 평판이 있었다. 쓸데없는 빈 소리를 마구 놀리는 타입은 전혀 아니라는 거다.

도대체 그 말은 뭐였을까? 그녀가 말하던 ‘이쪽’은 또 뭐고?

의문을 미처 해소하지 못한 제냐가 마왕의 집무실로 돌아가 곧장 보고를 올렸다.

“그레모리 공작님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

“그래.”

순간 아까 거슬렸던 ‘빌려준다’라는 그 말이 떠올랐지만, 제냐는 굳이 그와 관련해 입을 놀리는 대신 그녀의 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막 펜을 드는데 마왕이 입을 열었다.

“출장을 다녀와야겠다.”

아, 그거. 제냐가 펜을 놀리며 심드렁하게 답했다.

“네, 들었어요.”

“들었다고?”

놀란 것 같은 마왕의 목소리에 제냐가 태연하게 답했다.

“엘리고스 님이 오늘 말씀해 주셨어요.”

지금 그녀가 바쁘게 손을 움직이는 것도 마왕이 없을 때 꼭 봐야 할 업무 리스트를 뽑기 위해서가 아닌가?

“준비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에 만족스러워할 줄 알았는데 돌아온 반응은 의아함이었다.

“상관없나?”

제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답했다.

“…일이 좀 바빠지겠지만, 그렇죠?”

상관없는 걸 넘어서서 쉬는 날은 뭐가 됐든 좋았다. 말을 하면서 자연스러운 미소가 어리는데 마왕이 흠, 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정은 2주 뒤야. 얼마나 걸릴지는 가서 봐야 알고.”

“네.”

“궁금한 건 없고?”

“딱히요?”

언제 돌아오는지가 궁금한데, 방금 마왕도 모른다는 답을 들었다. 그러니 더 물어볼 건 없었다.

할 이야기는 끝난 것 같아 다시 일에 집중하려는데 황당하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평하군.”

이건 웬 또 시비일까? 순간 미간을 좁힐 뻔했지만 출장이 예정되면 마왕은 열에 아홉은 짜증을 내곤 했다.

자기는 일하는데 제냐가 혼자 노는 게 싫은 게 분명했다. 제냐는 눈치껏 입을 다물려 했다.

마왕이 말을 잇지만 않았다면.

“함께 가고 싶은 일행이 있으면 함께 가도 좋고.”

“네?”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제냐가 빠르게 고개를 들고 마왕을 쳐다봤다.

“말이 이상한데요.”

“어느 부분이?”

제냐가 답답함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함께 가고 싶은 일행이 있으세요?”

“무슨 소리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보는 순간, 뭔가 아주 잘못됐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제냐는 엘리고스의 말과 마왕의 말을 되뇌었다. 그리고 잠시 뒤,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폐하.”

제냐가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에 힘을 주며 물었다.

“혹시 출장을 가는 게 전가요?”

큰 결심을 하고 물은 질문에 너무나 산뜻한 답이 돌아왔다.

“들었다며?”

“…….”

제냐는 날카로운 청백색의 눈을 떠올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씨X.’

열이 올랐다. 내가 출장?

제냐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상황을 정리해 보려 노력했다.

“왜 제가 출장을 가죠?”

“내가 보내니까.”

너무나 간단명료한 답이 돌아왔다. 그게 너무나 말이 돼서 더 짜증이 났다.

“저는 시녀인데요? 도대체 어느 시녀가 출장을 가나요?”

마왕성에서 일한 10년 동안 제냐는 마왕성의 사용인이 출장 가는 꼴을 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엘리고스나 왔다 갔다 했지!’

제냐가 눈에 힘을 주고 마왕을 노려봤다. 하지만 아무리 눈으로 욕해도 마왕은 흔들리지 않았다.

“내가 가라고 하면 가는 거야.”

“이건 독재예요!”

아까 그녀를 빌려준다던 말도 그렇고! 억울함을 가득 담아 외쳤지만 마왕은 얄밉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새삼스레.”

악!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제냐는 혀를 깨물며 비명을 참아 냈다. 지금도 시녀라는 위치치고 과하게 떽떽거리고 있다는 자각 정도는 하고 있었다.

제냐가 다시 한번 스스로를 다독이며 질문을 던졌다.

“어디, 어디를 가는 건데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몰랐다. 고작해야 시녀에 불과한 제냐에게 엄청난 일을 시킬 리가 없었다.

“안 궁금하다며?”

“그건 폐하께서 가시는 줄 알아서 그런 거잖아요?!”

기어이 제냐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마왕은 그를 지적했다.

“목소리가 커.”

작게 숨을 뱉은 제냐는 딱딱하게 굳는 입술을 매끄럽게 올리며 생글생글 웃었다.

“…아량을 베풀어 주시죠, 폐하.”

마왕이 그런 제냐의 미소를 감상하는 것처럼 한참을 쳐다봤다. 그리고 제냐의 입꼬리가 달달 떨릴 때가 되어서야 입을 열었다.

“인간계.”

삐이이-

귀 옆에서 이명이 들려왔다. 제냐가 작게 고개를 흔들며 되물었다.

“네?”

“인간계에 가서 조용히 가져올 게 있어.”

애써 유지하고 있던 가면이 무너져 내렸다. 제냐가 형편없이 망가진 얼굴로 마왕을 쳐다봤다.

‘저 미친놈이 뭐라고 하는 거야?’

그 적나라하게 드러난 감정을 전부 봤으면서, 마왕이 물었다.

“어때, 인간인 네가 가장 적임자 같지?”

