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고스의 뒤를 따라가며 제냐는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용사와 마주치진 않았겠지?’
뭔가 수상한 낌새를 느꼈거나, 문제가 생겼다면 엘리고스가 이렇게 빨리 창고에 도착하진 않았을 테니, 아마 그럴 것이다.
몇 번이나 고개를 드는 불안함을 다시 억누르며 제냐는 지금 그녀가 처한 상황에 집중했다.
용사도 용사지만 제냐의 상황도 만만찮게 곤란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엘리고스에게 거짓말을 하려던 걸 들켰다.
“제냐, 따라와라.”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엘리고스의 서늘한 눈빛을 정면으로 받은 제냐는 그와의 독대를 선물받았다.
사고 치지 말라고 붙여 놨더니, 함께 사고를 쳤냐는 그 눈빛이 얼마나 억울하던지.
‘애당초 저 사고뭉치들이랑 날 엮지만 않았으면 아무 문제 없었잖아?’
집무실로 들어가는 엘리고스와 따라 들어오라는 듯 열려 있는 문. 눈치를 살피던 제냐는 조용히 그를 따라 방으로 들어섰다.
“그래서 보고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에 제냐는 얼른 표정 관리를 하며 자리에 앉았다. 억울하긴 하지만 그걸 티 내 봐야 좋을 일은 전혀 없었다.
“약간의 문제가 있긴 했지만 잘 마무리됐습니다.”
“약간의?”
거슬린다는 되물음에 제냐는 태연한 얼굴로 덧붙였다.
“미로의 거울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문제가 있긴 하죠.”
들고 있던 물건 목록을 건네주자 그가 힐끗 종이를 내려다보더니 관심 없다는 듯 테이블 위에 종이를 내려놨다.
음, 역시 이 정도로 넘어가진 않을 모양이었다.
“그와 관련해서는 후작님과 백작님에게 보상을 청구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제냐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입을 일자로 다물자 앞에서 작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휘말렸던 건가?”
제대로 말을 맞추지 않은 상황에서 어정쩡하게 거짓말을 하느니 순순히 진실을 말하는 게 좋았다.
“네, 그렇습니다.”
“어쩌다가?”
“후작님과 백작님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있어서요.”
그저 상대를 긁기 위한 개싸움이 의견 충돌이라는 한껏 완화된 말로 포장됐다.
“알 만하군.”
“거울은 망가졌지만 그래도 그 외에는 문제가 없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괜히 말을 늘였다가 다른 질문이 나올까 제냐는 일부러 피곤한 기색을 드러냈다.
“일정이 더 늘어나는 건 지양하고 싶은데요.”
이 정도면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청백색 눈이 그녀에게 닿았다.
“어울리지 않게 말이 많군.”
탐색하듯 그녀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은 예리한 눈빛.
뭔가를 알고 그러는 건지, 아니면 조금 전 거짓말을 하려던 게 들켜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제냐가 찔끔한 마음을 꽁꽁 숨겼다.
“평소에도 말이 없는 편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이대로 그냥 넘어가겠다?”
“오늘 일과 관련된 위험 수당은 더 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휘말렸던 사실을 덮으려던 것 같았는데, 그럼 없던 일이 된 것 아닌가?”
역시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미 들켰잖아요? 그러니까 뭐든 받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제냐가 뻔뻔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마왕이라면 이쯤에서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려 줄 텐데, 엘리고스의 표정은 여전히 서늘했다.
집사 엘리고스.
마왕과 함께 있을 때는 종종 유치한 모습을 보여 주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마왕보다 더 대하기 까다로운 상대였다.
대부분의 사용인은 엘리고스를 사용인치고 힘이 강한 집사 정도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엘리고스는 평범한 집사가 아니었다.
오만하고 호전적인 귀족들이 어째서 일개 집사일 뿐인 엘리고스에게 쩔쩔매는 걸까? 그가 마왕의 신뢰를 받는 마족이라서?
자연스레 귀족들의 인사를 받는 엘리고스를 수상쩍게 여기던 제냐에게 답을 알려 준 건 바로 비프였다.
“엘리고스 님을 조심해야 한다, 그는 본래 고위 귀족이었으니까.”
고위 귀족.
타고난 혈통이 아닌 개인의 무력으로 쟁취하는 귀족이라는 자리를 몇백 년간 흔들림 없이 지킨 이들에게 주어지는 위치였다.
“더군다나 폐하의 잠재력을 알아보시고, 제일 먼저 그분의 발아래 무릎을 꿇으셨지.”
패배하여 귀족의 자리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마왕을 가까이에서 보필하기 위해 스스로 물러난 전대 귀족. 그리고 마왕을 키워 낸 장본인.
절대 만만한 자가 아니었고, 마왕만큼이나 조심해야 할 마족이었다. 그러니 겁에 질린 모습을 보이거나, 기가 눌리면 단박에 잡아먹힐 게 뻔했다.
제냐는 꿀릴 것이 없다는 듯 그 눈을 마주 봤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엘리고스는 제냐의 눈이 시릴 때가 되어서야 입을 열었다.
“…일단은 넘어가지.”
여전히 미심쩍은 것이 사라지진 않았지만, 일단은 여기까지 하겠다는 것 같았다.
제냐는 손바닥 안에 찬 땀을 옷에 닦으며 엘리고스를 쳐다봤다.
