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시간이 다 됐는데 미적거리며 책상을 정리하는 그녀를 마왕이 이상하게 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제냐는 꿋꿋하게 책상을 정리했다.
마왕이 깔끔하게 비워진 그녀의 책상을 쳐다보며 물었다.
“거기서 뭐 더 치울 게 남아 있나?”
“하려고만 하면 뭔들 못 하겠어요?”
“그래서 더 하겠다고?”
“…아니요.”
여기서 그렇다고 말하면 마왕의 책상에 놓인 서류를 받아 가게 될 테지. 제냐가 작은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마왕이 혀를 차며 말했다.
“내일은 나도 엘리고스도 없을 거다.”
“엘리고스 님도요?”
“그래.”
두 마족이 함께 자리를 비우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마왕과 엘리고스가 없는 마왕성이라니. 사용인들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미쳐서 날뛸 게 훤히 보였다.
“소란스러운 하루가 되겠네요.”
제냐가 질색을 하며 마왕에게 꾸벅 인사를 건넸다.
“그럼 모레 뵐게요.”
마왕이 어서 나가라는 듯 손짓을 했다. 제냐가 더 버티지 않고 몸을 돌렸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휴일. 평소라면 신이 나서 퇴근을 했을 텐데 오늘따라 집무실을 나서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아니, 오늘따라가 아니라 지난 일주일 내내 제냐는 출근이 반가웠고 퇴근이 꺼려졌다.
‘세상에,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이건 전부 일주일 전 그녀가 좋다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한 루미에르가 그 후, 지치지도 않고 애정 표현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간질간질한 말투와 행동, 그녀가 뭘 하든 몽글몽글한 웃음을 흘리며 그녀를 쳐다보는 시선까지.
정말 최선을 다해 알고 있는 바를 이야기해 주고 있는데 루미에르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시녀에게 얻을 수 있는 정보가 한정되어 있다는 걸 그도 좀 인정해 줬으면 좋겠는데. 도대체 뭘 어디까지 알려고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모르겠다.
‘설마 정보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도와 달라는 거 아니야?’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마계에서 루미에르가 도움을 청할 만한 사람은─아예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제냐뿐이었다.
하지만 몸으로? 이 몸으로 어떻게?
제냐는 하얗고 창백한, 말랑하기만 한 그녀의 몸을 내려다봤다.
그녀는 마족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인간들 사이에서도 평범하기 짝이 없는 체력과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성력뿐인데.’
루미에르를 위해서라면 기절할 정도로 성력을 쓰는 것도 아무렇지 않았다.
어쩌면 이제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지도 몰랐다. 당신이 뭘 원하는지 아니까, 다 터놓고 대화를 하자고.
‘우리 둘 다 쓸데없이 힘을 뺄 필요 없잖아.’
제법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이지 않았던가?
제냐는 문을 열자마자 마주한 화려한 인상의 사내를 올려다봤다.
“잘 다녀왔어요?”
그녀가 돌아오는 걸 알고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듯, 루미에르가 놀라지도 않고 제냐를 반겼다.
“다녀왔어요.”
“음식이 좀 빨리 와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이에요.”
그의 말대로 테이블에는 이미 저녁이 준비되어 있었고 방에는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가 가득했다.
차갑지 않고 따뜻한 온기가 가득 풍기는 방. 시간에 맞춰 맛있는 저녁 식사가 준비되어 있고, 다정하게 그녀를 맞이해 주는 사람이 있는 방이라니.
퇴근을 꺼린 것이 우습게 기분이 꽤 좋았다. 아니, 좀 감동을 받은 것도 같았다.
곱게 웃는 루미에르를 멍하니 쳐다보다 괜히 민망해진 제냐가 얼른 그를 스쳐 지나가며 얼굴을 숨겼다.
“그래요? 그럼 손만 씻고 와서 바로 먹어요.”
“네.”
손을 씻으면서 쳐다본 거울 속 그녀의 얼굴은 작게 상기되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아 기뻐하는 어린애 같은 그 얼굴이 어색했다.
‘왜 이래?’
짝, 차가워진 손으로 양 뺨을 두드린 제냐가 표정을 가다듬고 욕실을 나왔다. 그리고 서둘러 루미에르가 준비를 해 둔 자리에 앉았다.
“잘 먹을게요.”
“맛있게 먹어요.”
평범하기 짝이 없는데도 이상하게 귀가 간지러운 인사를 주고받고 수저를 들었다.
딱히 배가 고프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한 입 먹고 나니 생각보다 술술 들어갔다.
이번에 루미에르가 먹어 보고 싶다고 해 새롭게 도전해 본 식당이었는데 맛이 나쁘지 않았다.
“제냐, 내일 쉬는 날이죠?”
“네.”
“그럼 계속 같이 있어요?”
“그렇겠죠?”
그 말이 뭐가 그렇게 기쁜 건지 루미에르가 기분 좋게 웃었다.
루미에르의 빛나는 외모가, 그의 과한 호감의 표시가 조금 부담스럽긴 했다. 하지만 그늘 한 점 보이지 않는 밝은 미소를 보면 안심이 됐다.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루미에르는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날 테니까.
‘역시 말하는 게 좋겠다.’
루미에르는 예전처럼 그녀를 밀어내거나 거짓 웃음을 짓지 않았다. 그녀의 도움을 얻어 내려고 하는 행동 사이에는 그녀를 향한 진심 어린 호의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루미에르.”
“네.”
기다렸다는 듯 돌아온 부드러운 웃음을 바라보며 제냐가 제안했다.
“내일은 산책을 좀 할까요?”
“산책이요?”
“내일은 엘리고스가 성에 없거든요.”