그녀의 반응을 기대하듯 얼굴을 훑는 붉은 눈을 찔러 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 기대에 부응하듯 크게 동요하는 스스로가 너무 싫었고.

“하.”

제냐의 입에서 비릿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 순간 마왕에게 소리를 지르지 않은 것은, 그에게 손을 휘두르지 않은 것은 전부 10년간 쌓아 온 인내심 덕이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몇 번이나 스스로를 다독이던 그 다짐과, 살고 싶은 욕망.

만약 그 자리에서 마왕의 뺨을 내리쳤다가는 그 손이 마왕의 뺨에 닿기도 전에 바로 목이 뎅강 잘려 나갔을 것이다.

제냐는 입술을 깨물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 그녀는 그 뒤로도 멍청하게 마왕의 집무실에 남아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제냐는 손에 잔뜩 힘을 주며 온점을 찍었다. 보기 싫게 잉크가 번졌지만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그런 서류를 계속 받는 것이 마왕은 불만이었던 모양이다.

“가기 싫어?”

그걸 이제야 묻다니 어이가 없었다.

“…저한테 선택권은 있나요?”

언제나 그렇듯 너에게 선택권은 없다는 답이 돌아올 것이다. 제냐가 얼굴을 왈칵 일그러트리는데 마왕이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싫으면 가지 않아도 돼.”

“네?”

제냐가 깜짝 놀라 마왕을 쳐다봤다.

“원치 않으면 가지 않아도 된다고.”

“…….”

이놈이 왜 이러는 걸까? 언제부터 그녀의 마음이나 생각을 그리 신경 썼다고.

제냐가 마왕의 의중을 의심하는 사이 그가 새로운 제안을 했다.

“일주일 안에 답을 하면 좋겠군.”

이미 오늘 치의 인내심은 전부 사용했다. 제냐는 참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갑자기 왜 이러세요?”

“뭐가?”

제냐가 말없이 저를 쳐다만 보자 마왕이 건조하게 답했다.

“네가 마음을 먹지 않으면 쓸모없으니까.”

뭐, 얼마나 대단한 일을 맡기신다고. 제냐가 코웃음을 쳤다.

“맡기시는 일은 다 하는 걸 아시잖아요.”

이제껏 마왕의 명령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적은 없었다.

이번에도 그러면 되는 것 아니냐는 비꼼에도 마왕은 덤덤해 보였다.

“그래, 하지만 이번에는 네 자발적인 의지도 중요해서.”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절대 평범한 일은 아닌 게 분명했다. 하긴 인간계로 가는 일 자체가 평범한 일은 아니긴 했다.

도대체 마왕은 인간계에 무슨 볼일이 있는 걸까? 조용히 가져올 건 뭐고?

“무슨 일인데요? 인간계에 간다고만 말씀하셨지 그 이상은 말해 주지 않으셨어요.”

“간다고 하지 않는 이상은 알려 줄 수 없어. 극비니까.”

익숙한 답이 돌아왔다. 제냐는 한숨을 쉬며 되물었다.

“아는 이가 얼마나 되는데요?”

“한 손에 꼽지.”

그렇게 중요한 일에 단순히 제냐가 인간이라는 이유로 끼워 넣었다고?

“중요한 일이고,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야. 네가 있으면 일은 조금 쉬워지겠지만, 없어도 상관은 없어.”

가벼운 척,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인 척 말하고 있지만 제냐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마왕이 그녀에게 맡기려는 일에서는 아주 위험한 냄새가 났다. 마계에 온 이후, 늘 피하려고 하던 죽음의 냄새.

그러니까 당연히 저 일을 거부해야 했다. 웬일로 거부권까지 주셨으니 그걸 마음껏 이용하고 싶었다.

하지만 인간계였다.

제냐는 긴 침묵 후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볼게요.”

“그래.”

무거운 답에 딸려 오는 가벼운 긍정에 딱딱하게 굳어 오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제냐가 한숨을 푹 내쉬는데, 마왕이 경고하듯 말했다.

“글씨도 깔끔하게 쓰고.”

막 제냐가 건넨 서류 안, 지저분한 글씨를 내려다보는 눈에 전에 없이 짜증이 가득했다.

“알겠어요.”

이런 무거운 이야기 후 나오는 게 저딴 말이라니, 참 마왕다웠다.

* * *

왕국을 떠나 제국에 갔을 때는 왕국의 모습을 그렸고, 신전에 맡겨졌을 때도 왕국의 모습을 그렸다.

하지만 마계에 잡혀 왔을 때는 왕국이 아닌 인간 세상 자체를 그렸다.

마계의 칙칙한 풍경과는 다른 푸른 하늘을 하루에 한 번 꼬박꼬박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그 푸른 하늘을 생각하지 않은 지 얼마나 되었더라?

일에 치여서,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아서, 너무 어릴 때의 기억이라서.

어떻게 해도 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아서.

제냐가 인간계를 떠올리지 않는 이유는 충분했다. 그래서 습관처럼 용사의 구원을 바라면서도 인간계로 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마왕의 입에서 인간계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마음이 이리 술렁이는 이유는 뭘까?

‘갑자기 인간계라니, 수상쩍기 짝이 없는데.’

마왕의 제안에 대한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오래 끌 문제도 아니었고.

내일 출근하자마자 확실히 그녀의 의사를 전하는 것이다.

퇴근을 하고 방으로 돌아가는 길. 땅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제냐는 결론을 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빤히 그녀를 바라보는 청량한 푸른 눈을 보며 기겁했다.

지금 이 남자가 왜 여기에 서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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