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성큼 다가온 용사에 제냐는 뻣뻣하게 몸을 굳혔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눈을 굴리며 상황을 파악하려던 제냐는 용사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육체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제냐의 답에도 용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말 꼼꼼히 제냐의 몸을 살폈다.
도망을 간다던가, 말을 바꿀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적극적인 태도도 예상하진 못해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녀의 몸에 생채기 하나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용사가 테이블 의자를 꺼내 줬다.
“늘 마시던 대로 준비했습니다.”
얼떨결에 의자에 앉아 테이블에 놓인 따뜻한 김을 뿜는 차를 멍하니 바라보던 제냐가 어색하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적당한 온도의 차는 입맛에 딱 맞았다. 제냐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힐끔 용사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용사가 눈을 곱게 접으며 물었다.
“입에 맞나요?”
“…네.”
차 담당은 당신이 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말을 삼켜 냈다. 그러고는 엘리고스와의 일을 어떻게 꺼내야 할까 고민하는데 용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짐작하신 대로 세간에서 말하는 용사는 제가 맞습니다.”
그러니까 자기소개부터인가? 뭐, 나쁘지 않은 시작이었다.
“제 특이한 체질 때문에 신전에 맡겨졌고, 성녀님께서 제게 이름과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분께 키워졌고 그 뒤에는 알려진 대로 용사로 살았습니다.”
많이 생략되긴 했지만 깔끔한 설명이었다.
“음, 어쩌다가 여기 홀로 있게 됐는지는 물어봐도 될까요?”
“…약간 사고가 있었습니다.”
정확히 설명해 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어쩌면 모두 설명하기에는 너무 구구절절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고.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
아니면 아직 제냐를 그 정도로 믿지 않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계획을 알아야 도와줄 수 있는 것 아닌가?’
혼자서 마왕을 잡으러 온 건지, 아니면 그 ‘사고’라는 것 때문에 동료들과 우연히 헤어진 건지. 동료들과 따로 연락은 되는지, 그렇다면 언제쯤 동료들이 구하러 오는 건지 등 묻고 싶은 말들은 넘쳐흘렀다.
하지만 믿음을 강요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더군다나…….
“오늘 집사가 저를 따로 불러 경고했어요.”
“경고요?”
“이제까지처럼 지내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하던데, 솔직히 너무 모호한 말이죠.”
후, 숨을 뱉어 낸 제냐가 말을 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집사가 당신이 이곳에 있는 걸 알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이 불안함을 입 밖으로 내뱉으면 후련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떨림은 더 커졌다. 빠르게 쿵쿵 뛰는 심장에 입 안의 살을 깨무는데 앞에서 의아하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제가 여기 있는 걸 안다면 성이 이렇게 조용하진 않을 텐데요. 제냐도 이렇게 몸 성히 돌아오지 못했을 테고.”
냉정하지만 객관적인 말이었다. 그러니까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만 본다면.
하지만 그녀는 그냥 평범한 시녀가 아니었다. 약간의 의심만으로 처리하기에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제냐는 얼른 고개를 저어 방금 했던 생각을 털어 냈다. 그리고 용사가 그랬던 것처럼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봤다.
“…그렇죠. 정말 의심을 샀다면 이렇게 무사할 리가 없겠죠.”
그렇게 정리하자 머리가 차갑게 식는 것도 같았다. 괜히 혼자 지레 겁을 먹어 호들갑을 떤 모양이었다.
“그래도 대비를 하는 건 나쁘지 않아요.”
개인적인 감정을 빼놓고 냉정하게 현실을 보면, 그들이 할 수 있는 대비는 하나였다.
“혹시 모르니까 저한테 앞으로의 계획은 알려 주지 마세요.”
혹여나 낌새를 눈치챈 엘리고스에게 제냐가 붙들려도 용사의 계획에는 차질이 없게 하는 것.
겸사겸사, 원래도 말할 생각이 없었던 용사에게 먼저 말을 꺼냄으로써 신뢰도 얻으면 더 좋고.
“일단 방법이 생길 때까지는 지금처럼 지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동의하냐고 용사를 쳐다보자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제대로 된 첫 대화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물론 아직 꼭 알아야 할 걸 듣지 못했지만.
제냐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물었다.
“그래서 이름이 뭐예요?”
얼마나 함께할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언제까지고 용사, 용사 부를 수는 없었다.
웃고는 있지만 조금은 기계적이던 용사의 얼굴에 확연한 감정이 깃들었다. 숨김없이 놀라움을 그대로 드러낸 용사를 보며 제냐는 고개를 기울였다.
고작 이름을 물어본 건데, 왜 저렇게까지 놀라는 걸까? 인간 세상에서 용사의 이름은 엄청난 비밀이라도 되는 걸까?
“본명을 알려 주기 그러면 가명도 괜찮…….”
“루미에르.”
그녀의 말을 잘라 내고 떨어진 이름에 제냐는 눈썹을 치켜세우고 그를 바라봤다.
루미에르.
“이름이 잘 어울리네요.”
예의와 진심이 반반 섞인 말이었다. 저 얼굴에 존이나 피터 같은 이름이 붙으면 이상했을 테니.
그러나 그 별것 아닌 말에, 그날 새벽에 들었던 듣는 이의 심장께가 간지러워지는 달큼한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양쪽 눈매가 모두 곱게 휘어지던 그림 같은 만들어진 웃음이 아니라, 한쪽 눈매가 살짝 찌푸려진.
