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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31)화 (3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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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두서없긴 했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은 전부 했다. 그러니까 이제 루미에르도 화가 난 것 같은 얼굴은 그만둬 줬으면 좋겠는데…….

도대체 어느 지점에서 이렇게 화가 난 거야? 꼭 내가 나쁜 짓을 저지른 것 같잖아? 나는 왜 눈치를 보고 있고?

그냥 언제 갈 거냐고 물은 게 단데, 실제로 천년만년 마계에서 살 건 아니지 않은가?

“계속 이렇게 지낼 순 없잖아요?”

지금 당장은 당신이 힘들어서 조금 더 쉬어 간다고 할지라도 당신을 찾는 이들도 많고, 당신이 해야 할 일도 많으니까. 그리고 당신은 용사니까.

하지만 제냐는 그 말들을 삼켰다.

루미에르는 용사라는 호칭을 싫어한다고 했다. 제냐가 입술을 깨무는데,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기만 하던 루미에르가 돌연 몸을 돌렸다.

‘아니, 어딜 가?’

아직 대화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어딜 가나 싶어 그를 따라가려는데 다행히 루미에르는 바로 앞의 화단으로 다가갔다.

우선은 방에 돌아가자고, 여기서 싸우는 건 좋지 않다고 말하려던 제냐는 루미에르의 손이 움켜쥔 것이 뭔지 확인하고는 하얗게 질렸다.

“설마, 아니죠?”

제냐의 목소리가 볼품없이 흔들렸다. 하지만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고, 루미에르는 보란 듯 제냐를 똑바로 바라보며 독초를 씹어 삼켰다.

“미친…….”

입을 꾹 다물고 꽃을 우물대는 남자를 보며 제냐가 현실을 부정했다. 이건 다 꿈이라고, 지금 눈이 잘못된 거라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눈앞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기어이 입 안에 한 움큼 집어넣은 독초를 전부 삼킨 루미에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됐죠? 저는 떠날 수 없어요. 다시 치료해 주세요.”

정말 미친 건가? 다시 열린 입이 유난히 붉은 것 같다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그가 기침을 했다.

그새 퍼진 독 기운에 비척비척 그녀에게 다가온 루미에르가 제냐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신실한 신자처럼 그녀의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속삭이는 것이다.

“제냐는 살아 있는 내가 필요한 거니까, 내가 건강해지기 전까지는 곁을 떠나지 않을 거죠?”

푸른 눈이 기이한 안광을 띠며 제냐의 얼굴을 담았다.

“나는 제냐를 보기 위해서 이제껏 살아왔던 게 틀림없어요.”

루미에르가 소원을 빌듯 두 눈을 감았다.

“그러니 나를 버리지 말아요.”

엉망이었다. 머릿속도 지금 상황도.

“하.”

지금껏 제냐가 했던 추측은 전부 헛발질이었다는 거다.

나름 마왕의 최측근이라고 알려진 그녀를 포섭해서 마왕성의 정보를 얻으려는 거라고. 들이는 노력에 비해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 안타깝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전부 다.

“네? 제냐.”

제냐가 어떤 얼굴에 약한지 훤히 아는 이 영악한 사내의 목표는 마왕의 죽음이 아니었다.

처연하게 얼굴을 비벼 오는 루미에르를 보면서 제냐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 입을 열면 무슨 말을 할지 몰랐다. 하지만 또다시 그녀를 부르는 입에서 검붉은 피가 울컥 쏟아지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제…, 쿨럭.”

“이 미친놈아!”

아무리 목표가 다르다지만, 제 손으로 독을 먹는 미친놈이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제냐, 배가 조금 아픈 것 같습니다.”

너는 이게 조금 아픈 거냐고. 누가 봐도 실시간으로 장기가 녹아 가고 있는 게 훤히 보이는데!

제냐는 그녀에게 쏟아지는 커다란 덩치를 애써 받아 내며 분을 참지 못하고 그의 어깨를 내리쳤다.

“먹지 말라는 거 다 먹었는데, 안 아프고 배겨요?”

제냐의 타박에도 루미에르는 환하게 웃었다.

“그러니 또 함께 있을 수 있겠죠?”

진짜 머리가 돈 게 분명했다. 상황이 잘못 돌아가도 한참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 * *

그 후 그를 진정시키기까지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점점 더 다리가 풀리고 나중에는 그녀의 어깨에 피를 한 바가지 쏟는 모습에 제냐는 간신히 이성을 붙잡았다. 그리고 성력을 이용해 아주 간단히 그를 치료했다.

그런데 루미에르는 제냐가 그를 고쳐 놓고 밀쳐 내기가 무섭게 다시 정신 나간 짓을 반복하려 했다.

“이제 좀, 자기 발로 일어나 봐요. 무겁다고요!”

“아.”

루미에르는 안간힘을 써 그를 밀어내는 제냐에 순순히 밀려나더니 옆을 돌아봤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이 어디인지 알아차린 제냐는 그가 발을 옮기기 전 덥석,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지금 어디 가요?”

“한 번 더 먹으려고요.”

정말 정신이 저 멀리 가출한 게 틀림없었다.

제냐는 정말 간신히 그를 어르고 달랬다. 그리고 누가 보기 전 잽싸게 모자를 씌웠다.

제냐는 다른 이들이 있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정신없이 루미에르를 끌고 걸음을 옮겼다. 루미에르가 몇 번 자리에 멈춰 섰지만 제냐는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아 버렸다.

