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붙잡힐세라 서둘러 퇴근하는 게 뻔히 보이는 제냐가 사라지자마자 곧장 문이 열리고 엘리고스가 마르바스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마르바스의 앞으로 다가온 엘리고스가 밑도 끝도 없이 말했다.
“예정대로 진행하겠습니다.”
마르바스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삐딱하게 되물었다.
“통보야?”
“네. 통봅니다.”
망설임 없이 긍정한 엘리고스가 뭐가 문제냐며 물었다.
“반대하실 생각 없지 않습니까?”
그래, 반대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마르바스는 엘리고스의 개인적인 생각이 궁금했다.
저 딱딱한 얼굴을 보아하니 답을 해 줄 것 같지 않아 굳이 질문을 던지진 않았지만.
마르바스가 입을 다물자 엘리고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뒤로 물러났다.
“그럼, 이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수당은 넉넉하게 지급하죠.”
엘리고스는 마르바스의 답을 듣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러니 폐하께서도 맡으신 일들은 최대한 빨리 처리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래.”
“식사는 곧 들어올 겁니다. 그럼.”
그렇게 거침없이 집무실을 나갈 것 같던 엘리고스가 제냐의 책상 앞을 지나가면서 손가락을 튕겼다.
마르바스가 그 마력의 흔적을 따라 눈을 돌리다가 문이 닫히는 소리에 의자에서 등을 떼어 냈다.
다시 혼자가 된 마르바스의 시선이 깔끔하게 정리된 제냐의 책상에 닿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말라붙어 있던 잉크 자국이 깔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퇴근하기 전까지 거슬린다는 듯 몇 번이나 엄지로 얼룩을 문지르던 제냐가 떠올랐다.
눈이 마주치면 도움을 요구할 게 뻔해서, 힐끗 그를 쳐다보던 시선을 무시했다.
“내일은 청소 도구를 가져와야 하나.”
일부러 들리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방을 나선 제냐였다. 마르바스가 도와주면 좋겠다는 의미가 듬뿍 담겨 있긴 했다.
제냐가 방을 나서자마자 엘리고스가 등장했으니, 그 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이었다.
“속을 알 수가 없단 말이야.”
마르바스는 식사가 도착할 때까지 그렇게 한참을 엘리고스가 떠난 자리와 제냐의 책상을 번갈아 바라봤다.
* * *
“감사, 감사합니다!”
자리를 떠나는 여인의 뒤로 무릎을 꿇고 바닥에 이마를 박은 채 끊임없이 감사를 표하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여인은 그녀를 호위하는 사람들 틈에서 곤란한 낯을 하고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그렇게 그 모습이 시야에 잡히지 않을 때까지 뒤를 돌아보던 여인은 그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 자리에 멈춰 섰다.
“어떻게 됐지?”
여인의 물음에 그녀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호위들이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여인의 보좌를 담당하던 신관이 면목이 없다는 얼굴로 답했다.
“그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
여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신관이 입술을 깨물다 보고를 이어 나갔다.
“처음 실종된 지역을 중심으로 주변을 샅샅이 뒤지고 있지만 성과가 없습니다.”
아득, 이를 악무는 소리에 신관이 흠칫 몸을 떨었다. 긴 침묵 후, 감정을 정리한 여인이 차분해진 목소리로 명령했다.
“어떻게 해서든, 무조건 찾아내.”
“네.”
하지만 역시, 그럼에도 깔끔하게 감정을 정리하지 못한 여인에게서는 냉기가 뚝뚝 떨어졌다.
“그 쓸모없는 것들은 다시 불러들여. 단서가 될 만한 게 있는지 다시 확인하고.”
“네.”
여인이 신관을 똑바로 바라보며 경고하듯 이야기했다.
“내 아들을, 용사를 잃어선 안 돼.”
용사를 아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여자. 동시에 사람들에게 무한한 감사 인사를 받는 여자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무슨 말인지 아나?”
신관이 안광이 번쩍이는 눈을 피하듯 고개를 더 깊숙이 숙였다.
여자의 진실한 모습을 모르는 자라면 이 말을 아들을 걱정하는 어미의 말로 이해했을 테다.
숨을 고른 신관이 서둘러 대꾸했다.
“정보는 통제 중에 있습니다. 지금은 남쪽 지방에 토벌을 나갔다고 알려져 있고요.”
용사가 사라졌어도 용사는 계속해서 존재해야 했으며 신전의 손아귀에 있어야 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용사의 부재를 아는 건 신전밖에 없었다.
딱 한 곳을 제외하곤.
“다만, 황실에서…….”
신관이 곧 떨어질 불호령을 예상하며 조심스레 말을 더하는데, 가까운 거리에서 여인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녀!”
그 목소리에 신관의 얼굴에 금이 갔다.
“아.”
싸늘한 여인의 얼굴을 확인한 신관이 하얗게 질렸다. 신관이 미처 표정을 정돈하기 전, 여인이 뒤를 돌아봤다.
“폐하께서 어쩐 일로 이곳까지 행차하셨습니까?”
회색빛 섞인 금발과 옅은 초록빛 눈을 가진 황제가 여인의 물음에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어쩐 일은, 신전에 기도를 하러 왔지.”
성의 없는 변명이었지만 반박할 거리는 없었다. 마족들이 인간계에서 활개를 친 이후, 신분에 상관없이 수많은 이들이 신전을 찾아왔으니.
여인이 냉소를 숨기며 잔잔하게 웃었다.
“바쁘실 텐데요.”
