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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25)화 (2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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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에르는 뭘 하고 있을까.’

일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그가 생각났다. 덕분에 손이 쉬는 시간이 많아지고 자연스레 타박이 들려왔다.

“시위하는 건가?”

제냐는 고쳐 잡았던 펜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마왕이 그녀와 눈을 맞춰 왔다.

“죽을 뻔했다고 시위하냐고.”

출근한 그녀를 보고도 아무 말이 없더니 죽을 뻔했던 건 알았나 보다. 비아냥을 숨긴 제냐가 방긋 미소를 지었다.

“제가 언제요?”

“네가 오늘 처리한 서류 좀 보지.”

장난하냐는 시선이 박힌 곳은 제냐의 책상 위였다.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제냐는 진심으로 경악했다.

“이, 잉크병이 언제……?”

제냐가 황급히 손을 뻗어 언제 쓰러진 지도 기억나지 않는 잉크병을 세웠다. 하지만 이미 잉크는 전부 흘러나와, 그녀가 마무리한 서류 위를 점령하고 있었다.

황망한 눈을 하고 엉망이 된 서류를 내려다보던 제냐가 삐걱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마왕을 바라보며 순하게 눈을 깜빡였다.

어이없다는 듯 그녀의 꼴을 지켜보던 마왕이 입을 열었다.

“고의가 아니었나?”

고의라니, 화풀이를 하려면 마왕에게 직접 하지 뭣 하러 오전 내내 붙잡고 있던 서류에 한단 말인가?

“전날의 충격이 너무 커서, 집중이 잘 안 되네요. 역시 저같이 연약한 인간에게는 너무 벅찬 일이었던 것 같아요.”

창고의 일을 들먹인 제냐가 보란 듯이 심장 위에 손을 올렸다.

“전에 없이 얼굴이 창백하지 않은가요?”

마왕이 제냐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답했다.

“원래 그런 것 아닌가?”

제냐가 섭섭함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는 얼굴로 물었다.

“저한테 너무 관심이 없으신 것 아니세요?”

마왕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냥 넘어가겠다며?”

역시 벌써 엘리고스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당연히 제냐에게 경고한 이야기도 들었겠고.

제냐가 입꼬리를 매끄럽게 올렸다.

“이미 들켰으니까 위험 수당을 받고 싶다고도 말씀드렸는데…….”

“쯧.”

“더군다나 세 분에게 들은 게 있으실 텐데 왜 아무 말 안 하세요? 어떻게 마무리됐나 궁금하긴 한데.”

제냐는 질문을 던지면서도 마왕의 기색을 은근하게 살폈다. 세 마족이 어디까지 입을 놀렸을까?

“처벌은 그걸로 끝났어. 거울은 베리스 백작과 레라지에 후작이 나눠서 배상하기로 했고.”

아예 입을 다물었으면 좋겠지만.

“하지만 이런 게 궁금한 건 아닐 테지.”

마왕의 말에 제냐가 반쯤 포기한 채 물었다.

“…역시 이야기가 나왔군요?”

“나왔지.”

“그거에 대해 하실 말씀은?”

“내가 네 연애까지 신경 써야 하나?”

귀찮다는 얼굴. 마왕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문제는 이쪽이 찔리는 게 많아서 이게 다 떠보는 말로 들린다는 건데.

‘하지만 더 이야기하면 신경 쓰는 게 티 나니까.’

결국 제냐는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처음으로 이야기를 돌렸다.

“아무튼 어제의 일 여파로 조금 제정신이 아닌 상태예요.”

끈질기게 스스로가 정신이 매우 피폐한 상황이라는 걸 강조하자 마왕이 질린 얼굴로 제냐를 바라봤다.

그리고 약간의 침묵 뒤, 원하던 답을 들려줬다.

“…따로 챙겨 주지.”

제냐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엉망이 된 서류 뭉치를 끌어모았다.

“겸사겸사, 이 서류도 복구해 주시면 안 될까요?”

“…….”

“평소에는 실수하지 않잖아요.”

마왕이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

“평소에 하지 않은 실수를 굳이 오늘 한 이유는 불만이 많아서겠군?”

빈정거리는 게 짜증 났지만 마왕이 오늘처럼 구는 게 한두 해인가? 제냐가 감격했다는 듯 서류를 꼭 끌어안고 공손하게 웃었다.

“폐하의 넓은 아량에 마음이 풍족해졌답니다. 그러니 한 번 더 베풀어 주세요. 열심히 할게요.”

눈으로 욕을 잔뜩 퍼붓는 마왕의 시선을 모른 척하며 그에게 다가간 제냐가 마왕의 책상 위에 서류를 슬그머니 올려 뒀다.

“부탁 좀 드릴게요.”

“상전이 따로 없군.”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상전을 봤냐고 중얼거린 제냐가 생글생글 웃으며 서류가 복구되기를 기다렸다.

물러서지 않을 제냐를 알았는지, 마왕이 서류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해진 서류를 제냐에게 건네줬다.

제냐가 밝아진 얼굴로 서류를 받아 들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마왕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했던 일을 또 해야 했을 것이다.

“다른 데 정신 빼놓지 말고, 집중이나 해.”

끝까지 얄밉게 말을 덧붙이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제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자리를 돌아온 제냐는 출근을 한 후, 처음으로 잡생각 없이 일에 집중했다. 또 실수하면 이번에는 핑곗거리도 없었다.

