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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32)화 (3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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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지 못한다는 냉정한 답에 제냐가 눈만 홉떴다. 그런 제냐의 표정을 봤으면서도 비프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사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본성 나오는 거지.”

본성이라니? 제냐는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무슨 소리세요? 얼마나 착한데요. 진짜 많이.”

용사인 루미에르가 천성이 별로라니? 정말 세상에서 제일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제냐의 말에 비프가 코웃음을 쳤다.

“착한 척했나 보지. 가까워지고 나서야 보이는 게 있어.”

“열이면 열이 다 착하다고 할 텐데요.”

이제껏 그가 구해 준 인간들 모두가 그를 찬양하고 그의 앞에 감사를 표할 텐데. 그런 사람을 착하다고 하지 않으면 누구를 착하다고 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번에도 제냐의 말은 통하지 않았다.

“연기도 잘하나 보군.”

“윽.”

오늘따라 비프는 굉장히 냉소적이었다. 평소 아무리 말 안 듣는 사용인이 있어도 최악의 상황이 아닌 이상에야 허허 웃으며 기회를 여러 번 주던 그답지 않았다.

그러니까 비프는 제냐의 연인이 못마땅한 눈치였다.

‘루미에르의 이미지가 너무 쓰레기가 된 것 같은데.’

어쩌다가 비프가 루미에르를 이렇게 싫어하게 된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또 아무런 죄가 없다고 우기기에는 오늘 보여 준 행동은 정말 최악이었다. 내가 자기가 얼마나 필요한지 알고 자기 몸 막 쓰는 못된 놈.

피를 울컥 토하면서도 함께 있을 수 있어서 좋다던 모습을 떠올리며 묘한 얼굴을 하는데 비프가 혀를 찼다.

“그런 놈들은 헤어질 때도 조심해야 해. 제 뜻대로 안 되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니까?”

이미 제 뜻대로 안 되는 일에 무슨 짓을 저지른 후라고 말하기가 힘들었다.

“네 소문을 안 좋게 낼 수도 있고. 반대로 널 위협할 수도 있고 말이야.”

글쎄. 이번처럼 자기 몸을 건드릴지언정 제냐에게 위협을 가할 것 같진 않았다.

“아니면 불쌍한 척하면서 동정심을 자극할 수도 있지.”

그래, 그런 식으로.

제냐는 튀어 나갈 뻔한 말을 삼키며 혀를 씹었다.

“하지만 뭐가 됐든 네가 마음만 굳게 먹으면 다 해결할 수 있어.”

비프가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처럼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너를 위협하는 쪽으로 방향이 틀어지면 폐하나 집사님에게 도움을 청하면 되는 거고. 불쌍한 척해도 매정하게 잘라 내면 되는 거니까.”

자연스레 앞의 말은 무시한 제냐가 눈을 찌푸렸다.

매정하게 잘라 내는 게 가능할까? 그에게 가진 개인적인 감정은 둘째 치더라도 그녀도 루미에르에게 바라는 것이 있는데? 솔직히 오늘 일만 아니면 둘 중 매달리는 건 오히려 이쪽이었다.

제냐가 머뭇거리다 물었다.

“…매정하게 못 잘라 내면요?”

“못 잘라 내겠냐?”

조용히 침묵하자 이번에는 비프가 땅이 꺼질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정말 싫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말한다는 얼굴로 꾸역꾸역 이야기했다.

“그럼 계속 만나야지, 별수 있나?”

자기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게 싫다고 중얼거린 비프가 제냐를 똑바로 바라봤다.

“대신, 또 한 번 오늘같이 네가 놀랄 만한 일이 있으면. 그때 다시 생각해 봐.”

꼭 그때는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하는 문제라고 비프가 여러 차례 강조했다.

“영 아니다 싶으면 헤어지는 거고.”

비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냐, 무작정 참고 그러는 거 좋은 거 아니다.”

그러고는 언제나 그렇듯 다정하게 제냐를 다독였다.

“계속 져 줄 필요 없고. 평소처럼 똑 부러지게 굴어.”

“…네.”

알아들었다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니 비프가 그제야 안심한 듯 웃었다.

“무슨 일 있으면 꼭 오늘처럼 찾아오고. 오늘 정말 잘 왔어. 고맙다.”

제냐는 그녀의 머리를 토닥거리는 손길을 얌전히 받으며 생각했다. 비프는 내가 찾아온 게 왜 고마울까?

제냐가 목을 긁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루미에르와 약속한 시간이 끝나기 전까지 비프의 옆에 머물렀다.

* * *

비프의 옆에서 충분히 마음을 안정시키고 방으로 돌아온 제냐는 대화를 시도하기로 했다.

제냐는 그녀가 방에 돌아온 순간부터 그녀에게서 눈 한 번 떼지 않는 루미에르의 앞에 앉아 몇 번이나 말을 골랐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를 더 자극할 것 같고, 저런 이야기를 하면 그가 말을 오해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기에는 오늘 있었던 일이 너무 엄청났다.

“루미에르, 우리 할 이야기가 있죠?”

루미에르는 말없이 그녀를 쳐다만 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침묵이 달가웠다. 또 입을 열었다가 그가 무슨 미친 소릴 할지 두려웠으니까.

