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잘하는 게 있지 않은 어린아이가 일을 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제일 먼저 일하게 된 게 주방이었는데, 그때 비프를 처음 만난 거죠.”
“잘 챙겨 줬나 보네요.”
“자식 있는 입장에서 어린 제가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에요. 바쁜데도 시간을 내서 이것저것 많이 도와줬죠.”
사용인으로서의 행동거지, 마왕성 내에 조심해야 할 것들, 마계가 돌아가는 사정 등등.
제냐가 쉬는 날만 되면 비프는 그녀를 불러다가 여러 가지를 가르쳤다. 그녀가 주방을 떠나고 나서도.
“엘리고스는 사용인들을 다 파악하고 있었을 테니까, 저를 잘 챙겨 줄 것 같은 비프의 옆으로 보낸 거겠죠.”
자기가 직접 돌보기에는 엘리고스는 매우 바빴고, 제냐가 그 정도로 가치가 있지도 않았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엘리고스가 오로지 선의를 가지고 제냐를 사용인으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가진 능력이 볼품없어 마왕이 제게 관심이 없다고 해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겠지.
그러다가 운 좋게 성력 외에도 제냐의 쓸모를 찾은 거였고.
때마침 루미에르가 그와 관련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언제부터 마왕과 일하기 시작한 건데요?”
“주방에서 일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에요. 보름이 조금 지나서였나?”
그녀를 콕 찍어 마왕에게 간식거리를 가져다주라고 명령한 엘리고스 탓에 마왕의 집무실로 갔다.
“그리고 코가 꿰었죠.”
엘리고스 딴에는 마왕에게 제냐라는 존재가 있다는 걸 잊지 말라는 별거 아닌 의도였겠지만, 제냐가 마왕의 서류에서 오류를 잡아낸 순간 그녀의 존재 가치는 다른 쪽으로 변모했다.
쓸모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반창고에서, 마왕성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무 보조로.
“마족들이 더럽게 머리가 나쁘거든요.”
정확히 말하면 머리가 나쁘다기보다는 머리를 쓰는 걸 싫어하는 거였지만.
뭐가 됐든 그 때문에 그녀가 일에 파묻혀 살게 됐으니 그게 그거였다.
“고작 열 살짜리 어린애의 손을 빌려야 할 정도로 마왕이 해야 할 서류 업무가 넘쳐 나더라고요.”
“한심하군요.”
“뭐, 그 덕에 제가 엘리고스 다음으로 제일 좋은 방에서 머물고 있잖아요?”
이 방은 제냐가 마왕성에서 가진 가치를 가장 눈에 띄게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렇습니까?”
루미에르가 새삼스럽다는 듯 그녀의 방을 둘러봤다.
욕실이 딸려 있고, 드레스 룸도 따로 있었으며, 테라스까지 붙어 있는 방.
사용인이 쓰기에는 좀 과분한 방이었으나 그렇다고 엄청난 고마움을 느끼는 것도 아니었다.
건조하게 방을 살피던 제냐가 부러 장난스럽게 물었다.
“뭐예요. 못 느꼈어요? 루미에르는 이것보다 좋은 방에서 지냈었나 봐요?”
그러자 루미에르가 놀란 듯 고개를 돌려 제냐를 쳐다봤다.
“아니, 아니에요. 신전에서 머물던 제 방과 비슷합니다.”
“오, 그래요?”
흐음. 사용인에게는 과한 방이긴 한데, 그래도 용사가 머무는 방치고는 좀 부족한 편 아닌가?
“네, 테라스가 있지는 않지만요.”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조금 부족하다. 속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겉으로나마 청렴함을 강조하는 신전의 분위기 때문일까?
제냐가 빗을 내려놓고는 루미에르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늘 내 이야기를 주로 하니까.’
흐름이 잡힌 김에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루미에르는 어때요?”
“네?”
“많이 바쁘죠?”
처음 이름을 들은 날 밤. 밤늦게까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스물두 살요?”
그녀는 재작년에 처음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니 성인이 되자마자 용사로 활동한 건가 싶었다.
하지만 루미에르는 자신이 실제로 용사라고 불리기 시작한 건, 열여덟 살에서 열아홉 살로 넘어가던 시점이라고 했다.
루미에르와 함께 지내면서 여러 모습을 봐 놓고도 아직도 용사에 대한 동경을 잃지 않은 제냐는 그녀가 모르는 과거의 용사가 알고 싶었다.
그녀가 얼마나 용사에게 호감이 많은지 이번 대화를 통해 알려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았고.
“…많이 바쁜 편이었죠.”
“저처럼 짜증 나게 하는 윗사람들도 있었죠?”
적당히 공감대를 살 만한, 그러면서도 더 친근한 대화를 할 수 있게 판을 깔았다. 자고로 윗사람을 욕하는 것만큼 재밌는 대화도 없지 않은가?
“다들 힘들 때니까요.”
하지만 돌아온 답은 꽤 정석적이었다. 인간이라고 해 봐야 둘뿐이고 제냐가 어디 가서 용사가 다른 사람을 욕하더라 말을 하지도 않을 텐데.
역시 용사는 용사인 걸까? 다시 한번 용사에 대한 편견이 마구 고개를 들었다.
“그렇긴 하죠. 그래도 성녀님께서 중간에 잘 관리를 해 주실 것 같기는 해요.”