황제가 넉살 좋게 웃으며 여인의 옆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바빠도 신전에는 와야지. 그대, 이 뒤로 잠시 일정이 없는 듯한데 차라도 한잔하겠나?”
“차요?”
“그래. 우리, 해야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데.”
그 은근한 어조에 황제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아차리지 못한 이는 없었다. 여인의 호위, 성기사들이 지금이라도 황제를 막아야 하나 눈치를 봤다.
하지만 성녀는 눈짓으로 그들을 물렸다. 그리고 길을 안내하듯 발을 내디뎠다.
“가시죠.”
“고맙네.”
서늘한 금안이 스치듯 신관을 훑었다. 황제의 방문을 미리 고하지 못한 것에 대한 질책이 가득 담겨 있었다.
사전에 알았더라면 핑계를 대서라도 자리를 피했을 텐데.
여인의 눈에 서린 노기를 눈치챈 신관이 마른침을 삼키며 자책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신관은 점점 더 멀어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서둘러 몸을 돌렸다.
정말 제대로 화를 사서 신전에서 내쳐지기 전에 명령을 수행해야 했다.
‘단서를 찾아야 해.’
어떻게 해서든 용사를 찾아내, 성녀의 앞에 데려다 놔야 했다.
그게 설령 시체일지라도.
신관은 곧장 방으로 돌아가 신녀에게 ‘쓸데없는 것’이라 명칭 된 용사의 동료들에게 서신을 보냈다.
* * *
신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응접실로 안내를 받은 황제는 꼭 자기가 주인인 양 자연스레 상석에 자리를 잡았다.
성녀는 그런 황제의 모습에 별다른 반응 없이 차를 우려 그의 잔에 따랐다.
고요함이 감도는 방 안에는 간혹 들리는 새소리와 차를 따르는 물소리만이 들려왔다.
그러나 그런 여유는 성녀가 티포트를 내려놓는 순간 사라졌다.
“어째서 내게도 숨긴 거지?”
황제는 아무런 미사여구 없이 곧장 본론을 꺼냈다. 성녀가 말끔한 얼굴로 되물었다.
“무엇을요?”
모든 걸 다 알고 왔음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구는 모습에 어이가 없을 법도 했다. 하지만 황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발뺌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 텐데.”
황제가 그냥 넘어가 줄 생각이 없음을 밝혔음에도 성녀는 태평스러웠다.
“글쎄요, 지금도 앞으로도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얼핏 들으면 처음과 마찬가지로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묘한 억양의 차이가 있었다.
일이 어떻게 되든 결과적으로 지금의 균형이 깨지는 일은 없을 거라는 성녀의 말에 황제가 눈을 가늘게 떴다.
“흐음.”
한참 성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침묵하던 황제가 이내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참, 그대답군.”
그러고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묻는 것이다.
“찾아낼 건가, 아니면 또 만들 건가?”
성녀는 아무 말 없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 우아한 모습을 눈에 담던 황제가 알아서 답을 내렸다.
“하긴 지금 당장 선택할 수는 없겠지. 어느 쪽이든 한동안 시간이 걸릴 테고.”
“그렇죠.”
“시간이 덜 걸리는 쪽은 찾아내는 것이고?”
황제가 그렇지 않냐는 듯 동의를 구했다. 그에 성녀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그림 같은 미소를 지었다.
“폐하께도 그쪽이 더 이득이겠죠.”
자신은 이 일과 연관이 없다는 듯 한발 물러선 태도로 성녀를 추궁하던 황제가 그녀의 지적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글쎄. 딱히 원하는 대로 흘러가진 않아서.”
성녀의 말대로 황제에게도 실종된 용사를 찾는 게 더 이득이긴 했다. 그러니까 용사가 그가 원하는 대로만 움직여 줬다면.
‘남자 하나 제대로 사로잡지 못하니, 원.’
용사를 억지로 옆에 붙여 두면 뭐 하는가? 하나 있는 딸이 그 용사에게서 아무런 반응도 얻어 내지 못했는데.
평민이라서 거슬리는 점이 있다고 해도, 용사와 결혼을 하게 되면 얻게 될 이익이 얼마인지 충분히 설명했다. 약혼을 한 것만으로 얻은 효과가 얼마나 큰지도 알려 줬건만.
황제가 못마땅함에 얼굴을 찌푸리는데 성녀가 차분하게 답했다.
“그건 알아서 하실 일이고요.”
성의 없는 대답에 울컥 화가 치솟았다.
성녀의 입장에서는 황제의 딸과 용사가 결혼하는 게 달갑지는 않을 것이다. 황제가 성녀를 잘 알 듯 성녀 역시 황제를 잘 알았다.
황제와 성녀는 욕심이 너무 많았다.
지금 당장은 협력하고 있지만 상대가 언제라도 등을 돌릴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녀는 두 사람의 결합을 제대로 지지하지도, 반대하지도 않았다. 황실을 탐내면서도 황제를 견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황제 역시 그랬었다.
‘그랬었다’라는 건 이제는 다르다는 뜻이었다.
최근 1년 새, 신전의 힘이 너무 커졌다. 이대로 뒀다가는 몇 년 내로 금방 황실을 덮을 정도로 세력이 커질 게 눈에 훤했다.
돌파구를 찾을 수 없던 상황에서 용사가 실종된 건, 황제에게는 천운이었다.
‘하늘이 나를 돕는 거지.’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황제는 그에게 다가온 기회를 놓치지 않을 셈이었다.
그의 누이 가족이 죽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