바람을 쐬면서 분위기가 좀 풀리면 대화에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루미에르만 싫지 않다면, 같이 나가요.”
제냐는 사용인들이 잘 다니지 않는 장소도 많이 알고 있었다. 종종 시끄러운 사용인들을 피해서 휴식을 취하던 곳들도 있었고.
놀기 좋아하는 사용인들은 내일 엘리고스가 자리를 비웠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최선을 다해서 농땡이를 치려고 할 테니 더욱 문제는 없었다.
“제냐가 하자고 하는 건 다 좋아요.”
잘생긴 얼굴을 쳐다보며 제냐는 내일 그를 데리고 갈 만한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럼, 적당히 내가 좋아하는 곳으로 가요. 먹을 것도 좀 싸 가고.”
뭐든 좋다며 고개를 흔드는 루미에르를 보며 제냐가 살포시 웃었다. 그리고 다시 식사를 이어 나가려는데 루미에르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제냐.”
“네?”
“좋아해요.”
깜빡.
제냐가 최대한 매끄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이런 이야기를 매일 듣는 건 정신 건강에 좋지 않았다.
제냐는 그 말을 듣지 못한 양, 루미에르에게 접시를 밀어 주었다.
* * *
비프는 그의 옆에서 재잘재잘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용인의 말을 흘려듣는 척 열심히 듣고 있었다. 사용인이 떠드는 대상이 제냐와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라지에 님이 인정할 만큼 강한 마족이래요!”
그건 비프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지하에서 사고가 있던 날. 레라지에가 몇 번이나 제냐의 연인을 칭찬했다는 이야기는 마왕성 전체에 쫙 퍼져 있었으니까.
혹 제냐의 연인의 얼굴을 실제로 본 이가 있냐며 레라지에가 눈에 불을 켜고 마왕성 내부를 돌아다니기도 했었고.
‘실제로 그 얼굴을 본 이는 없는 것 같았지만.’
힘이 축 빠져 성을 나서던 레라지에의 뒷모습을 본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사실 저도 그날 직접 봤거든요. 얼굴은 가리고 있긴 했는데.”
비프가 사용인을 힐끗 바라봤다.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는 사용인을 본 적은 있어도 그 연인을 직접 봤다는 사용인은 처음이었다.
비프가 관심을 갖는 걸 눈치챈 사용인이 신이 나서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았다.
“어찌나 빠르고 분위기가 흉흉하던지. 허락받지 않은 마족이 지하로 내려가는데 아무도 막지 못했다니까요?”
그 말에 비프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잘하는 짓이다. 침입자면 어떡하려고?”
“감히 누가 마왕성에 침입을 해요? 우리 폐하께서 계시는데.”
“얼씨구.”
“그리고 정말 건드렸다가는 큰일 날 것 같았다니까요?”
“그 정도였다고?”
레라지에가 호들갑을 떨었다고는 하나 그 후작은 특정 부분에 있어서는 좀 가벼운 이였다.
강하다고 말하고 다니긴 했지만 그래도 얼굴에 더 환장하는 것 같기에 평소의 그 버릇이 다시 도졌다고 가볍게 넘겼는데.
‘얼굴 때문에 과하게 평가받은 게 아니라 실제로 정말 강하다고?’
비프가 의심 가득한 얼굴로 되묻자 사용인이 가슴을 퍽퍽 내리쳤다.
“네! 그렇다니까요? 저희가 그런 쪽으로는 얼마나 예민한 줄 알면서. 참, 레라지에 님이 중얼거리는 이야기를 들은 사용인들 말로는, 아직 어린 마족이래요.”
약해 빠진 놈보다야 강한 놈이 더 낫긴 했지만……. 비프가 흥, 코웃음을 쳤다.
“너무 어린 녀석들은 별론데.”
“에이,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나니까 좋은 거죠.”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런가?”
비프가 고심하는 얼굴을 하자 사용인이 눈을 반짝이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역시 총주방장님도 궁금하시죠?”
비프가 불쑥 다가오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세게 밀어냈다.
“시끄러워.”
사용인이 밀려나지 않으려 목에 힘을 주며 계속해서 비프를 유혹했다.
“제냐에게 직접 물어보는 건 어때요? 총주방장님이 물어보면 답해 줄 텐데.”
하지만 비프는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이미 기다려 주겠다고 말을 하지 않았나?
그리고 설령 궁금하다고 해도 이렇게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건 더욱 아니었다.
아직도 이렇게 제냐의 연인에 관심을 주는 사용인들이 넘쳤으니까.
비프가 코웃음을 쳤다.
“누구 좋으라고?”
“너무해.”
비프는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축 늘어지는 사용인을 발로 툭 찼다.
“할 일 없으면 나가서 일이나 해. 주방 담당도 아닌 게 왜 여기서 떠들고 있어?”
그러자 사용인이 개구쟁이 같은 얼굴을 했다.
“오늘 같은 날 놀지 언제 놀아요?”
“언제는 일은 했고?”
비프의 빈정거림에도 사용인은 넉살 좋게 웃을 뿐이었다.
“에이, 봐주세요. 집사님도 안 계시는데.”
참 뻔뻔하다 싶었지만 이놈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비프는 엘리고스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여기저기 깨지는 소리가 나는 마왕성을 느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주 마왕성이 난리가 나겠구나.”
“이미 난리가 났죠.”
그 말대로였다. 정말 오랜만에 마왕과 엘리고스가 전부 자리를 비운 오늘, 마왕성은 전쟁터를 방불케 할 만큼 소란스러웠다.
비프가 질린 얼굴로 쾅쾅 터져 나가는 소리를 외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