저번에 얼핏 들어 보니 루미에르는 성녀의 손에서 큰 것 같았으니까, 설령 왕족이나 황족, 귀족들이 귀찮게 굴어도 그녀가 적당히 사람들을 쳐 냈을 것 같았다.
“네, 보통은 어머니께서 임무를 정해 주시는 편입니다.”
어머니. 성녀를 어머니라고 부르는구나.
신기함에 제냐가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물었다.
“성녀님은 어떤 분이세요?”
딱히 성녀를 개인적으로 아는 것은 아니었다. 보통 그녀는 성녀보다는 용사에 더 관심이 많은 편이었고.
하지만 그래도 부모님이 존경하던 사람이니,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사실 저희 부모님이 성녀님을 존…….”
조금 높아진 목소리로 말을 잇던 제냐가 루미에르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생각에 잠긴 얼굴에 그림자가 짙었다.
‘너무 흥분했네.’
루미에르는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아마 그 이유는 용사로서의 활동 때문일 테고.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앞서서 멍청한 짓을 했다.
제냐가 갑작스레 입을 다물자 루미에르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난처한 웃음을 흘렸다.
“미안해요. 그러니까 어머니는…….”
“아니요.”
제냐는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어 냈다. 그리고 화제를 돌리기보다 정면 돌파를 했다.
“내가 알아 두면 좋을 만한 게 있나요? 그러니까 조금 전에 한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니라, 또 이렇게 본의 아니게 그를 건드리는 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제냐가 테이블 위에 놓인 루미에르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스킨십을 좋아하는 것 같으니 마음을 여는 데 이런 온기가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이라던가, 아니면 좋아하는 말 같은 거요.”
강요는 아니라고, 덧붙이자 방 안에 고요한 침묵이 맴돌았다. 제냐는 루미에르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렇게 제냐는 루미에르를 기다렸고, 잠시 뒤 그가 뚜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름으로 불리는 게 좋습니다. …용사님이라는 호칭은 싫어요.”
루미에르가 손바닥을 돌려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이렇게 손을 잡아 주는 게 좋아요.”
제냐는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시끄러운 것보다는 침묵이 좋고,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는 책을 읽는 게 좋습니다.”
조곤조곤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막힘이 없었다.
“이른 새벽녘의 태양보다는 저녁노을이 더 마음에 들고, 겨울은 추워서 싫어요. 그렇다고 여름이 좋은 것도 아니지만요.”
그 외에도 자잘한 선호들이 차분하게 흘러나왔다. 함께 먹었던 스튜가 맛있었다는 것, 욕조에 있던 보디 워시의 향이 마음에 들었다는 것, 저번에 가져다줬던 옷은 자기 스타일이 아니었다는 것까지.
그건 용사가 아닌 루미에르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전 침대에 누워 있는 것도 좋아해요.”
그 말에 제냐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간 함께 지내면서 도대체 침대에 꿀이라도 발라 둔 거냐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제냐의 웃음에 루미에르가 그녀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보라색 눈도 좋습니다. 조금 낮은 목소리도 좋고.”
이번에는 제냐에 관한 이야기를 해 줄 셈인 듯했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루미에르가 연달아 말을 이었다.
“머리를 말려 주는 것도. 중지의 굳은살도. 저녁에 함께 잠자리에 드는 것도 좋아요.”
뭔가 장난스러운 느낌이 점점 사라지지 않나? 제냐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검은 머리카락도 좋고, 이렇게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도, 저를 궁금해해 주는 것도 좋습니다.”
‘그냥 내가 좋다고 하지 그러니?’
마지막 말과 함께 꽃이 만개하듯 웃는 루미에르에 제냐가 어색하게 대꾸했다.
“…참고할게요.”
최대한 담담한 척 답하는데 기어이 루미에르가 그 말을 내뱉었다.
“제냐가 좋아요.”
끔뻑.
와아. 애써 올리고 있던 입꼬리가 덜덜 떨렸다.
요 며칠 가까워진 김에 장난을 치는 건가? 하지만 장난이라기에는 루미에르의 얼굴이 너무 진지했다.
그럼 요즘 몇 번이나 생각했던 미인곈가? 아직 그녀가 주는 정보들이 만족스럽지 못해서, 그래서 이렇게 얼굴로 홀리려고?
‘이렇게 안 해도 정보 준다니까?!’
루미에르에게 하지 못할 말을 삼키며 제냐가 간신히 하하, 웃음을 흘렸다.
“…그, 고마워요.”
“뭘요, 제가 더 고맙죠.”
그리 답한 루미에르가 보란 듯 제냐를 붙잡은 손에 힘을 줘 단단하게 깍지를 껴 왔다. 제냐는 의식적으로 그 손을 못 본 척했다.
그리고 아주 대놓고 화제를 돌렸다.
“오늘은 뭐 먹고 싶은 것 없어요?”
점심을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볼품없는 회피였다. 그리고 루미에르는 이 요상한 대화를 지속하고 싶은 것 같았고.
“제냐가 좋은 거면 저도 좋아요.”
“아니, 아까 말한 것처럼 스튜 외에 마음에 들었던 음식이 있을 것 아니에요?”
루미에르가 생긋 눈웃음을 쳤다.
“스튜가 제일 좋아요. 제냐가 제일 잘 먹던걸요.”
“아니, 내가 아니라 루미에르가…….”
“다 좋아요.”
‘그놈의 좋다는 말 좀 안 할 순 없어?’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미인계가 맞았다.
제냐는 앞으로 더욱 열심히 용사에게 마왕성에 관한 소식을 물어다 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