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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34)화 (34/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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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양 보이면 말 좀 해 봐!”

“조금 더 가까이 와야 할 것 같은데.”

유독 시야가 트인 마족이 눈에 힘을 주고 고개를 쭈욱 뺐다.

“이제 슬슬 보인다.”

그렇게 보인다, 보인다 중얼거리며 발을 초조하게 떨던 이가 흠칫 몸을 굳혔다.

“어?”

그 묘한 반응에 사용인들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왜 그래?”

“뭔데? 빨리 말해 봐.”

혹시 정말 위험한 마족이라면 얼른 도망가겠다는 의지가 가득 박힌 얼굴이었다.

“…그레모리 공작가 문양인데?”

사용인들의 얼굴에 의문이 들어찼다.

“그레모리 공작가?”

“또 베리스 백작님과 비네 자작님이 오신 거야?”

“또?”

“설마.”

자기들끼리 시선을 주고받던 사용인들이 제냐를 돌아봤다.

“그건 끝났잖아? 그치, 제냐?”

“네, 그렇죠.”

제냐의 답에 사용인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지간히 두 마족이 밉보인 모양이었다.

“그럼 그레모리 공작가의 문양을 쓸 만한 마족이 누가 있어?”

약간의 침묵 후 누군가 말했다.

“…본인?”

“뭐?!”

빠르게 가까워지는 마차를 보며 속닥거리던 사용인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뒤, 그들의 앞에 멈춰 선 마차의 문이 열렸다.

우아하게 틀어 올린 탐스러운 붉은 머리카락과 그 위에 쓴 금색 왕관. 그리고 검은 벨벳 드레스.

그 특징만 봐도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는 여인이 마차에서 내렸다.

그레모리 공작.

여인의 정체를 알아차린 사용인들이 모두 깊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공작님을 뵙습니다.”

그들을 따라 고개를 숙이는데 그녀의 앞에 그림자가 졌다. 제냐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앞을 쳐다봤다.

그리고 고상하게 웃고 있는 그레모리 공작과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제냐가 뭐라 반응하기 전 공작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제냐, 오랜만이군.”

마왕의 전속 시녀이기도 하고, 그녀가 가진 특이한 성력 덕에 몇 차례 안면이 있긴 했다. 제냐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작님.”

“앞으로 잘 부탁하네.”

고작 하루 모시는 건데, 앞으로라는 말을 붙일 필요가 있나? 제냐는 조금 삐뚠 생각을 하면서도 얼굴만큼은 공손하게 답했다.

“네.”

“그럼 우선, 엘리고스를 만나러 가 볼까?”

당연하다는 듯 행선지를 정하는 공작에 엘리고스의 말이 떠올랐다.

‘곧장 폐하께 안내해라. 다른 곳으로 새지 못하게.’

정말 서로 친한 사이는 맞는 모양이었다. 그레모리 공작에 대한 위험도를 대폭 상승시킨 제냐가 표정을 정리하며 고개를 들었다.

“죄송합니다, 곧장 폐하께 모셔 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흐음, 누구에게?”

이런 일로 화를 낼 마족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제냐는 얼른 엘리고스의 이름을 팔았다.

“엘리고스 님께서…….”

톡톡 입술을 두드리던 그레모리는 생각보다 말끔히 물러났다.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예상대로 큰 반응이 없는 그레모리에 안도한 제냐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녀를 데리고 마왕에게 향했다.

* * *

꽤 오래 이어지는 대화에 슬슬 다리가 아팠다. 기밀 이야기가 오갈 때는 특별한 명령이 없는 한 집무실 앞에서 대기해야 했는데, 오늘 역시 그랬다.

지루함을 견디던 제냐는 자연스레 요즘 최대 고민인 루미에르를 떠올렸다.

‘고백을 받아 보지 못한 건 아니지만.’

제냐에게는 고백도, 그리고 거절도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과 루미에르는 달랐다.

제냐는 상대의 마음을 거절하면서 한 번도 그들이 상처받을까 걱정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제냐에게 아무것도 아닌 이들이었으니까.

하지만 루미에르는 제냐에게 특별했고, 제냐는 그가 상처받지 않길 바랐다.

그러니까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고백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처럼 상대를 무시할 수도, 거리를 둘 수도 없다는 거다.

‘비프의 조언이 전혀 도움이 안 되네.’

제냐는 루미에르와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도대체 고백을 받고도, 그리고 그 마음을 거절하고도 친하게 지내는 건 어떻게 하는 걸까?

머리가 복잡했다. 이쪽도 어떻게 행동 방침을 정해야, 루미에르와도 제대로 된 대화를 한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져 길게 한숨을 내쉬는데 문이 열렸다.

달칵, 울리는 소리에 제냐는 얼른 몸을 돌렸다.

“오래 기다렸지?”

그레모리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제 엘리고스에게 가 볼까 하는데.”

정말 어지간히 친한 사이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둘의 사이와는 별개로 제냐는 한 마족의 눈치를 더 봐야 했다.

제냐가 집무실 문을 슬쩍 쳐다보자 그레모리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저었다.

“마왕성에 있는 동안 그대를 내게 빌려주기로 하셨네.”

그렇다면야.

제냐가 고개를 끄덕이며 곧장 엘리고스의 집무실로 그녀를 안내했다.

물론 순종적인 그 모습과는 달리 그레모리보다 앞서 걷는 제냐의 얼굴에는 못마땅함이 가득했다.