찔리는 게 많으니, 그가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 주겠다고 하는 지금 얼른 방을 빠져나가야 함이 맞았다.
하지만 확인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따로 더 하실 말씀 없으세요? 사용인들을 죽이신 것 말이에요.”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꼴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무섭다고 그냥 외면하면 닥쳐올 위험을 대비할 수가 없었다.
의외라는 듯 제냐를 돌아본 엘리고스가 쓰고 있던 모노클을 벗으며 맨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따로 할 말이 필요한가?”
“평범한 일은 아니었으니까요.”
모노클을 벗은 엘리고스는 평소보다 더 거친 느낌이 났다. 얼음장 같은 날것의 눈을 마주하자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단순히 내가 너를 아껴서 그랬다면 믿을 건가?”
엘리고스가 그럴 이가 아니라는 건 둘째 치고, 저런 얼굴로 그런 말을 해 봤자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제냐는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아니요.”
“그래, 그렇게 멍청하진 않겠지.”
엘리고스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 같았다. 하지만 눈을 한 번 감았다 뜨자, 평소와 똑같이 일자로 다물린 입매가 보였다.
제냐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린 엘리고스가 다시 모노클을 쓰며 말했다.
“경고할 필요가 있었다.”
경고.
움찔 떨릴 뻔한 몸을 붙잡은 제냐가 되물었다.
“누구에게요?”
사용인들에게 하는 경고? 아니면…….
엘리고스가 제냐를 빤히 쳐다보며 답했다.
“그게 누구든.”
“저한테도 경고하신 거죠?”
제냐가 물러서지 않고 묻자 엘리고스가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미소를 보였다. 하지만 그 웃음은 비웃음도, 경고도 아니었다.
기특하다는 것처럼 그녀를 쳐다보는 엘리고스에 제냐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고작 연애한다는 소문이 퍼진 것만으로 경고를 받는 건 이상했다.
“아직은.”
보라색과 청백색이 허공에서 얽혀 들었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머리가 아팠다. 뭐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제냐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엘리고스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는 것뿐이었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체됐군.”
제냐에게는 억겁 같은 시간 동안 이어지던 눈 맞춤을 끊어 낸 건 엘리고스였다.
“지금처럼만 지낸다면 아무 일도 없을 거다.”
그녀를 혼란스럽게 하다못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만들어 놓은 것치고는 싱거운 물러섬이었다.
‘지금처럼만.’
엘리고스가 뭘 알고 있든, 지금 상태만 유지한다면 그냥 넘어가 주겠다는 그 말.
‘정말 어디까지 아는 거지?’
용사의 존재를 안다면 엘리고스가 이렇게 손쉽게 물러났을까? 하지만 아무것도 모른다기에는 그의 경고가 너무나 직접적이었다.
도대체 뭘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 엘리고스가 축객령을 내렸다.
“내일부터는 다시 복귀하도록 해.”
“…네.”
제냐는 그렇게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도망치듯 방을 나섰다.
빠르게 복도를 벗어난 제냐는 얼마간 더 걸음을 옮기다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어디로 가야 하지?’
뭘 해야 하지? 이렇게 앞이 깜깜했던 적이 또 있었던가? 제냐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눈을 질끈 감는데, 순간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아, 제냐! 결국 휘말렸다며?”
“고생했어, 진짜 큰일 날 뻔했다.”
마왕성의 사용인들이었다. 옆으로 모여든 사용인들이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무사히 마무리됐으니까, 그걸로 위안 삼아야지.”
“뒤처리는 거의 다 하셨는데, 그래도 조금 남은 건 우리가 하기로 했어. 위험한 물건들은 다 빼놨다며?”
“레라지에 님은 얌전한 편인 줄 알았는데, 역시 귀족들은 다 똑같다니까?”
“그래도 다정하신 편이잖아? 베리스 백작과 함께 있을 때만 조심하면 되겠지.”
“정말 베리스 백작과 레라지에 후작님이 싸워서 저렇게 엉망이 된 거야? 어떻게 살아 있는 거야, 제냐?”
와글와글 몰려든 사용인들에 눈을 찌푸리던 것도 잠시, 사용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복잡하던 머리가 서서히 정리되기 시작했다.
“세 분은 폐하께 불려 갔어.”
“사고를 그렇게 쳤는데 당연하지.”
“폐하께서 혼내 주실 거야, 제냐.”
“오늘은 이만 퇴근해도 될걸?”
“수고했으니 당연히 그래야지!”
그래, 그녀는 지하 창고에서 일이 생겨서 엘리고스에게 불려 갔던 거였다. 그리고 그녀가 엘리고스에게 따로 불려 간 건, 세 마족의 입을 단속하려고 했기 때문이고.
그들의 입단속을 하려고 했던 이유는…….
‘용사.’
금발의 푸른 눈을 지닌, 기억 속 마왕을 단박에 처리하던 용사를 떠올리자 안개가 낀 것 같던 머리가 맑게 개었다.
‘…혼자가 아니야.’
그녀는 혼자서 고민하고 머리 아파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미안해요. 이만 방으로 가서 쉬고 싶은데.”
그녀의 방에는 용사가 있었다. 그리고 용사는 이제 침묵하지 않을 테고.
그러니까 이 문제는 용사와 함께 고민하는 게 맞았다.
무례하지 않게 사용인들을 떼어 낸 제냐는 방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이를 떠올리며 씩씩하게 발을 내디뎠다.