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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33)화 (33/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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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냐는 뻑뻑한 눈을 문지르며 밝아진 방을 둘러봤다. 평소보다 이르긴 해도, 어제 그런 일이 있었던 것치고는 너무 잘 잤다.

신경 줄이 얼마나 굵은 건지 스스로에게 감탄이 될 정도였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제냐는 조용히 침대 밖으로 발을 빼내고, 침대가 흔들리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냐, 왜 벌써 일어나요?”

그와 동시에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제냐가 털썩 침대에 주저앉았다.

“언제 일어났어요?”

“방금이요.”

제냐는 할 말이 많은 얼굴로 루미에르를 쳐다보다가 다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냥, 좀 일찍 일어났어요. 더 자요.”

하지만 루미에르는 고개를 저으며 제냐를 따라 일어났다.

“이미 깼어요.”

그녀를 따라 움직이는 시선을 느끼며 제냐는 얼른 욕실로 향했다.

“음, 그래요. 난 오랜만에 여유롭게 목욕을 해야겠어요.”

욕실에 오래 머물 이유를 만든 제냐는 욕실의 냉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 방에서 내가 도망을 나오다니.

따뜻한 물을 틀고 수증기가 맴돌기 시작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제냐는 입욕제를 듬뿍 뿌린 욕조에 몸을 담그며 시간을 보냈다.

‘얼굴 마주칠 일을 줄여야 해.’

바깥에 신경을 끄고 최대한 오래,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시간을 끈 제냐는 손발이 쭈글쭈글해지고 물이 미적지근해지고 나서야 욕실을 나섰다.

제냐는 테이블에 앉아 있는 루미에르에게 다가갔다.

“미안해요. 욕실을 너무 오래 썼죠?”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책을 읽고 있었는지 루미에르가 책을 내리며 답했다.

“괜찮아요. 식사 준비할까요?”

“아, 그래 줄래요? 고마워요.”

생각보다 평범한 아침에 안심한 제냐가 테이블 앞에 마주 앉았다. 막 빵에 버터를 바르는데, 루미에르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제냐.”

“네?”

“아까 사용인이 하나 찾아왔어요.”

빵을 입으로 집어넣던 제냐가 깜짝 놀라 루미에르를 쳐다봤다.

“…사용인이요?”

하지만 심장이 벌렁거리는 제냐와 달리 루미에르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마시라는 듯 찻잔을 앞으로 밀어 줬다.

“출근 전에 집사를 잠시 보고 가라고 하더라고요.”

사용인이 왔고 그 사용인이 한 말을 전해 준다는 건.

“설마 문을 열어 줬어요?”

“아니요, 그냥 문밖에서 이야기하고 가더라고요. 답변은 중요하지 않았나 봐요.”

“아.”

이번만큼은 사용인들의 불성실함이 도움이 됐다. 제냐가 한껏 긴장한 어깨에서 힘을 풀었다.

“출근 시간에 늦지 않게 그 전에 오라고 하던데요.”

업무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어이가 없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시간을 딱딱 맞춰 일했다고.

출근 시간을 그렇게 중요히 여길 거면 퇴근 시간도 지켜 줬으면 좋겠다고 빈정거린 제냐가 코웃음을 쳤다.

“악덕 상사라니까.”

제냐는 시간을 확인하며 빵을 씹었다. 일찍 일어난 것치고, 목욕을 오래 한 탓에 시간적 여유가 넘치진 않았다.

빵 한 쪽을 대충 삼킨 제냐가 차로 목을 축이고는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하는데 루미에르가 제냐의 뒤로 다가왔다.

“제냐, 머리가 덜 말랐어요.”

제냐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만져 봤다. 살짝 젖어 있긴 하지만, 딱히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아요?”

“감기에 걸릴 거예요. 욕실에서도 오래 있었잖아요.”

음, 제냐가 고민을 하는데, 루미에르가 그런 제냐의 위로 부드러운 수건을 덮었다.

갑자기 시야를 가리는 하얀 수건에 멀뚱멀뚱 눈을 깜빡이던 제냐는 수건이 머리를 부드럽게 문지르자 정신을 차렸다.

“지금 머리 말려 주는 거예요?”

“평소에는 제냐가 해 주니까요.”

내 머리를 말려 주는 것보다는 자기 머리를 스스로 말리는 게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누가 머리를 말려 주는 게 너무 오랜만이어서 그랬을까, 서툰 손길에 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제냐는 그 어색한 손놀림이 싫지 않았다.

그렇게 촉촉하던 머리가 부스스해졌을 때쯤, 두피를 매만져 보던 루미에르가 수건을 치워 냈다.

사락, 멀어지는 수건 너머로 루미에르의 푸른 눈이 둥글게 휘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한 푸른 눈에는 전혀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이는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루미에르가 맑은 얼굴로 인사했다.

“잘 다녀와요.”

어색하게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던 제냐가 입술을 달싹였다.

“…다녀올게요.”

“기다릴게요.”

살랑 손을 흔든 루미에르가 직접 방문을 열어 줬다. 제냐는 얼떨결에 루미에르의 손짓에 따라 방을 나섰다.

그렇게 한참을 걸은 뒤에야 스스로가 얼마나 멍청해 보였을지 깨달았다. 제냐가 홱, 뒤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뭐야?”

뭔가 평소와 같으면서도 달랐다. 도대체 이게 뭐지? 하지만 상념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제냐! 안녕? 복도 한가운데에 서서 뭐 해?”

한 사용인의 인사에 제냐가 다시 걸음을 옮기며 대꾸했다.

“다 똑같지, 출근하기 싫다는 생각.”

