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최선은 용사를 황실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딸이 끝까지 용사를 사로잡지 못한다면…….
‘가질 수 없다면 죽여야지.’
황제가 무심한 듯 차가운 성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씩 입꼬리를 올렸다.
“일단은 황실에서도 협조하지.”
“원하신다면요.”
물론 행동으로 옮기기 전, 미리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성녀. 그래도 10년 동안 용사의 어미로 살지 않았나.”
저 여자에게 용사가 어느 정도의 의미가 있는지, 만약 용사를 죽여야 한다면 그 뒤에 있을 후폭풍은 어느 정도인지 알아 둬야 했다.
“아무렇지도 않나?”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달 넘게 소식이 없었다.
용사가, 네 아들이 죽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정말 아무렇지 않은가?
그 물음에 잠시 황제를 쳐다보던 성녀가 눈을 깜빡이며 대꾸했다.
“아무렇지도 않으면 찾지 않았겠죠.”
원하던 답이 아니었다. 황제가 눈을 찌푸렸다.
“그런 의미로 묻는 게 아니라는 걸 알 텐데 말이야.”
“어떤 답을 원하십니까?”
원하는 답이 있다면 이야기해 보라는 눈빛에 황제는 입을 다물었다.
차갑고 건조한, 아무런 감정이 없는 눈.
그 눈 속에 무언가 다른 의미가 없는지 한참을 들여다보던 황제가 생긋 웃었다.
“아니, 답은 얻었네. 이만 가 보지.”
갑자기 대화를 마무리하는 황제를 보면서도 성녀는 고개만 까딱였다.
“살펴 가세요.”
“그래, 그래.”
황제는 손도 대지 않은 찻잔을 뒤로하고 그대로 응접실을 나섰다. 그리고 그를 배웅하는 신관들을 뒤로하고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혀를 찼다.
“인간들의 어머니라니, 웃기지도 않는군.”
신의 뜻을 받아 인간들을 구원할 용사를 키워 낸 여자.
예언을 통해 용사의 존재를 세상에 공개한 성녀가 실제로 용사를 찾아낸 뒤, 얻게 된 칭호였다.
다정하고 친절하며, 누구에게나 손을 뻗어 주는 우리들의 성녀님.
그녀를 향한 칭송들을 떠올린 황제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그 누구보다도 어머니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인간인데.”
비소를 머금고 사람들의 행태를 비웃는 황제에 얌전히 그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보좌관이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황제는 빠르게 멀어지는 신전의 모습을 눈으로 담으며 명령했다.
“신전의 움직임을 잘 살펴봐. 또 이쪽에 숨기는 게 없는지 확인하고.”
이번에는 다행히 신전이 숨긴 바를 빠르게 알아차렸지만 다음에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신전에 자신의 사람을 더 심어야 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해.”
두 가지 상황을 모두 대비하기 위해서는 용사를 먼저 찾아야 했다.
“실종 상태일 때가 죽이기가 더 편할 테니까.”
신전, 황실.
먼저 용사를 찾는 쪽이 다시 주도권을 가지게 될 것이다.
* * *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쉬는 날.
시간에 쫓기지 않고 느긋하게 하루를 시작한 제냐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뒤를 돌아봤다.
루미에르가 해사하게 웃으며 제냐에게 읽고 있던 책을 보여 줬다. 책을 내려다본 제냐가 의아함을 드러냈다.
“이게 왜요?”
“여기 봐요.”
제냐는 루미에르의 검지가 가리키는 글자를 살폈다.
“여기 제냐의 이름이 나와요.”
“…그렇네요.”
제냐는 신기한 마음 반,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는 마음 반으로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루미에르를 쳐다봤다. 그는 정말 엄청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찬물을 끼얹을 수가 없었다.
제냐가 기대하듯 그녀를 쳐다보는 루미에르에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자 루미에르가 더욱 활짝 웃으며 책을 덮고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불쑥, 옆으로 다가온 사내에 제냐가 뒤로 몸을 뺄 뻔한 걸 참으며 물었다.
“왜요?”
“그냥 옆에 있고 싶어서요.”
“어, 그래요.”
“요즘 일은 어때요?”
“평소랑 똑같았죠. 그냥 서류 정리하고, 차 시중을 좀 들고?”
반짝반짝 쳐다보는 시선에 제냐가 뭐라도 더 말해야 하나 싶어 말을 이었다.
“머리카락도 묶어 주고요.”
“…머리를 묶어 줘요?”
순간 단정한 눈매가 찌푸려진 것 같았다. 하지만 루미에르의 눈은 여전히 곱게 펴져 있었다.
착각인가, 제냐가 그 순한 눈매를 살피며 답했다.
“머리를 혼자 묶지 못하셔요.”
“참, 멍청하네요.”
아, 이번에는 착각이 아니었다.
제냐가 그의 비틀린 입가를 바라보는데 루미에르가 제 짧은 머리카락을 살피는 것처럼 몇 가닥 붙잡아 올렸다.
“저도 머리를 길러 볼까요?”
손가락에 붙잡힌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루미에르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다시 한번 머리를 헤집었다.
저 얼굴에 뭐가 안 어울릴까 싶지만, 갑자기 왜?
“…왜요?”
“그냥, 나도 머리를 묶어 보고 싶어서?”
머리를 묶어 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머리가 길어지면 결국 그 처리는 다 제냐의 몫이 되는 걸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루미에르가 그렇게 오래 마왕성에 머물 리가 없었고, 그래서는 안 됐다.