제냐는 자리에 돌아간 그녀를 한참이나 쳐다보던 마왕의 시선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일에 몰두했다.

* * *

제냐는 잉크 자국에 엉망이 된 책상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마왕에게 책상도 치워 달라고 하고 싶지만 거기까지 부탁하는 건 역시 좀 양심에 찔렸다.

하지만 그래도 퇴근 시간을 늦추기는 싫었기에 제냐는 책상 청소를 내일의 그녀에게 미루기로 했다.

그렇게 서둘러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뒤에서 들리지 않을 것 같았던 목소리가 들렸다.

“인간.”

“…비네 자작님?”

전날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졌던 비네 자작이었다. 제냐가 얼른 주위를 돌아봤다.

하지만 금붕어 똥처럼 매일 붙어 다니던 베리스 백작은 주위에 없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폐하께 일정이 마무리됐다고 전해 들었는데요.”

왜 아직도 마왕성에 있냐는 말이었다. 비네 자작이 표정 변화 없는 얼굴로 말했다.

“엘리고스에게 일이 마무리됐다는 문서를 받느라.”

다른 이였다면 그러냐며 바쁘다고 자리를 떠났겠지만, 그래도 사흘간 그녀를 도와준 이에 대한 예의로 제냐는 비네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비네는 곧장 그녀를 찾아온 본론을 꺼내 들었다.

“폐하께서는 네 과거를 아시나?”

하지만 그다지 반길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절로 치솟는 뾰족함을 숨기며 제냐가 순진한 척 되물었다.

“제 과거요?”

“다들 널 신전에 살던 평범한 고아로 알고 있지 않나.”

“아예 틀린 말은 아니죠. 신전에 살던 고아가 맞으니까요.”

비네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말할 생각이 없나?”

그 문제를 심각하게 여길 거라면 왜 마왕에게 이걸 직접 말하지 않았을까? 뭐가 됐든, 경고를 받은 지금 이 이야기가 마왕의 귀에 들어가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질 게 뻔했다.

제냐가 이제까지 방긋 웃고 있던 태도를 지우고 날카롭게 물었다.

“해야 하나요? 굳이, 이제 와서?”

“…….”

“변하는 건 없을 거예요.”

비네가 반박하려는 것처럼 입을 열었지만 그 전에 제냐가 말을 더했다.

“저는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한숨을 크게 쉰 제냐가 삐딱하게 비네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하면 다른 이들은 변하겠죠. 제 행동 하나하나에 사소한 의미를 부여할 테고…….”

비네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쭉 훑은 제냐가 다시 그의 녹빛 눈을 마주 봤다.

“자작님처럼 이렇게 저를 떠보겠죠? 그건 너무 귀찮아요. 저는 지금도 피곤하고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지친 낯을 한 제냐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운이 나빠서 제가 직장이라도 잃거나 진짜 목이라도 잘릴 위기에 처하면 자작님께서 도와주실 건가요?”

비네가 침묵으로 답했다. 제냐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굴었다.

“그러지 않으시겠죠. 그러니까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고 봐요.”

그렇지 않냐고.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듯 턱짓을 하자 긴 침묵 끝에 비네가 그녀의 말에 긍정했다.

“…그래.”

의외였다. 적어도 무례하기 짝이 없다고 몰아붙이거나, 자기가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경고는 할 줄 알았는데.

역시 겉모습과 달리 말랑한 구석이 있었다. 그런 점을 믿고 부러 싸우자는 식으로 굴긴 했지만.

제냐는 비네가 마음을 바꾸기 전, 빨리 자리를 벗어나기로 했다. 하지만 또 한 번 비네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네 연인.”

그것도 지금 제냐가 가장 민감하게 여기는 소재로.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하. 비웃음이 튀어나올 뻔했다. 마족들에게 둘러싸인 그녀의 일상에서 제일 안전한 존재일 용사를 조심하라니?

어이없다는 감정이 대놓고 드러났지만 비네는 꽤 진지해 보였다.

“폐하의 기운과 비슷한 힘이다. 위험하고, 파괴적이야. 지금 당장은 괜찮아도 언제 틀어질지 모르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어디까지 하려나, 가만히 비네를 쳐다보는데 그가 눈을 찌푸렸다.

“이런 말이 불쾌하다는 건 안다. 하지만 마족 중에는 미친 것들이 많아.”

예를 들면 당신의 친구 베리스처럼 말이지.

비네가 그녀를 걱정한다는 건 알았다. 그녀에게 직접 과거를 밝히는 게 좋지 않겠냐고 권유한 것 역시도 그와 같은 맥락이었다.

하지만 정말 다행스럽게도 루미에르는 마족이 아닌 사람이었고, 평범한 사람이 아닌 용사였다.

이야기를 듣던 제냐는 비네가 입을 다물자 빙그레 웃었다.

“걱정해 주시는 건 감사해요.”

그리고 다시 공손한 시녀의 가면을 뒤집어썼다.

“하지만 저희 문제는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저희는 사이가 좋고, 앞으로도 사이가 좋을 테니까요.”

조금 전 뾰족하게 그녀의 속내를 다 드러내던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그 일은 네가 신경 쓸 일도 아니고, 네 말을 신경 쓰지도 않겠다는 제냐의 말을 알아차린 걸까? 비네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제냐는 또다시 붙잡히기 전 얼른 인사를 건넸다.

“그럼, 살펴 가세요.”

그리고 비네의 답을 듣지도 않은 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비네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지만 제냐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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