재밌다는 듯 깔깔 웃는 사용인을 뒤로하며 제냐는 조금 전 느꼈던 뜻 모를 감정을 털어 냈다.

* * *

제냐는 책상 가득 쌓인 서류를 질린 눈으로 쳐다봤다.

그가 고작 하루 자리를 비웠다는 걸 잘 알고 있음에도, 방 안을 가득 채운 서류만 보면 일주일은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제냐는 그녀보다 더 바쁜 것이 분명한 엘리고스를 쳐다보며 아침에 내뱉었던 말을 취소했다. 아무래도 출근 시간 전에 오라고 했던 건, 자기 업무 시간을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 분명했다.

딱히 남을 동정할 처지는 아니지만, 잠시 손목의 안녕을 빌어 주던 제냐는 고개를 드는 엘리고스에 자세를 바르게 했다.

“기다리게 했군.”

“아니에요.”

짜증스레 서류를 옆으로 밀어낸 엘리고스가 바로 그녀를 부른 이유를 이야기했다.

“손님이 올 거야.”

“신경 써야 하는 손님이요?”

“그래. 지금 바로 마중 나가도록 해.”

지금 당장? 제냐가 미간을 좁혔다.

“누군지 여쭤봐도 되나요?”

당일이 되어서야 손님이 올 거라는 걸 알려 준 걸 보면 기밀 어쩌고저쩌고겠지만, 곧 손님을 만날 테니 이제 보안은 불필요했다.

엘리고스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그가 거리낌 없이 답했다.

“그레모리 공작.”

제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레모리 공작?

“혹시 그때 처벌에서 무슨 문제가 생겼나요?”

“아니, 그건 아니야. 다른 업무로 폐하를 뵈러 온 거다.”

문제가 생긴 게 아니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일반 귀족도 아니고 고위 귀족의 방문은 뭐가 됐든 사용인에게는 꽤 피곤한 일이었다.

“곧장 폐하께 안내해라, 다른 곳으로 새지 못하게.”

제냐는 흘끗 엘리고스의 얼굴을 살폈다. 다른 귀족들도 다 편하게 대하는─하찮게 여기는─ 엘리고스는 그레모리 공작과는 꽤 가까운 사이였다.

‘서로 말을 놓지?’

제냐가 처음 엘리고스의 신분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도, 그가 마계에 몇 안 되는 고위 귀족 중 하나인 그레모리 공작에게 감히 반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엘리고스가 일반 사용인이었다면, 제냐는 강제로 그를 자리에서 끌어냈을 것이다.

‘미쳤냐고 한 번쯤 물어봤어도 재미는 있었을 텐데.’

제냐가 언제 엘리고스에게 미쳤냐는 말을 해 볼 수 있겠는가?

“곧 긴 출장이 있을 거야.”

이어지는 전달 사항에 제냐가 다시 대화에 집중했다.

“그래요?”

자기 출장을 굳이 그녀에게 말해 줄 리가 없으니 이건 마왕의 출장을 뜻하는 것일 테다. 제냐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그럼 바쁜 일 먼저 빠르게 처리하겠습니다.”

보통 엘리고스가 그녀에게 미리 마왕의 출장을 알려 주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마왕이 없을 때를 대비해 업무 일정을 잘 조율하라고.

‘한동안 바쁘겠지만, 마왕이 출장을 가면 또 휴가니까.’

마왕이 없는 사이, 루미에르와도 제대로 대화를 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물론 그 전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겠지만.

“전달 사항은 그게 다다.”

“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제냐의 인사에 엘리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몸을 돌려 방을 나서려고 하는데 훈풍이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기분 나쁘지 않게 불어오는 바람이 사라지자 얼굴 위로 사르륵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손을 들어 만져 보니 머리카락이 바짝 말라 있었다. 거의 다 말랐던 것 같은데,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하긴 고위 귀족을 맞이하러 가는데, 부스스한 머리를 용납할 리가 없었다. 제냐가 어느새 다시 서류에 집중하고 있는 엘리고스에게 고개를 까닥이며 곧장 중앙 홀로 향했다.

‘집중하자.’

아무리 그레모리 공작이 온화한 편이라지만, 엘리고스와 친하다는 것부터가 절대 만만한 마족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제냐, 왔어?”

제냐가 중앙 홀에 도착하자마자 사용인들이 호기심을 가득 안고 다가왔다.

“손님은 네가 담당한다며?”

손님이 온다는 소문은 퍼졌는데, 그 정체는 아직 모르는 듯했다.

“그렇게 됐네요.”

“누가 오는지는 알아?”

“글쎄요. 그것까지 듣지는 못했는데요.”

누구인지 밝혔다간 홀에 가득 찬 사용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것이다.

“몰라?”

제냐는 되레 그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들은 것 없으세요?”

“우리 중에서도 아는 이들이 없더라고.”

“그래요?”

사용인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불평을 시작했다.

“도대체 누가 오는 거야?”

“벌써 걱정이네.”

“또 성을 고쳐야 하는 것 아니야?”

“아니, 우리같이 연약한 마족들을 왜 이렇게 괴롭히는 거야?”

제냐는 그렇지 않냐며 그녀를 쳐다보는 사용인들에게 웃음을 보였다. 그녀에게는 사용인들도 감당하기 힘든 마족인 건 마찬가지였다.

한참 까다로운 귀족이 얼마나 피곤한지에 대해 열을 올리던 사용인들이 제냐를 토닥였다.

“근데 담당은 제냐라며.”

“제냐, 고생 좀 하겠다?”

제냐는 그들의 말에 굳이 대꾸하지 않고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렇게 누가 오는 걸까, 친마왕파 귀족 인사들이 사용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데, 사용인들 틈에서 누군가 외쳤다.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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