그렇게 방에 도착하고 난 뒤 상황이 나아졌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 뒤는 더 가관이었다.

제냐는 없는 정신으로도 야무지게 챙겨 온 피크닉 바구니를 바닥에 내던지고 루미에르의 로브를 벗겼다. 그리고 그의 입가를 벅벅 닦아 주며 버럭 화를 냈다.

“아까처럼 또 이상한 거 주워 먹지 말아요!”

그러자 돌아온 말.

“그것만 안 하면 되나요?”

그러면서 천천히 방을 둘러보는 그 느릿한 행동에서 광기가 느껴졌다. 제냐는 거의 울기 일보 직전이었다.

“몸에 해가 될 만한 짓은 아무것도 하지 말란 말이에요!”

울 것 같은 얼굴이 미안했는지, 아니면 그냥 제냐가 간절해 보였는지 루미에르는 결국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했다.

그렇게 그를 간신히 말리고 욕실에서 피가 묻은 옷을 갈아입으면서 제냐는 서서히 패닉에서 벗어났다.

아니 오히려 더 패닉에 빠졌나? 모르겠다. 그저 얼른 이 방을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제냐는 곧장 욕실을 빠져나와 나갈 준비를 했다.

“잠시 나갔다 올게요.”

“어딜요? 저를 버리고 다른 곳에 가려고요?”

침대에 얌전히 앉아 있던 루미에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냐는 그녀에게 다가오려는 루미에르를 손을 들어서 막았다.

버린다는 말에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았다. 동시에 조금 전까지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제냐는 참지 못하고 꽥 소리를 질렀다.

“못 가게 하면 정말 버릴 거예요!”

언제나 그에게는 다정한 모습을 보여 주려고 애썼다.

실제로도 그랬고, 웬만하면 그의 고집은 다 들어줬었다. 하지만 더 참았다가는 이쪽도 완전히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그러니까 좀 얌전히 기다려요!”

루미에르는 제냐가 소리를 지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소같이 순해 보이는 눈만 끔뻑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방을 나가고 싶었지만 저 머리가 회까닥 가 버린 놈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두 시간, 두 시간 뒤에 올 테니까. 알았죠?!”

얼른 답을 하라고 눈을 부라리자 루미에르가 시계를 보며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평소였으면 그 모습이 안타까워 보였을 것이다. 어쩌면 귀여워 보였을지도 모르고. 시계를 보며 그녀만 기다리는 모습에 더 빨리 와야겠다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 시간을 아주 꽉꽉 채워 돌아올 참이었다.

제냐는 루미에르가 그녀를 붙잡기 전 반쯤 뛰어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도착한 곳이 바로 여기 비프의 옆이었다.

헐레벌떡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등장한 제냐는 비프가 건네준 물을 단번에 들이켰다. 그러고도 쉽게 흥분이 진정되지 않아 연달아 물을 두 잔이나 더 들이켰다.

제냐는 비프가 밀어 준 의자에 주저앉아 허공을 멍하니 바라봤다.

“으으.”

생각하면 할수록 답이 없는 현실에 저도 모르게 머리를 부여잡고 앓는 소리를 냈다.

“제냐, 도대체 무슨 일이니?”

제냐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는 비프를 보며 한숨을 삼켰다.

그에게 제대로 이야기를 해 줄 수도 없는데, 또 누군가에게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야 하지?

제냐가 눈을 질끈 감았다.

피폐해져서 삶의 의욕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용사가 안타까웠다. 그래서 언제나 무르게 그를 대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의 모든 행동을 다 좋게 보려고 해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미친놈은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거죠?”

안 그래도 심각하던 비프의 얼굴이 더욱 험악해졌다.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있었다. 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루미에르가 그런 짓을 했는데도, 제냐는 그가 너무 심한 욕을 먹지 않았으면 했다.

“하아.”

“제냐.”

제냐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아니, 아니에요. 그냥 조금 신경이 곤두서서…….”

대충 말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비프가 그녀의 말을 잘라 냈다.

“똑같이 대해 주면 된다.”

“네?”

“똑같이 정신 나간 것처럼 굴어 주면 돼. 무슨 짓을 해도 크게 반응을 보여 줄 필요도 없고.”

“어…….”

비프가 눈을 좁히며 말했다.

“평소 네가 잘하던 거지.”

그 말대로였다. 제냐는 정신을 반쯤 놓고 다니는 마족들을 정말 많이 상대했었다.

“그런데 네가 갑자기 이런 걸 묻는다는 건, 예상치 못한 놈이 미친 짓을 한 거겠지?”

비프의 말투는 날카로웠지만 족집게 같은 말에 집중한 제냐는 그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죠?”

어정쩡한 동의에 피곤한 낯을 한 비프가 물었다.

“남자 친구야?”

“음.”

비프의 기세가 흉흉해졌다.

“얼마나 돌았는데? 널 때렸어?”

순식간에 바뀌는 그의 분위기와 꽉 쥐어지는 커다란 주먹을 확인한 제냐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그럼?”

이제 와서 아무 일도 없다고 해 봤자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제냐는 조언이 필요했다.

“비프, 과하게 집착하는 남자는 어떻게 고쳐야 할까요?”

제냐는 그녀가 아는 이 중 가장 객관적이면서도 현명한 비프가 이 문제를 해결할 답을 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너무 단호했다.

“뭘 고쳐?”

“네?”

“그건 천성이야. 못 고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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