“기르고 싶다면 말리진 않을게요.”
자기 머리를 자기가 알아서 한다는데 말릴 이유는 없었다.
“제냐는 짧은 머리랑 긴 머리 중에 뭘 더 좋아하는데요?”
질문을 던지며 루미에르가 자연스레 그녀의 손목을 감싸 왔다.
입을 트고 정체를 밝힌 이후 루미에르의 행동에 생긴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스킨십이었다.
며칠 전 함께 스튜를 먹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스킨십은 처음에는 좀 어색했는데, 비슷한 행동이 계속되니 이제는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는 중이었다.
‘습관인가 보지. 아, …설마 미인계인가?’
여전히 루미에르는 은근슬쩍 제냐에게 정보를 캐내려고 했다.
물론 그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인지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도 묻곤 했지만.
제냐는 그녀의 손목뼈를 부드럽게 문지르는 루미에르의 엄지를 내려다보며 답했다.
“굳이 따지자면 짧은 머리요?”
“음, 그럼. 그냥 둘래요.”
아쉬울 것 없다는 듯 물러나는 걸 보니 역시 머리 길이 따위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 틀림없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루미에르가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화장대에 놓인 빗을 집어 왔다.
그러고는 당연하다는 듯 그녀에게 빗을 내미는 것이다.
“…왜요?”
일단 주니까 빗을 받긴 했는데, 쓰임새를 알 수가 없었다. 설마 이건, 지금 네 꼴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꼴불견이니, 좀 정리하라는 고도의 비꼼인 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쩍 루미에르의 얼굴을 살폈지만 밝게 웃고 있는 얼굴에서 부정적인 기색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럼 뭘까.
제냐가 머리를 굴리는데 루미에르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저도 빗겨 주세요.”
“뭐를요?”
무슨 말인지 알면서도 너무 황당해서 되물었다. 하지만 루미에르는 뻔뻔했다.
“머리카락요.”
제냐가 루미에르의 금을 녹인 것 같은 화려한 금발을 바라봤다. 처음 왔을 때보다 길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루미에르의 머리는 짧은 편이었다.
그런데 이 머리카락을 빗어 달라고?
아니, 빗을 수야 있었다. 그런데 빗어 달라니? 왜? 설마 이건 조금 전 대화의 연장선인가?
제냐가 빗과 루미에르를 번갈아 바라보며 제안했다.
“스스로 하는 건 어때요?”
“제냐가 해 줬으면 좋겠어요.”
루미에르는 고민하는 기색도 없었다. 분명 아까만 해도 머리를 혼자 묶지 못하는 건 멍청하다고 하지 않았나?
장난하냐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얌전히 그녀를 응시하는 푸른 눈을 보니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쉰 제냐가 결국 의자를 루미에르에게 넘겨주고 그의 뒤로 향했다. 그리고 엉킨 곳 하나 없는 탐스러운 고수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머리를 맡긴 루미에르가 다시 대화를 이어 갔다.
“제냐는 보통 이렇게 쉬는 날 뭘 해요?”
“책을 보거나, 비프에게 놀러 가요.”
“그 총주방장이랑 많이 친하네요?”
용사인 루미에르에게 마족과의 친분을 긍정하면 좋은 영향을 끼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제냐는 비프와의 관계를 부정하지 않았다.
“뭐, 그렇죠.”
“10년이나 마왕성에 있었다고 했잖아요. 그럼 언제부터 친했어요?”
“음. 마왕성에 도착하고 한 달 하고 일주일 뒤부터요.”
“굉장히 구체적이네요?”
“저를 납치한 뒤, 정확히 한 달 뒤에 마왕이 저를 찾아왔거든요. 제 능력이 생각보다 쓸모없다는 걸 알고 저한테 관심을 끊었고요.”
그녀를 내려다보던 붉은 눈에 담긴 귀찮음과 약간의 호기심.
“어정쩡하군. 그래도… 죽이긴 아깝지.”
그리고 변덕.
“그러니까 사용인들도 저한테 관심을 끊더라고요. 그 뒤에 배가 고파서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당신을 굶겼어요?”
놀라서 돌아보는 루미에르의 머리를, 아직 빗질을 덜 했다는 핑계로 다시 앞으로 돌려 버렸다.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만, 여기 사용인들은 농땡이를 많이 피워요.”
딱히 표정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된 사람을 열심히 돌봐 줄 이는 없다고 봐야죠.”
예나 지금이나 마족들은 똑같았다.
“뭐, 아무튼 사용인들을 도와서 잡일을 하다가 며칠 만에 엘리고스에게 그 상황을 들켰어요.”
바닥에 쭈그려 앉아 더러운 걸레를 꽉 움켜쥐고 있던 제냐의 앞에 멈춰 서던 고급스러운 구두.
“네가 왜 이 일을 하고 있지?”
방에 아무것도 없다던 제냐의 말에 튀어나오던 한숨.
“엘리고스도 사용인들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죠.”
그러니 그녀를 잘 돌보라고 명령을 내려도 또 이런 일이 반복되리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그냥 나를 사용인으로 들이기로 한 거죠. 솔직히 고작해야 열 살 꼬맹이니까, 사용인으로 들여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거 없었거든요.”
마족들의 반의반도 힘을 내지 못하는 꼬맹이에게 뭘 시키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