제냐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여태까지 마왕이나 엘리고스에 대해 물은 이유가 뭐예요?”

이쪽은 정말 긴 시간을 들여서 간신히 던진 질문이었는데, 루미에르의 답은 굉장히 빠르게 돌아왔다.

“제냐랑 친한가 싶어서요.”

꼭 미리 답을 준비해 둔 사람 같았다.

“경쟁자가 얼마나 매력적이지 확인…….”

제냐가 재빨리 그의 말을 잘라 냈다.

“좋아요. 대충 알아들었어요.”

제냐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확인차 물을게요. 날 좋아한다는 게 그런 의미…….”

“제냐, 좋아해요.”

그래, 그럴 줄 알았다.

제냐가 두 손에 얼굴을 묻고는 물었다.

“왜 좋아하는데요?”

“제냐라서요.”

똑 떨어지는 답에 귀를 막고 싶었다. 하지만 귀를 막으면 얼굴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언제라도 다시 얼굴을 숨길 수 있게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아니, 그런 거 말고요. 어쩌다가 좋아하게 됐냐고요.”

“따뜻해서?”

딱히 체온이 높은 편은 아니었는데. 제냐가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다른 이유는 없고요?”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체온이 높으면 다 된다 이거야?’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눈을 찌푸리는데 루미에르가 자연스레 제냐의 눈가를 건드렸다.

못 만지게 해야 하나? 하지만 딱히 흑심을 품은 것 같지는 않았다.

제냐가 손을 내치지 않자 루미에르의 손이 그녀의 얼굴 한쪽을 완전히 감쌌다. 그러고는 배시시 웃는 것이다.

불과 몇 시간 전 그 꼴을 보고도 저 웃음이 순수해 보이는 건, 전부 저 잘난 얼굴 탓인가?

자신이 이렇게 시각적인 것에 약할 줄 몰랐다. 제냐가 한숨과 함께 그의 손을 내리려는데 루미에르가 말했다.

“제냐, 좋아해요.”

제냐가 입을 꾹 다물고 그의 손을 잡아 내렸다.

웃음만큼이나 순진한 고백이었다. 사귀자는 말도, 좋아해 달라는 말도 없는. 그저 자기의 감정을 알려 주는 그런 고백.

그가 바라는 건 딱 하나, 그녀의 곁에 있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사귀고 싶진 않고?’

제냐는 불쑥 머릿속에서 튀어나온 질문을 지워 냈다. 만약에 그렇다는 답이 돌아오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했다.

“…안 돼.”

“네?”

“아니에요.”

잠시 유예를 둘 필요가 있었다. 대화할 준비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아직 마음의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다.

도망가는 걸 좋아하진 않았다. 이게 그냥 외면한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렇지만 하루 만에 다 겪기에는 너무 큰일이었다.

제냐는 아주 잠시만 이 모든 것에게서 고개를 돌리기로 했다.

슬쩍 루미에르의 눈을 쳐다봤다. 그러자 루미에르가 속도 모르고 예쁜 웃음을 보여 줬다. 제냐는 입 안의 살을 잔뜩 깨물며 머리를 감쌌다.

* * *

많이 고단했는지 옆에서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려왔다. 루미에르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 깊게 잠이 든 제냐를 돌아봤다.

단정하고 깔끔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자 자연스레 과거에 만났던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스트리아.’

그날 이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몇 번이나 되뇐 이름이었다. 얼굴도 대화도 점점 흐려지는데 부득불 붙잡고 있던 이름.

아무리 배운 것이 없었더라도 보는 순간 참 귀한 사람이란 걸 눈치챌 수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던, 그리고 그 옷만큼이나 예뻤던 여자아이.

처음으로 받아 본 호의의 기억에는 그 애가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서, 아무런 편견 없이 주어졌던 최초의 따스함은 아주 긴 시간 그를 따라다녔다. 그 기억을 보자마자 잊혀 가던 그날이 생생하게 떠오를 정도로.

본능적으로 그때의 아이를 알아봤던 걸까? 왜 그토록 저 보랏빛 눈동자가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는지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너니까.’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카락도, 창백하다고 여겨질 만큼 하얀 피부도, 다정한 손길까지도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웃어 주지도, 무언가를 약속해 주지도 않았는데 별것 아니라는 듯 다가오는 손길이 이상했다. 하지만 그 손길의 주인이 소녀였다면 이상한 것은 없었다. 소녀는 본래 그런 사람이었다.

루미에르는 슬쩍 손을 내밀어 침대 위에 놓인 자그마한 손을 붙잡았다. 다행히 깊게 잠이 든 제냐는 루미에르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했다. 단정하게 정리된 분홍빛 손톱이 그녀의 성정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조심조심 손을 매만지다 그녀의 손에서 유일하게 딱딱한 손가락의 굳은살을 톡 건드렸다.

이로 잘근잘근 씹어 보고 싶었다. 하지만 한번 깨물면 자제하지 못할 것 같았다.

오늘처럼.

“글쎄요, 그런 이름은 없는데요.”

“…신전이 습격을 받아서…….”

“살아남은 이가 하나도 없다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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