“고마워요, 제냐.”
완벽한 웃음은 아니지만, 그렇기에 더 눈이 갔다.
웃음기 가득한 그 음률이 내뱉는 그녀의 이름이 조금 어색했다.
* * *
전날 밤.
그 웃음소리가 멈춘 후, 두 사람은 자잘한 대화를 나눴다. 침묵을 깬 용사는 질문이 꽤 많았는데, 이상하게 그 주제는 대부분 제냐에 관한 것이었다.
보통 하는 일은 뭔지, 좋아하는 음식은 뭔지, 취미가 있는지, 무슨 계절을 좋아하는지.
소소한 물음들이었으나 확실히 그런 자잘한 대화들은 둘 사이의 거리를 빠르게 좁혀 줬다.
그리고 오늘.
이야기하느라 늦게 잠들었던 것치고 두 사람 모두 이르게 하루를 시작한 덕에 출근 전 아침은 평소보다 여유로웠다.
“그러니까 제냐는 공주님이었던 건가요?”
아, 그거.
느긋하게 식사를 하던 제냐는 루미에르의 질문에 고개를 들었다.
전날 그렇게 많은 질문을 해 놓고 이걸 이제 묻다니, 인내심이 크다고 해야 하는 건가?
“그렇죠. 왕국이 망해서 이제는 소용없지만요.”
“마왕에게 납치를 당해서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있고요?”
루미에르의 찌푸려진 미간을 보며 제냐가 피식 웃었다. 노동력 착취라는 말을 그의 입에서 들으니 이상했다.
“그렇죠.”
“성력 때문에 납치된 거 아닙니까?”
근데 왜 사무직으로 고생하고 있냐는 뜻이 함의된 물음이었다.
“그러게요. 어쩌다 보니 이렇게 마계의 일을 전부 처리하게 됐네요.”
“전부요?”
“보안 1급 문서가 아닌 이상 제가 한 번씩 다 살펴보고 보고를 하는 거죠. 뭐, 1급 문서는 얼마 없으니까 대부분 제 손을 한 번 거치는 게 맞겠죠?”
말을 하다 보니 이상했다. 전날 했던 질문들은 다 그녀 개인에 대한 의미 없는 질문들뿐이어서, 어리둥절했었는데.
이제 다시 정보 조사를 하는 걸까?
어제의 대화는 친해져서 입을 열기 쉽게 하려던 수작이었던 모양이었다.
‘대놓고 물어봐도 괜찮다니까.’
제냐는 적당히 루미에르의 장단에 맞춰 주기로 했다.
“얼마나 여기 있었다고 했었죠?”
“10년이요. 그래서 최근 마계가 돌아가는 상황은 대부분 꿰고 있죠.”
그러니까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도 좋다는 의미를 담아 생긋 미소를 지으며 그를 쳐다보는데, 루미에르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미안해요.”
갑자기? 눈을 좁히던 제냐는 적당히 치고 빠질 줄 아는 루미에르에게 감탄했다.
여기서 바로 마계 소식을 물었다면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았을 것 아닌가?
제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옅은 미소를 지었다.
“루미에르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요?”
“…….”
보니까 루미에르는 실제로도 조금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용사의 책임감일까? 아니면 그다지 좋지 않은 과거를 들춰낸 것에 대한 미안함일까? 어느 쪽이든 루미에르가 신경 써야 할 일은 아니었다.
제냐는 그가 더 땅을 파기 전 자리를 정리하기로 했다. 입을 열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 루미에르는 예의 주시해야 하는 상태였다.
“출근할 시간이네요. 오늘은 뭘…, 시키려나.”
오늘 뭘 할 거냐고 물으려다 계획을 듣지 않기로 했다는 걸 떠올리고는 말을 바꿨다.
“사흘간 나름 고생을 했으니까, 평소처럼 퇴근시켜 주긴 할 거예요.”
“그래요.”
“뭐 먹고 싶은 게 있나요? 그간은 답을 안 해 줘서 혼자 골랐지만 이제는 아니잖아요?”
은근슬쩍 그간 입을 다물고 있어서 답답했다고 타박하자 루미에르의 얼굴에 다시 은은한 미소가 어렸다.
“그러니까 이제 내 취향만 묻지 말고 루미에르의 취향 좀 알려 줘 봐요.”
제냐가 방 한쪽에 있던 카탈로그를 꺼내 들었다.
“소고기 스튜는 좋아해요? 잘하는 곳이 하나 있는데.”
비프의 음식이 최고라고 여기는 제냐가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음식점 중 하나로, 그녀도 종종 애용하는 곳이었다.
“고기를 듬뿍 넣어서 엄청 진하고, 한 그릇만 먹어도 든든해요.”
먹음직스럽게 그려진 카탈로그 속 음식을 보여 주며 제냐가 부러 밝게 물었다.
“어때요?”
제냐와 카탈로그를 번갈아 바라보던 루미에르가 고개를 주억였다.
“…좋습니다.”
“그럼 오늘은 빨리 퇴근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요.”
“네.”
아까보다는 빠르게 답이 돌아왔다. 다행이었다. 평소보다 느긋하게 움직인 탓인지 이제 출발하지 않으면 지각이었다.
“뒷정리는 부탁해도 될까요?”
제냐가 테이블 위 음식들을 눈짓하며 묻자 루미에르가 부드럽게 웃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그래, 다시 웃는 거 보니까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제냐는 편안한 마음으로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