‘아니, 왜 계속 나를 빌려준데?’

제냐가 자기 소유물도 아니고, 꼭 자기 물건 빌려주는 것처럼 왜 항상 저따위로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입 안으로 마왕에 대한 욕을 씹어 삼키며 제냐는 그들을 보고 화들짝 놀라는 사용인들을 지나쳤다.

* * *

그레모리는 그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인간 여자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어깨선에 닿을락 말락 하는 짧은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마계에서도, 인간계에서도 보기 힘든 보랏빛 눈을 가진 인간.

수백 년을 사는 것쯤은 우스운 마계에서 고작 20년을 산 인간은 어리다 못해 갓난아이 같았다.

하지만 제대로 걸을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여려 보이는 이 인간은 수월하게 마계에 적응했다.

‘수월하게는 아닌가?’

뭐가 됐든 이 인간이 이제껏 마계에 살던 그 어떤 인간보다도 잘 적응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내면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어린 인간.

엘리고스는 예전부터 노력보다 능력이 있어야 한다며 못된 말을 내뱉곤 했지만 그레모리는 역시 노력하는 것들이 항상 마음에 들었다.

대화 내내 건조하던 마왕의 얼굴을 떠올린 그레모리는 엘리고스가 싫어할 것을 알면서도 어린 인간에게 말을 걸었다.

“그대.”

“…네?”

말을 걸 줄 몰랐다는 듯 살짝 느리게 답이 돌아왔다. 그레모리는 그녀를 올려다보는 보랏빛 눈을 보며 조언을 건넸다.

“이왕이면 이쪽에 이득인 쪽이 좋긴 하겠지만. 그래도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네?”

갑자기 건넨 뜻 모를 말에 어린 인간이 의아해하는 게 훤히 보였다. 하지만 그레모리는 그 이상 설명을 보태진 않았다.

그레모리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아 보이는 인간을 뒤로하고 곧장 엘리고스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왔다는 말도 없이 집무실로 들어서자, 엘리고스가 못마땅함을 드러냈다.

“노크는 어디에다 뒀지?”

“우리 사이에 그런 게 필요한가?”

엘리고스가 귀찮다는 듯 모노클을 벗으며 고개를 들었다.

옆으로 살짝 흘러내린 붉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배배 꼰 그레모리 공작은 그 청백색 눈을 마주하고도 한참을 말없이 미소만 짓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침묵으로 그 시선을 받아 내던 엘리고스가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뭔데?”

“아직 알려 주지 않은 것 같아서.”

기다렸다는 듯 돌아온 말에 엘리고스가 무심히 답했다.

“아직은 알려 줄 때가 아니야.”

“떠나고 나서야 알려 주려고?”

“그래.”

무뚝뚝한 엘리고스의 대꾸에 그레모리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나중에 미움받는다?”

“딱히 지금도 예쁨받는 건 아닌 것 같은데.”

틈 하나 없는 엘리고스의 태도에 그레모리가 포기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그대는 하겠다고 마음먹은 건 무조건 해 버리니까.”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한번 방향을 정하면 뒤돌아보지 않는 남자다. 엘리고스의 그런 점은 장점이기도 했지만 단점이기도 했다.

그레모리의 시선이 집무실 문으로 향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 너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제냐에게로 닿은 셈이었다.

“이왕 만난 김에 힘을 좀 확인해 보고 싶어.”

엘리고스의 눈썹이 한껏 치켜 올라갔다. 대놓고 안 된다고 말하는 그 표정을 보며 그레모리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내가 그쪽에 관심이 많은 건 어쩔 수 없잖아?”

모든 마법에 능통하지만 마족 중에서도 매우 드물게 치료 마법에 제일 능통한 그레모리는 제냐가 가진 힘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엘리고스는 그런 그레모리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해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 힘은 폐하의 것이다.”

제냐의 힘을 보게 해 줄 생각은 추후도 없으니 귀찮게 하지 말고 얼른 꺼지라는 말을 참 간단하게도 했다.

그레모리가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그대도 참 여전하지.”

“너는 왜 내 앞에서만 이렇게 구는 거야?”

왜 자기 앞에서만 그러냐니.

“그야, 너는 어디 가서 소문낼 놈은 아니니까.”

고위 귀족이라는 이름이 있으니 밖에서 이런 편한 모습을 맘대로 보여 줄 수는 없었다. 장난스럽게 씩 미소를 짓자, 엘리고스가 혀를 찼다.

“이런 게 어디가 우아하다는 건지.”

“너도 나랑 있을 때는 말이 많은 편 아닌가?”

정확히는 조금 더 감정 표현이 거칠다고 해야 맞겠지만. 엘리고스가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내 일을 대신해 줄 거 아니면 가지 그래.”

“…음.”

확실히 책상에는 서류가 한 무더기였다. 앞으로 있을 일 때문에 한동안 엘리고스는 꽤 바빠질 예정이기도 했고.

“어쩔 수 없네. 그래, 그럼 가 볼게.”

물론 아무리 엘리고스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해도, 그걸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친우의 괴로움은 곧 그녀의 기쁨이 아니겠는가?

홱 몸을 돌려 문을 활짝 연 그레모리는 방을 나서며 말했다.

“앞으로 한동안 고생 좀 하고?”

놀리듯 건네진 말에 안에서 뿌직, 펜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레모리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집무실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던 제냐가 의아한 얼굴로 집무실 안쪽을 쳐다봤지만 그레모리는 곱게 입꼬리를 말며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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